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것만인가? (1)
[‘유지원’의 서브 에피소드 미션(호감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뭐, 가벼운 갈등이나 고민 상담 이런 내용이 나오려나.
나는 그동안의 에피소드 미션들을 떠올리며 큰 걱정 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상세 내용을 볼 수 있는 안내창이 떴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호감도) ▷ 굳세어라 지원아]
[예상 수령 보상]
[▷코인 1개]
[▷등장인물 ‘유지원’ 보유 스킬 수동 활성화 가능]
[유지원을 스케줄 활동에 정상적으로 복귀시킬 것]
[잔여 제한 시간: 119:59:59]
“……?”
이게 무슨 소리야.
애가 이탈했어? 언제? 아까 같이 차 타고 복귀할 때만 해도 주혜성이 주는 간식 오물오물 잘 받아먹고 있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사고가 터질 수가 있나? 다급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니,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숙소 전경이었다.
‘뭐야, 별일 없는….’
하며 슥 멤버들을 훑어보는데 지원이 보이지 않았다.
“??????”
내가 당황해서 지원과 그 외 셋이 같이 쓰는 큰 방으로 들어가자 규민이 뭘 보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냐? 네가 웬일로 우리 방에 와? 하~ 형 좀 그만 찾으라고 했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지원의 물건이 있는 곳을 살폈다.
“아, 저 싸가지 좀 봐, 진짜.”
규민이 뭐라 뭐라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지원의 자리를 살폈다. 핸드폰이며 지갑이며 오늘 입은 겉옷이며, 외출했다면 챙겨 갔을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었다.
내가 규민에게 물었다.
“지원이 어디 갔어? 아까 들어올 때 있었잖아.”
그러자 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까 뭐 전화 받고 온다고 급하게 나가던데?”
“뭐?”
“겉옷 안 입고 나갔으니까 금방 돌아올걸?”
규민의 태평한 대답에 나는 시스템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빌라 앞쪽 주차장이 있는 곳이나 옥상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지원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전화는 받나? 핸드폰은 확실히 가져간 것 같으니 전화를 걸어 보자 통화 중이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꽤 오래 이어지는 것이, 이 통화가 지원의 탈주 원인인 듯했다.
‘누구랑 무슨 통화를 하길래?’
지원이 통화를 종료하길 기다리는 내내 속이 까맣게 탔다.
한참을 빌라 앞에 서서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겨우 지원과 통화가 연결되었다.
“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전화받는다고 나갔대서 걱정….”
그러자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원이 울먹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 혀, 형, 저 어떡해요?
뭔데. 제발 본론을 먼저 말해 줘. 나는 따라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너 어디야!?”
지원이 윽, 흐끅, 수화기 너머에서 간신히 울음을 참더니 겨우 대답했다.
- 저, 흑, 지금, 병원, 가고 있어요.
제발 한 번에 상황을 좀 설명해 줘. 나는 속이 숯처럼 탄 채로 물었다.
“왜 무슨 일로? 뭐 때문에? 너 다쳤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서 다그치자 지원이 딸꾹질을 꾹꾹 참는 소리를 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 하, 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흑, 계신다고….
미치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우주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설마 내가, 에피소드 수행 버튼을 눌러서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어도 원래 일어났을 일인가.
어느 쪽이든 전부 내 탓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놓아 버릴 듯한 정신 줄을 단단히 붙들고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확인은 천천히 케이 피디에게 물어보면 될 거고.’
일단 내가 뭘 해야 하지. 나는 차갑게 굳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지원에게 말했다.
“어디 병원? 나도 갈게.”
아직 미성년인 지원이 처리하기에는 버거운 일들이 많을 터다. 생판 남이라고 해도 같이 상의할 사람이 있으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 지, 지금, 오시게요?
“응, 너 혼자 수속 진행하기 힘들 것 같아서.”
- 흑, 죄, 송해서….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 리더라고 있는 걸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겠어.”
통화를 종료한 나는 급히 숙소로 돌아가서 지갑과 겉옷, 그리고 지원의 짐을 챙겼다.
“엥? 어디가?”
제일 먼저 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묻기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지원이,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대. 지금 응급실에 있는데 곧 입원 수속하고 하면 정신없을 것 같아서 같이 있어 주려고.”
“아…….”
규민이 길게 탄식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규민이 곧 뒤를 돌아 빈 가방을 집어 지원의 서랍장 안에 있던 여벌의 옷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챙겨 가. 쓸 일 없으면 다시 들고 오면 그만이니까.”
거기에 샘플로 받은 듯한 세안 용품들과 슬리퍼에 핸드폰 충전기까지. 왠지 익숙해 보이는 느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규민을 바라보았다.
“집안 어르신들 아프면 간병비 아낄 겸 누구 써먹기가 편하겠냐. 딴따라 한답시고 집에서 노는 놈 데려다 돌려쓰고 그러지.”
규민의 자조적인 웃음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가서 어떤지 연락 좀 해 줘. 지원이 걔는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 같으니까.”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워낙에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도 계속 기사님이 흘끔흘끔 내가 앉아 있는 좌석 쪽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아….’
상황이 상황인지라 알아보는 일이 유쾌하진 않은데. 속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으려니 내릴 때쯤 기사님이 물었다.
“혹시 그거예요? 요즘 그 티비에 나오는….”
잔뜩 긴장한 순간.
“플라워보이즈, 그거?”
‘응?’
전혀 다른 헛다리를 짚고 계셔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네? 아뇨. 저 그냥 대학생이요.”
나는 모자를 더욱 푹 당겨 쓰며 카드를 돌려받고 택시에서 내렸다.
늦은 시간임에도 응급실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오히려 늦은 시간이라 이렇게 많은 건가.’
지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보호자 임시 출입증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는 비어 있었고, 지원만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할아버님은?”
내가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서 묻자 지원이 잔뜩 울상인 얼굴로 대답했다.
“거, 검사받으러….”
나는 우선 할아버지가 얼마나 다치신 건지부터 확인했다.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거야?”
그러자 지원이 움찔거리면서 겨우 문장을 끄집어냈다.
“허, 허리를….”
“디스크 터지신 거야?”
“원래도 안 좋으셨는데….”
“넘어지시거나 어디 부딪히신 건 없고?”
“계단을 올라가시다가 구, 굴렀….”
무슨 1문 1답이라도 하듯 캐물으니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졌다.
원래도 허리가 안 좋아서 계속 한의원 다니면서 통증을 최대한 줄이는 거로 유지하고 계셨는데.
계단에서 지팡이를 잘못 디뎌서 뒤로 구르시는 바람에 그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웃이 발견해서 신고해 주었다고.
지원은 계속 자기가 할아버지랑 같이 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자책했다.
“곧 검사 끝나신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자.”
최대한 지원을 안심시키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할아버님이 곧 휠체어에 탄 채로 침상으로 돌아오셨다. 허리에는 복대를 차고 있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하신 상황은 아니시고요. 다만 지금 통증이 너무 심하신 상태이기도 하고 집에 관리를 도와주실 분이 없으시다고 하셔서요. 입원하시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와 지원 모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까 자세히 캐묻지는 못했지만 지원은 꽤 오래전부터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왔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4인실인데도 넓은 거실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옷장과 책상이 생겼다고 좋아했었지.’
내내 할아버지와 살다가 드디어 또래와 자기만의 물건을 가지고 살게 되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설렜을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시다가 다쳤으니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건가.’
나는 우선 현실적으로 지원이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돌봐 드리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입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원할게요. 수속은 어디서 진행하면 될까요?”
나는 지원을 일으켜 세웠다.
“이쪽이 직계 가족인데 아직 미성년자거든요.”
“그럼 가족이 학생 한 명밖에 없는 거예요?”
접수처의 직설적인 질문에 지원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네.”
“그러면 일단 보호자 없이 입원 진행할게요.”
겨우겨우 입원 수속을 진행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우선 할아버님이 스스로 거동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는 것이 관건인데, 당장은 간병인이 있는 것이 좋을 거라 간호사가 안내를 해 주었다.
병원에서 건네준 연락처와 명함에는 비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지….”
할아버지를 입원실로 올려 보내고 남은 지원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일단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짐부터 챙겨. 할아버지 생필품이나 이것저것 필요한 거 있으실 테니까.”
“응…!”
겨우 지원을 달래고 나니 이제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 자컨 촬영…. 첫 타자가 유지원 아니었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스케줄표를 확인하자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맞았다.
‘아…….’
당장 내일이었다.
‘큰일 났네.’
나는 재빨리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 다름이 아니라 지금 지원이가 할아버지가 입원하셔서 내일 도저히 촬영이 안 될 것 같거든요.”
- 헉, 그래요? 많이 편찮으시대요? 어떡하지? 이미 내일 촬영 팀이랑 일정 다 확정된 거라 이제 와서 취소가 안 되는데….
안 되면 어떡해. 내가 해야지. 나는 후,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럼 내일 제가 먼저 촬영해도 될까요?”
그러자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 헉, 인수 씨가요?
“네, 혹시 그 섭외해 둔 거 때문에 도저히 안 될까요?”
- 어…. 절대 안 되는 건 아닌데 이제… 인수 씨가 좀 고생하실까 봐….
“그런 거면 괜찮아요. 내일 제가 갈게요. 저는 바로 숙소로 복귀할 거고 지원이는 할아버님 짐 챙기느라 오늘은 숙소로 못 들어갈 것 같아요.”
- 아, 네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인수 씨도 고생이 많으세요.
짧은 대화 끝에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다.
잠시 후 돌아온 지원에게 곧바로 상황을 전달했다.
“내일 촬영은 내가 대신 나갈 거니까 너는 할아버님 상태 괜찮아지실 때까지 계속 옆에서 돌봐 드려.”
“그래도 돼…!?”
지원이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뜨고 놀라서 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겨우 눈만 동그랗게 뜬 게 웃기면서도 귀여워서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할아버지 병실로 가. 나는 숙소로 돌아가 볼게. 내일도 연락할 테니까 걱정 말고.”
“응…! 고, 고마워….”
고맙긴. 나는 계속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간상으로 보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혹시나 내가 에피소드 미션을 수락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
그 일말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앞으로 한동안은 지원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그럼 이따 할아버지 댁 도착하면 연락해.”
지원과 헤어진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상황을 전해 듣고 걱정하던 멤버들도 시간이 늦어 모두 잠이 든 듯했다.
“후….”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