#122. 그것만인가? (2)
나도 모르게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일까, 풀린 다리에 좀처럼 힘이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할 건 제대로 해야지….’
현실적으로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계속 찜찜함을 떨치기 힘들었다.
혹시 정말로, 내가 지원의 할아버님께 피해를 끼쳤을 가능성은 없는 건지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케이 피디를 불러냈으나 자기 좋을 때만 나타나겠다는 듯 묵묵부답이었다.
‘하….’
시스템창 하단에 언제 추가되었는지 모를 문구가 반짝였다.
[모든 결과는 시스템 사용자 본인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발생함을 알려 드립니다.]
그래서 그 범위가 어디까지냐고. 말장난도 정도껏이지. 보고 있자니 더 열이 뻗쳐서 시스템창을 눈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
일단 입원은 잘 마무리했고, 내일 촬영은 내가 투입될 거고, 지원의 복귀는… 지원이 스케줄이 없는 2~3일 안에 할아버님께서 차도가 있으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가….’
다른 거 또 마음에 걸리는 게 뭐가 있지. 생각해 본 나는 곧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간병비 그거 엄청 나올 텐데.’
따로 가입한 실손 보험이 없다면 치료비나 입원비도 만만치 않을 테고.
여유가 있는 집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일반적인 조손 가정의 형편을 생각했을 때 넉넉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지원이가 평소에….’
우리가 한창 신나서 배달 음식 시켜 먹을 때 반응이 어땠더라. 이런 거 처음 먹어 본다고 엄청 신기해했었지.
‘그게 그냥 어르신이랑만 살아서 안 먹어 본 걸 수도 있겠지만….’
배달 음식 하나 턱턱 시켜 먹지 못할 형편이었다면?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힘들겠지만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우리 데뷔 전부터 굴렀던 걸 생각하면 곧 정산받을 수 있을 텐데.’
임시 소속사랑 본소속 회사 수수료를 이중으로 제하고 나면 원금에 비해 귀여운 수준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받아야 좀 애가 마음에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내일 매니저랑 스케줄 가면서 한번 물어봐야겠다.’
내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다행인 거고 아니라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내일의 계획을 정리한 나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메신저를 확인했다.
‘핸드폰도 못 볼 만큼 바쁜 건지, 아니면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건지….’
지원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전화 대신 메시지를 남겼다.
[나] 너무 걱정하지 마 오후 11:42
[나] 괜찮으실 거야 오후 11:42
[나] 회사 일은 내가 내일 안에 해결해 둘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오후 11:43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계속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던 탓일까. 현호도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지원이 괜찮을 거야. 본인이 다친 건 아니니까….”
일단 그렇게 달래긴 했는데, 진짜 괜찮나? 마지막까지 불안해 보이던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시스템의 타이머는 지원의 복귀를 종용하며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잠을 설친 채로 일찍 일어나서 사옥으로 이동한 나는 간단한 세팅을 마쳤다.
스타일링에 크게 힘을 안 주는 거 보면 오만 고생을 다 하느라 세팅이 망가지는 곳으로 가나 본데….
불길함이 엄습하긴 했으나 지원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살짝 뚝딱이지만 필사의 노력으로 따라오는 맹하고 순한 캐릭터.
TV에 비치는 모습이나 실제나 큰 차이가 없으니 말도 안 되게 힘든 육체노동 같은 건 안 시키지 싶은데….
“저희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촬영 팀이 미니밴의 앞뒤로 탑승한 채로 이동하는 내내 내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이따 도착하시면 알려 드릴게요~”
그게 정해진 룰이라는 듯 물어봤자 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무슨 현장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 초연해진 채로 눈을 감았다.
‘뭐, 설마 유지원이라고 유치원을 섭외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니겠지.’
그리고 마침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어딘가로 올라간 나는 그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
“자, 그러면 오늘의 엔터 체험단! 첫 번째 만남의 장소를 공개합니다!”
‘이거 진짜 괜찮… 나…?’
눈을 가린 안대를 풀자 보인 건 알록달록한 색감이 매우 인상적인 키즈 카페 입구였다.
아직 오전 10시밖에 안 된 시간이었는데도 인근 어린이란 어린이는 다 몰려온 듯 내부에 평균 연령이 참으로 젊어 보이는 인구가 바글바글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발 이거만 아니길 바랐는데!’
어린이를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실존하는 어린이들과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해야 할까.
저 무서울 정도로 작고 여린 존재들이 내 실수로 인해 혹시나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이규민이나 표영인한테 얘기라도 해 볼걸….’
둘 다 능청맞게 잘 놀아 주던데. 아무리 봐도 적성을 잘못 찾아온 듯한 현장에 진땀이 흘렀다.
“인수 씨! 시작하기에 앞서 소감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PD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곧이어 안에서 준비하고 있던 직원분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안녕하세요! 저는 꿈꾸는 토끼 키즈 카페 매니저 조경희고요, 오늘 일일 알바 체험하시는 동안 교육 도와드릴 예정입니다. 반갑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오는 인사말의 억양이 마치 구연동화라도 하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역시 전문가….’
나는 시작부터 잔뜩 위축된 상태로 물었다.
“저는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어… 일단 저희가 오늘 오픈 준비는 끝나서요. 아이들 안전하게 기구 이용할 수 있도록 기구 안전 도우미 및 청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화책 읽어 주기까지 하고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초심자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닌지 정신이 어질어질했으나 못 한다고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동화를 읽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요를 같이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반대로 평소에 일하시는 분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려나. 방음 문제도 있을 테고.
나는 서둘러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 버리고 활짝 웃었다.
“네, 그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네! 바로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아이들에게 나는 특유의 달달한 파우더 냄새가 났다.
“음….”
근데 묘하게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옮기다 보니 내 허리쯤까지 올까 싶은 키의 어린이가 매트 위에 우욱 속을 게워 내고 있었다.
“헉, 저거 괜찮은 건가요?”
“네? 어머!!”
화들짝 놀란 직원이 내 유니폼을 꺼내다 말고 후다닥 아이에게 달려갔다.
살짝 눈치를 보던 나도 재빨리 티슈 등 청소 도구를 챙겨 다가갔다.
“아직 어린 친구들이라 스스로 멀미를 하는 걸 잘 못 느끼고 기구를 계속 타는 친구들이 있어요. 앞에서 아이들 위험하지 않게, 안전 수칙 지킬 수 있도록 보조해 주시면서 아이들 상태도 같이 확인해 주세요!”
어린이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존재구나.
‘나는 어땠으려나….’
외할머니 손에서 자랄 때부터 얌전하고 실내에 있는 것을 좋아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손이 덜 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키워 주시면서 이런저런 고생 많이 하셨겠지.’
갑자기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잘하실 수 있겠어요?”
청소에 소독까지 마치고 다시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자 매니저가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잘해야죠.”
자신은 없지만. 흐릿한 미소와 함께 시작된 체험은 예상했던 것보다 험난했다.
“우리 친구 거기 올라가면 안 돼요~”
왜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걸까.
혹시 아이들의 귀에는 내가 말리는 소리가 ‘힘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야!’로 들리는 것이 아닐까?
굳이 굳이 지붕을 타고 올라가겠다고 부모님이 보면 심장 철렁할 곳으로 발을 디디는 바람에 2층 규모의 슬라이딩 탑을 수십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
“친구, 조금만 쉬다 탈까? 혹시 어지럽거나 하지 않아요?”
“괜찮아여! 우욱, 저 탈 거예요!!”
아무리 봐도 얼굴이 창백한데 곧 죽어도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내려가는 미끄럼틀을 타야겠다고 자기주장을 펼치거나,
“와아~! 떨어진다!!!”
아래에 사람이 있건 말건 그대로 뛰어내리는 통에 받아 주다가 명치에 헥토파스칼 킥을 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평소 20kg이 넘는 반려견의 주둥이 어택에 단련되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심정지도 무리가 없었을 충격이었다.
“…….”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들이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으려니 아이들이 순식간에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와!! 쓰러졌다!!!”
“쓰러졌다!!!!”
뭐가 그렇게들 신나고 행복한지 내 주위를 에워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주술 의식이 따로 없었다.
“어머, 인수 씨 괜찮으세요!?”
결국 놀란 직원이 달려와 구출해 주고 나서야 의식은 끝이 났다.
그다음으로 내가 맡은 임무는 기수를 수동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아이가 의자에 앉으면 안전바를 채워 주고 힘으로 한 바퀴 돌리는 기구였는데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거… 뭔가….’
그 곡물 가는 소, 뭐 그런 거 같지 않나?
묘하게 나의 인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으나 최소한 어린이들이 동력원을 공격하지는 않아서 다른 일보다는 마음은 편했다.
중간중간 일부러 틀어 주신 건지 동요에 섞여서 겟데뷔에서 불렀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다른 곡은 몰라도 단체 PV곡만큼은 익숙한지 따라부르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 친구 이 노래 알아요?”
내가 자연스럽게 물어보자 한 아이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오오, 나는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럼 삼촌도 누구인지 알아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가차 없었다.
“아뇨!”
“그렇구나, 겟데뷔는 알아도 삼촌은 모르는구나….”
아직 멀었구나…. 분발하자, 서인수….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해 주는 것이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 이 노래 춤 잘 추는데. 한번 볼래요?”
“와! 진짜요? 네!!!”
박자에 맞춰 살짝살짝 몸을 움직여 주니 한층 더 신이 난 아이들이 동작을 조금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내 키의 반절밖에 안 되는 어린이에게 둘러싸여서 내 동작을 엉성하게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도 되게 무슨… 주술 의식 같지 않나.’
어른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럼 된 거겠지.’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앞서 촬영 분량이 많이 나와서 구연동화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용객들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청소를 하고 마무리 짓기로 했다.
청소용 도구들을 잔뜩 들고 어디를 치워야 할까 배회 중인 내게 한 어린이가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쪽에 장난감 빠졌어요.”
저쪽? 아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안전용 네트 망 아래, 잘하면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모형 기차가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