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친절한…? 선배님 (2)
그리고 정확하게 모서리로 랜딩하며 콰득, 실시간으로 귀퉁이 부분의 이가 나갔다.
“…….”
“앗.”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황당하고 처참한 현장에 다들 묵념했다.
“아니….”
내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스태프가 우리를 한 번 더 큰 목소리로 호출했다.
“엔카운터 빨리 대기해 주실게요!”
핸드폰이 작살나서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그보다는 당연히 콘서트 일정이 더 중요했으므로 나는 핸드폰을 챙겨 온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지금 바로 나갈게요!”
애써 머리에서 지워 버리려 했으나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화면 전체에 금이 쩍 간 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인가.’
쩝, 싱거운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이제 무대가 코앞이었다.
‘정신 차리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콘서트가 한창이었고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무대 뒤편의 대기 존에 서니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현찬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대단하네, 혼자서 저 큰 무대를 저렇게 활용하고….’
내가 아무리 연예계 관계자나 연습생으로는 경력이 길어서 두드러지는 편이라고 해도, 무대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이상 내 기량으로 아직 저 정도 수준은 불가능했다.
‘정신이 확 드네.’
엔카운터로 데뷔한 이래로 쭉 신인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우느라 나도 모르게 우쭐해져 있던 어깨가 쑥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언젠가 저런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해야지. 의욕을 세운 채 기다리고 있으니 곧 현찬의 무대가 끝났다.
“저쪽으로 이동하셔서 리허설 때 표시해 둔 포지션대로 서 주시면 됩니다.”
“넵.”
“네!”
다들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조명이 꺼진 커튼 뒤를 이동하는데 제일 앞서 있던 현호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왜 그래?”
또 무대 아래에 누나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나? 여기서는 지금 커튼 쳐 놔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의아하게 여기고 있으려니 규민이 곧장 물었다.
“왜 안 가?”
그러자 현호가 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으로 답했다.
“바닥에 표시가 안 보여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재빨리 앞쪽으로 가서 현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정말로 바닥에 미리 해 둔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스태프가 표시 남겨 뒀으니까 그쪽으로 이동하라고 했는데….”
리허설 때 확인한 바닥 표시용 테이프는 가운데에 형광으로 줄이 들어가 있는 테이프였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너무 오래전에 사 둔 거라 형광 물질이 더는 기능을 못 하게 됐나?’
유심히 바닥을 노려보니 흐릿하게 무언가 두껍게 덧붙여진 자국이 보였다.
“아.”
뭐지? 눈을 의심한 그때 인이어로 스태프의 지시가 들렸다.
- 빨리 지정 위치에서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아니, 우리라고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바, 바닥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제일 먼저 멘탈이 무너진 건 지원이었다. 가뜩이나 팀에 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무대 위까지 올라와서 막이 올라가기 코앞인 상황에 갑자기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니 아슬아슬했던 둑이 툭, 하고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까는, 안, 그랬는데….”
조명 하나 없는 곳에서조차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 10초 후에 커튼 올라갑니다. 스탠바이-
지금 우리가 안 보이나? 위치도 못 잡았는데 갑자기 시작된 카운트다운에 다들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나는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외쳤다.
“일단 연습한 대형대로 서고, 커튼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전주 박자마다 한 걸음씩 옆으로 이동해. 문제 될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곤 제일 문제로 보이는 지원을 등 떠밀듯 제자리로 옮겼다.
“문제 될 거 아무것도 없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너는 연습한 대로만 해. 알았지? 너 나 믿어, 못 믿어?”
냅다 어깨를 잡고 묻자 지원이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미, 믿어!”
“그래, 그럼 내 지시에 안 따르는 건 뭐겠어? 믿는다고 해 놓고 거짓말이었다는 거겠지? 내가 시킨 대로 잘할 수 있어?”
친히 눈높이 교육을 시전하자 지원이 다시금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잘할게! 거짓말 아니야!”
“그래, 그럼 말 말고 행동으로 증명해. 할 수 있어?”
“응!”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만 년 같았던 긴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커튼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 화제의 겟 데뷔 위드 미에서 블랙온의 지난 타이틀곡을 멋지게 소화해 주었던 ‘엔카운터’를 모셨습니다!]
[제가 정말 어렵게 부탁드렸어요~. 멋진 무대 함께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잠시만, 또 다른 모습으로 여러분들과 만나 뵐 준비를 하고 올게요!]
현찬의 멘트가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무대의 오른쪽에 한참 치우쳐진 곳에 덜렁 서 있었다.
순간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 모두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곧 익숙한 간주가 흘러나왔다.
[♪~♬-]
커튼이 올라가기 전 미리 합의해 둔 대로 박자에 맞춰 한 걸음씩 이동하자 꼭 미리 기획해 둔 연출처럼 보였다.
‘됐다.’
마침내 이제 조명 아래에서는 잘 보이는 테이프 자국을 위에 멈춰 선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신호를 보냈다.
[Three, two, one, action. 빛나는 flash. 눈 감아, 벌써.]
이제는 익숙해진 가사가 매끄럽게 잇새로 빠져나왔다. 평소 음방에서는 주로 핸드 마이크 대신 헤드셋으로 착용하기 때문에 성량을 조절하는 느낌이 조금 어색했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고.’
헤드셋보다 훨씬 ‘노래한다’는 감각이 뚜렷해서 좋았다.
[빨라지는 pitch, 속도를 높여. 더 higher emotion-]
난이도 있는 안무에 맞춰 흔들림 없이 라이브를 하는 것에 집중했더니 무대 아래가 눈에 들어온 건 1절이 절반 정도 지나고 나서였다.
‘사람, 진짜 많긴 하다.’
조금 전 역시 이 큰 체육관을 솔로 혼자 채우려면 좌석 수를 좀 줄이는 수밖에 없나,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게 우스워졌다.
지금의 엔카운터는 이만한 경기장을 팬들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겟데뷔로 흥행시킨 인기가 매일매일 최고점에 이르는 시기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인수 개인이라면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했다.
‘언젠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러 와 주신 거면 좋겠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욕이 불쑥 치솟았다.
[Broon’ Broon’ Broon’ Turn on the radio.]
[Listen up. 태워 봐, 더 뜨겁게.]
훅이 익숙할 후렴부가 시작되자 감사하게도 객석에서 응원법을 외쳐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조금 경직되었던 다른 멤버들도 곡이 끝나 갈 즈음에는 긴장이 풀려서 표정 연기도 챙기고 한결 편안해 보였다.
“지금까지 유어 뉴 유니버스! 엔카운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빨리 첫 곡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스태프들이 모두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은 개뿔. 그건 우리가 침착하게 대응을 잘해서 잘된 거고.
나는 곧장 경위부터 확인했다.
“저희 리허설 때는 분명 바닥에 야광 테이프로 표시해 둔 걸로 확인했는데요, 왜 다시 일반 전기 테이프로 덮어 두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최대한 화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웃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 연출 감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마지막으로 확인한 담당이 누구였지? 아무도 안 건드린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
아무도 안 건드렸으면 그게 왜 그 꼴이 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잘 대응했으니 망정이지 행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다 그대로 커튼이 올라갔으면 대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자기 자리도 못 찾아가고 우왕좌왕하는 신인, 남의 콘서트 게스트로 가서 망쳐 놓은 민폐돌, 뭐 그런 타이틀로 엄청나게 까였겠지.’
우리가 잘해서 무사히 넘어간 것은 둘째 치고, 원인을 꼭 파악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꼭 확인 부탁드릴게요. 저희도 원인을 알아 두면 나중에 비슷한 이슈가 생겼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뒤에 생략된 마음의 소리는 ‘우릴 일부러 엿 처먹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면.’이었다.
스태프들이 서로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책임을 떠미는 사이 어느새 의상을 갈아입고 온 현찬이 대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했어요. 아까 뭐 문제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았어요?”
괜찮았죠, 우리가 잘해서.
그러나 우리에게 소중한 기회를 준 대선배님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네, 바닥에 위치 표시가 리허설 때는 잘 보였는데 무대 위로 올라가니까 누가 덧칠을 해 놨더라고요. 혹시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여쭤보던 중이었어요.”
그러자 현찬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싱겁게 대답했다.
“아아, 가끔 그럴 때 있어요. 일하는 스태프가 한둘이 아니고 외부에서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파트타임 분들도 많다 보니까 서로 혼선 생기는 일도 흔하거든요. 아마 표시 관련해서 안내를 못 받은 분이 지우려고 하신 게 아닐까요?”
여기서 가장 입김 파워가 센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지금 여기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대기 중인 분들만 120명이에요. 밖에서 인원 통제하신 분들은 제외하고도요. 누가 착각하신 건지 못 찾아요.”
현찬이 웃는 얼굴로 딱 잘라 상황을 정리한 다음 곧바로 무대 위로 이어지는 출구를 가리켰다.
“너무 고생했고, 한 곡 더 남았으니까 먼저 대기하고 있을게요. 메이크업 수정되면 바로 올라와요.”
그러고는 쏙 나가 버리는 바람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이쪽으로 오셔서 준비하실까요?”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메이크업 스태프가 마음이 급해 보였다.
기분이 찜찜한 건 찜찜한 거고,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나는 얌전히 스태프 손에 얼굴을 맡겼다.
‘분명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가 않은 거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누군가 꾸욱,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
누군가 싶어 그쪽을 보니 지원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다음 무대도 잘할 수 있어!”
나름대로 나를 격려해 주려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해야지.”
막내가 귀엽게 구는데 형이 계속 이미 지나간 일에 붙들려 있을 수 있나.
말마따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멤버들을 둘러보자 무대 위에서만큼은 꽤 듬직한 녀석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규민이 냅다 외쳤다.
“드림 유어 유니버스!”
“엔카운터!”
우리가 이 단발성 무대에도 얼마나 진심으로 준비했는지 보여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