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의심해야 하는 건 (2)
“……!?”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열려 있던 칸에서 난 소리였다.
‘…….’
남이 들어가 있는 화장실 문을 여는 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혹시 응급 상황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나는 망설임 없이 칸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칸 앞에 서서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는 반응조차 없었다.
‘너무 많이 마셔서 그대로 잠들기라도 했나.’
일단 깨우거나 직원한테 얘기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슬쩍 칸막이 문을 열자 음? 생각도 못 한 인간이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의자처럼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아까 다른 테이블 가서 스태프들이랑 좀 마시는 것 같더니만 과음했나.
나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든 취객의 어깨를 손가락 하나만 대고 흔들었다.
“선배님, 일어나세요. 여기 화장실이에요.”
그러자 현찬이 부스스 잔뜩 찌푸린 눈으로 실눈을 떴다.
한참 상황을 파악하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갸웃거리더니 불쑥 호통을 쳤다.
“너! 찌~인~짜, 짜증 나~”
이게 무슨 추태야.
그동안 내내 서글서글 웃는 낯으로 친한 형처럼 대하라느니 어쩌니 입은 열심히 털어 놓고, 취하자마자 이런 모습이라니.
무슨 이야기를 이어서 할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으나, 당장은 현찬을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이 먼저였다.
“네네, 알겠으니까 정신 차리고 일어나 보세요. 가서 매니저님 불러와 드릴게요.”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방생하고 가 버릴 만큼 인간성이 못돼 먹진 않았다.
이러다 사진이라도 찍혀서 인터넷에 떠돌면 큰일일 테니까.
‘가뜩이나 한물갔다는 악플 때문에 신경 쓰는 티 꽤 내던데.’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콘서트 자리를 내준 건 감사한 일이기도 했고 동종 업계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인류애는 있었다.
내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현찬을 깨우려 하자 현찬이 애도 아니고 앙탈을 부리며 내 손을 뿌리쳤다.
“아, 나한테 충고하지 마. 후배 주제에 건방져, 진짜~”
충고는 무슨. 인류애라고요. 나는 취객을 상대로 입씨름하기 싫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됐으니까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저 누구인지는 알아보시는 거죠?”
내가 속으로 참을 인을 네 번쯤 삼키며 묻자 불쑥, 현찬이 이해 안 되는 말을 했다.
“내가아~ 너! 때문에! 진짜 왜 이딴 짓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차피 취한 사람이다. 내일 아침에 세상을 저주하면서 깨어나기나 하겠지.
나는 속으로 삐죽 얄미운 생각이 들어 영혼 없는 눈으로 현찬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후배 앞에서 추태 그만 부리고 일어나세요.”
이래도 안 일어나면 일단 냅두고 가서 매니저를 불러와야겠다. 반쯤 포기한 그때 현찬이 계속 칭얼거렸다.
“아… 진짜 짜증 나. 내가 왜 후배 괴롭히는 짓이나 해야 하는 건데.”
“네?”
순간 귀가 탁 뜨였다. 괴롭히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던 건가? 아니, 애초에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준비한 계획이었다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님이 저를 언제 괴롭히셨어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투로 천연덕스럽게 묻자 현찬이 눈꺼풀도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좀!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면! 한 번쯤은 실수를 하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외려 역정을 내는데도 나는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희한테 뭐 잘못한 거 있으세요?”
그러자 현찬이 흥, 눈을 감은 채로 코웃음을 쳤다.
“누굴 바보로 알아? 내 입으로 술술 말해 주게?”
취해서 이렇게 꼬장 부리는 걸 보면 바보 맞는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여섯 번째 삼키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 둔하다는 얘기 좀 많이 들어요. 진짜 몰라서 그런데 하나만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흥….”
현찬이 팔짱을 낀 채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팬 미팅 같은 곳에서 자기 말고 다른 멤버를 보는 팬에게 했으면 꽤 귀여운 질투처럼 보였을지도….
하지만 잔뜩 취해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여서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 선배님, 저 진짜 너무 궁금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속으로 진한 회의감이 밀려와서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너도 그 노친네도 짜증 나…. 으음….”
노친네는 또 뭐야. 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노친네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찬은 그대로 쿨쿨 곯아떨어졌다.
“흠…. 으음….”
“아니, 일어나 보세요! 뭔데, 진짜?”
거의 멱살잡이를 하는 수준으로 흔들었으나 현찬은 그대로 축 늘어져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경멸의 시선으로 현찬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음에 다시 멀쩡할 때 물어봐야겠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이규민]
[010-XXXX-XXXX]
수신 버튼을 누르자 규민이 뭐라 잔소리를 했다.
- 야, 너는 나한테 화장실에서 안나 온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놓고 아주 살림을 차렸냐? 그 자식이 그렇게 잘해 줘?
뭔 헛소리야.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바로 화장실을 나와 현찬이 미리 맡겨 둔 듯한 카드로 계산 중인 현찬네 매니저에게 현찬의 상태를 알렸다.
“화장실 제일 끝 쪽 칸에서 잠들어 버리셨어요. 바로 가서 데려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헉, 어디 갔나 했네. 감사합니다!”
나는 저쪽 매니저가 헐레벌떡 화장실로 뛰어가는 것을 뒤로하고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뭐 하느라 이제 와.”
전화를 통으로 무시당한 규민이 볼멘소리로 나를 맞았다.
“갑자기 전화도 끊겼다고 해서 걱정했어….”
그 옆에 지원도 딱 붙어서 말을 보태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화장실에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좀 빠진 다음에 가려다가 늦었네.”
적당한 핑계를 대고 숙소로 향하는 내내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노친네가 누구지? 그쪽 대표인가? 아니면 제삼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고 한 거지.
어쩌면 이 게스트 초대 자체가 우리를 엿 먹이기 위한 큰 그림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대체… 그런 큰 노력을 들여 가면서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가….’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이 죽어도 연예계에서 활동하게 두고 싶지 않은 놈들을 쳐내는 데에 드는 돈이라면 큰돈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찬이 우리에게 그 정도의 원한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접점도 없고.’
정말 단순히 이제 내리막길만 남은 선배의 질투인가?
우리는 정상에서 더 올라갈 신인이고 저쪽은 지는 해니까?
‘굳이…?’
생각이 복잡한 와중에도 승합차는 정직하게 움직여 곧 숙소에 도착했다.
“올라가시면 바로 쉬세요. 내일은 따로 일정 없으니 편히 보내시고 모레 다시 연락드릴게요!”
매니저의 공지에 다들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시간이 늦어서 입은 다들 얌전히 다문 채였지만.
“와, 드디어 휴일이다!”
급박한 데뷔 준비에 이어 콘서트까지 죽도록 고생한 기억밖에 없었다.
“우리 그럼 이제 데뷔 싱글은 활동 종료인 거지?”
다들 아무 데나 누울 수 있는 곳이면 퍼져서 드러누운 사이 혜성이 물었다.
“아마도요?”
하연의 대답에 내가 살을 붙여 주었다.
“네, 공식적으로는요.”
음방도 오늘 오전에 찍은 게 파이널 스테이지였고. 일정상 본방송 때 참여할 수가 없어서 관계자가 대신 수령해 준 트로피는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 받은 것까지 해서 총 4주간의 활동 끝에 받은 1위 트로피는 총 6개.
선배 여자 아이돌 그룹의 컴백 시즌과 겹쳐서 절반 정도는 2위에 그쳤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
‘데뷔 싱글부터 이 정도로 주목받는 것 자체가 드물고 감사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때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던 영인이 불쑥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럼 저희 데뷔 앨범 낼 때까지 쉬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꿈 깨라는 듯 대답했다.
“아니, 그거 말고도 할 일은 많지.”
바로 아이돌의 음악 외 요소를 담당하는 근본 중의 근본, 자체 제작 컨텐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컨 찍어야지. 저번에 매니저 형이 얘기했잖아.”
대충 체험형 기획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우선 데뷔 싱글 활동에 집중하느라 컨펌할 시간이 없었다.
“자컨이요? 아.”
“어, 맞아.”
영인과 규민이 서로 뭔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둘이 왜 저래? 뭐 짜고 친 거라도 있나? 의아했으나 당장은 캐물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얼른 정리하고 자자.”
하나둘 욕실과 방으로 떠밀어 모두 잘 준비를 끝냈을 때는 핸드폰 화면의 시침이 2에서 3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죽겠다.’
이제 진짜 자야지. 눈을 붙인 채 이불을 턱 끝까지 뒤집어쓰는데 불쑥 오늘 제현호가 뭔가 말한 적이 있었나?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무대 아래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존재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퍼뜩 놀라서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 침대에서 현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 쪽을 봤다.
“오늘 괜찮았어?”
이제 와서 묻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다급히 묻자 제현호가 어둠 속에서 되물었다.
“갑자기요?”
“갑자기 걱정이 돼서.”
그러자 어둠 속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어요. 신기한 기분이기도 했고요.”
예상외로 돌아온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어둠 속에서 귀가 쫑긋 섰다.
“어?”
“부럽더라고요. 저희도 언젠가 이만한 규모에서 콘서트 해 볼 수 있을까 싶고….”
그거라면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당연히 되지. 우리도 곧 할 거야.”
물론 ‘곧’이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절하긴 했다. 콘서트를 뭐,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가서 뭐 부를 노래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겟데뷔 메인곡에 각자 조별 무대로 소화했던 곡을 끌어온다고 해도 일단 데뷔 앨범 활동은 끝나고 생각해 볼 일이었다.
“정말요?”
불도 꺼지고 바깥으로 난 창문도 모두 암막 커튼으로 가린 채라 빛은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모이는 현호의 눈이 빛난 것 같았다.
“응, 그러니까 얼른 자. 체력 든든히 회복하고 푹 쉬어야 데뷔 앨범 준비도 잘하지.”
우선은 당장의 일정부터 잘 소화하는 게 중요했다.
현호가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색색 옅은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도 자자.’
가뜩이나 현찬의 주사로 머리가 복잡한데 더 이상의 생각은 독이었다. 머리가 맑아진 후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백번 이득이었다.
***
그리고 이틀 뒤, 다들 숙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게으른 휴일을 만끽하고 다시 회사로 집합한 우리는 예상했던 이야기와 전혀 예상 못했던 이야기를 동시에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당장 두 달 후에 콘서트를 하자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