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불러 주는 곳은 많은데 (2)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진지해지면 나도 회귀 사실이라도 털어놔야 할 것 같잖아.’
사실은 비안이 공민형의 친척이라거나, 혹은 트레이닝을 봐줬다거나, 아니면 회사에서 소개해 줬다 그런 걸 예상했는데.
갑자기 남의 너무 딥 다크한 가정사를 알게 되어 버려서 당혹스러웠다.
‘그런 사정까지는 굳이 말 안 해 줘도 된다고…!’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나름 내가 친밀하다고 느끼고 있는 멤버들에게 들어도 곤란하고 부담스러웠다.
아니면 혹시 뭐… 저도 내 가정사로 비비 꼬고 오해했던 게 미안해서 자기 비밀도 알려 주는 건가.
여전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시원찮은 대답이라서 실망스러울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 네가 믿게 해 줄 수는 있어.”
공민형의 눈이 배신감으로 번뜩인 순간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속 매니지먼트 계약 3조 정산의 14항, 아티스트와 회사는 계약 기간 동안 발생한 비용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지며 총 발생한 비용에서 각각 공동의 비율로 부담한다. 이때 발생한 수익보다 비용이 더 큰 경우 별도로 약정한 비율을 적용한다.”
계약서 내용을 다는 기억 못 하겠고, 우선 특이하고 뭐 같아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것부터 읊자 놈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8조 품위 유지 관련 6항이었나. 매니저한테 집 비밀번호 공유해 줘야 한다는 사항 있지 않아? 그거 진짜 XX 같다고 생각했는데.”
소속 아티스트가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는, 계약서상의 내용을 말해 주자 공민형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너한테도 합류 제의가 갔었어?”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오해였다. 회귀하기 전에 거기랑 계약했다가 그대로 인생이 나락 익스프레스행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비슷해.”
“그럼 넌 대표 이슈 때문에 제안받고도 안 갔다는 뜻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고.”
그러자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하는 충격에 빠진 눈이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로 바뀌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너보다 프리점프의 내부 사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거야.”
다시금 오랜 정적이 이어졌다. 믿기 힘들다면 댈 수 있는 증거는 차고 넘쳤다.
“그쪽에서 1년 안으로 데뷔 가능하다고 하지? 데뷔조는, 잠깐만… 하진우, 윤한솔, 정우정, 전창영, 허강완이고.”
한때 익숙했던 이름들을 부르자 민형의 눈이 더욱 눈에 띄게 동요하는 티를 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서부터는 미리 생각해 둔 거짓말이었다.
“신변 보호를 위해서 너한테 누구라고는 말해 줄 수 없어. 내가 아는 아주 가까운 사람 중에 지금 네가 들어갈 자리를 제안받은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은 운 좋게 빠져나갔는데, 보니까 이제는 네가 거기에 발을 담그려고 하고 있더라?”
공민형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긴 이야기를 단출하게 정리했다.
“그 사람이 네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계약서에 도장 찍었다가 시간 날리는 건 보기 찝찝하대. 다른 녀석들은 이미 계약으로 묶여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너는 아니잖아.”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인데, 증거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라서. 대표가 구속되기 전에 데뷔해서 한탕 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프리점프 선배 그룹부터 곧 해체될 거야. 사회면에 골고루 실릴 예정이니까 대체 이유가 뭐길래 그렇게 될까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 보고. 향후 몇 년간은 프리점프에서 보이 그룹 런칭 꿈도 못 꿀 정도일 테니까.”
“하.”
공민형이 기가 찬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나한테 말해 주는 이유가 정말 내가 불쌍해서라고?”
“나는 너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있고, 마침 너한테 전해 달라는 얘기도 있으니까. 서로 필요한 걸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 하는 대화에 나는 쐐기를 박았다.
“못 믿겠으면, 두 달 후에 뉴하우스 해체 하나 안 하나 보고 판단하든가. 혹시라도 해체 안 했으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녹음기 그대로 들고 가서 프리점프 대표 손에 쥐여 주면 되겠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더욱 단단하게 못을 박았다.
“과연 두 달 뒤에 기사가 뭐라고 날까? 서인수가 허위 사실 유포하고 다녔다고 날지, 뉴하우스가 해체됐다고 날지.”
어디 한번 두고 보라는 듯 당당하게 말을 마쳤다.
이쪽에서도 최후의 진을 치자 공민형이 심란한 얼굴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내 얘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말 안 해 줄 거야?”
내가 시간 없다는 듯 흘끔 열심히 녹음되고 있는 화면 위의 시계를 보자 공민형이 이를 갈았다.
“어쨌든 나는 할 얘기를 했어. 이제 다시 네 차례야.”
민형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잠시가 꼭 몇 시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
“휴….”
공민형과 헤어진 후, 무사히 숙소로 돌아와 밤 스케줄에 합류한 나는 정신없이 일정을 마치고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잘… 주고받은 거, 맞… 지?’
확신은 없었으나 손에 남은 것은 있었다.
[서브 리퀘스트 미션 클리어!]
[공민형 연습생 구하기]
[보상 수령]
[▷코인 1개]
[▷지표 1단계 선택 보정 2회]
[▷S등급 아이템 확정 뽑기권]
그리고 예상했던 확정 보상 외에 추가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스페셜 미션 전용 가이드 툴]
‘뭐지, 이건?’
의아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리자 추가된 기능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스페셜 미션을 좀 더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UI입니다.]
[자금 바로 적용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어쨌든 맨땅에 헤딩으로 들이받는 것보다는 낫지 싶어서 적용 버튼을 누르자 시스템창 옆에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현재 진행 강도]
[■■□□□□□□□□] (20%)
[수집된 단서]
[- 박 대표와 골든링 미디어]
[- 프리점프]
[- 공민형]
[- 밀키즈]
[- 수상한 스태프]
[- 자가 복제형 악플]
[- 임희록]
[- ???]
[- ???]
[- ???]
[- ???]
꼭 추리 게임 인터페이스를 보는 것 같은 화면에 설명 스크롤을 내리자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든 단서를 수집할 경우 1단계 추론을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직 진실 접근까지 1단계도 채 통과 못 했다는 뜻이었다.
‘아니, 나름 노력했다고요…. 이거 캐내다가 아이돌 활동 엉망으로 하면 개연성, 사이다, 어그로 셋 다 진창에 박힐 거면서.’
억울했지만 내가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퀘스트 보상을 이용해 최근에 보통으로 떨어진 어그로와 사이다 지수를 한 단계씩 끌어 올렸다.
[어그로 지수가 (높음) 상태로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사이다 지수가 (높음) 상태로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개연성 지수가 (높음)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트리플 높음을 확인하고 나서 S급 확정 뽑기권을 사용했다.
‘이러고 또 어디다 써먹기도 힘든데 좋기만 한 아이템 나오는 거 아니겠지?’
이미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전적이 있어 긴장한 채 결과를 확인하자….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그동안의 헛짓거리가 보상받는 것 같은 아이템이 나왔다.
[1등은 나의 것]
[등급] S
[지정한 항목에서의 순위를 1위로 조정합니다.(일회성 소모 아이템, 숫자로 평가되는 항목에서만 사용 가능)]
그 말인즉슨, 대상이나 최우수상 같은 제목이 붙은 상은 안 되고.
차트나 음방 같은 1위, 2위, 3위 이렇게 숫자로 정해지는 순위에서만 가능한 것 같았다.
‘설명이 좀 모호해서 실제로 적용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만.’
어쨌든 단순 차트 1위라도 대단한 일은 대단한 일.
이번엔 제대로 된 걸 뽑았다는 생각에 안심하며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나니 피곤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공민형 때문에 오늘 진땀을 몇 번씩 흘린 거냐.’
놈은 내가 던진 패를 다행히 잘 주워 담았다. 여전히 미심쩍어 보이는 눈빛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내게 어떻게 내 비밀을 알게 된 것인지 알려 주었다.
‘솔직히 알고 나니까 허무한데.’
겟데뷔 초반부터 나를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었던 멘토, 마선경이 공민형의 보컬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원래 유 대표나 비안과 같이 밀키즈로 데뷔하려 했으나 당시 개인 사정이 있어 데뷔조에서 하차한 사이라고.
‘어쩐지 나를 유달리 의식하는 거 같긴 하더라.’
유 대표를 통해 내 출생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내가 신경 쓰였을 만도 했다.
왜 그렇게 자꾸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친구 아들이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유 대표와 마선경이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4대 소속사 불러와서 미션 했을 때 보면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던데.
혹시 너도 마선경도 유 대표에게 사주받아 그렇게 어그로를 끌어 댔던 거냐고 묻자 공민형은 그건 대답하지 않았다.
‘저 좋을 때만 노코멘트하네.’
어쨌든 궁금했던 의문은 풀렸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려다 말고 멈춰 서자 공민형이 ‘빨리 꺼져.’라고 얼굴에 써 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앞으로도 계속 나 방해할 거냐? 그러라고 지시받은 거야?’
그러자 놈이 미간을 좁히더니 심플하게 답했다.
‘이젠 필요 없어.’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복도로 내쫓겼다.
나는 뻔히 방음 안 되는 걸 알면서 복도에서 소란을 피울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얌전히 돌아 나오는데 지상 1층까지 내려오는 길이 까마득하게 길었다.
‘쯧, 신경 쓰이게.’
엔카운터 숙소도 좋은 환경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으나 오늘 보고 온 민형의 자취방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럼 앞으로… 아까 그 UI의 단서들이나 찾으면서 키워드가 다 모이길 기다려야 하는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갑자기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화들짝 놀라 방문 쪽을 바라보자 영인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형, 뭐 해요. 저희 매니저 형이 전달할 거 있어서 잠깐 거실로 모여 달래요!”
부름에 방문을 열고 나가자 영인이 찡긋,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못 들어요? 저 어디 가서 목청 작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는데.”
뭐긴…. 이 조별 과제 활동을 무사히 마무리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었지.
나는 시건방진 대답을 하는 대신 매니저를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먹금 당한 영인이 뭐라 쫑알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특별히 귀담아듣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