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뱀의 머리라는 함정 (3)
‘팬…? 이라기엔 좀 이상해 보이지?’
메이킹 촬영은 따로 담당자가 하고 있는데.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촬영장 스태프 전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혹시 개인 촬영이시면, 이따 끝나고 관계자 포토 타임 때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 소장용이든 아니면 어디 올릴 목적으로 찍은 거든 별로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자 [외부인 출입] 명찰을 걸고 있던 스태프가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아래로 내렸다.
“헉, 아, 네네…!”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보란 듯이 사고가 벌어졌다.
“앗, 뭐야…?”
“……?”
다들 어리둥절한 채로 뒤를 돌아보자 세트용 배경 앞에 서 있던 은찬이 쫄딱 젖은 채로 뚝뚝 흐르는 무언가를 훔쳐 낸 손등을 확인하고 있었다.
바닥을 보니 흥건히 고인 물 색이 탁한 게 뭐든 얼굴부터 뒤집어썼을 때 기분 좋을 리 없어 보였다.
“형! 괜찮으세요?”
“…….”
곧바로 세트장 뒤에서 나온 건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됐을까 싶은 알바생이었다.
손에는 물걸레 청소를 하고 남은 물을 짜내 모아 둔 것 같았던 플라스틱 버킷을 들고 있었다.
“엇, 죄송해요. 손이 갑자기 미끄러져서 놓쳤어요. 많이 젖으셨어요?”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수습하려 하고 있으나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뭐지…?’
은찬에게 사과하는 스태프에게서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알바라 그런가? 보통 이 정도면 사색이 돼서 어쩔 줄 몰라 할 텐데.’
의상에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한순간에 망쳐진 것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혹시나 생길지 모를 불이익에 긴장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약간… 여유로운 것 같은….’
심지어 표정에서는 은근한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싸한 느낌에 서둘러 은찬과 아르바이트생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이한 은찬이 행여 험한 말이라도 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진심이 느껴지기는커녕 성의 없는 사과에 충분히 발끈할 여지가 있었다.
“…….”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어느 정도로 화가 난 건지 예상이라도 할 텐데, 말수조차 없이 입을 꾹 다물어서는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공포감에 재빨리 은찬을 마주 보고 섰다.
“아까 의상 여유분 있었으니까 빨리 옷부터 갈아입고요. 메이크업은 다행히 엄청 지워진 건 아니라 번진 부분만 우선 정리하고 리터칭하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은찬이 사고를 치기 전에 먼저 자연스럽게 얼굴에 묻은 걸 닦아 주는 척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저희 일정 여유 없는데 조금만 신경 써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다들 고생하게 됐네요. 주의 부탁드리겠습니다.”
곧바로 달려온 촬영 팀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만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선 저쪽으로 가셔서 탈의하시고….”
정작 사고를 친 당사자는 뭐 하고 있느냐며 촬영 팀 관계자에게 비키라고 혼이 나고도 태연해 보였다.
‘이게 대체….’
당황스럽기도 잠시, 겨우 의상을 갈아입고 온 은찬이 벙찐 모두를 정신 차리게 했다.
“난 괜찮아. 빨리 진행하자. 시간 더 지체되면 다 같이 곤란해져.”
“형… 진짜 괜찮은 거 맞….”
하연이 은찬에게 뭐라 말을 하려 하던 그때, 규민이 부러 방긋방긋 웃는 표정으로 하연을 막아섰다.
“이제 더 조심해 주시겠지! 은찬 형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우리는 얼른 우리 할 일에 집중하자!”
규민이 그대로 은찬과 하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형이 방수가 돼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혹시 물맞은 게 카메라였으면 완전 대사건이었을 텐데, 카메라가 저희 몸값보다 비싸지 않아요? 하, 내가 맞았어야 하는데. 저 오늘 다크서클 내려와서 베이스 두껍게 올려 달라고 했거든요.”
규민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관계자의 표정도 아주 약간 풀어졌다.
“아니에요, 저희가 백번 잘못한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따 매니저님 통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희가 뭔가… 작은 보상이라도 준비를 해 보겠습니다.”
은찬은 여전히 평소대로 뚱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관계자가 연신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하기까지 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정작 사고 친 당사자는 조금 전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썩 마음에 안 들기는 하는데.’
속 시원하자고 여기서 아까 실수한 걔 데려와서 당장 제대로 사과하게 하라고 윽박지르느니… 저쪽에서 빚진 인상이 들게 하는 게 백번 나았다.
‘여차하면 이제 막 데뷔한 놈들이 잘나간다고 갑질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관계자가 한 번 더 은찬에게 사과하는 사이 나머지 멤버들도 한 명 한 명 다시 제 자리에 섰다.
“네네. 그러면 아까 이어서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스탠바이~!”
겨우 현장이 수습되어 촬영이 끝난 건 그로부터 4시간쯤 후의 일이었다.
“와, 진짜 진땀 뺐다.”
잠깐 이동용 차량으로 돌아와 매니저가 주차 정산을 하러 간 사이 하연이 곧장 따져 물었다.
“아까요, 저희가 화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그냥 넘어가게 하신 거예요?”
누가 정은찬 신도 1호 아니랄까 봐, 카메라와 녹음 장치를 벗어나자마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묻는 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무슨 보호자 지키는 강아지도 아니고.
현호나 지원도 내심 궁금했는지 슬쩍 나와 규민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어린애들은 딱 어린 티가 난다니까.’
혜성이 어떻게 말해 줘야 할까 타이밍을 보며 망설이는 사이 규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서 우리가 화내면, 뭐가 달라졌을까?”
“달라지다뇨?”
하연이 이해가 잘 안된 표정으로 규민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통을 넘겨받았다.
“우리가 화내면, 망가진 메이크업이, 못 입게 된 의상이 다시 돌아와? 머리가 막 저절로 말라?”
내가 일부러 단호하게 말하자 하연이 충격받은 얼굴로 반박했다. 꼭 어떻게 형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라고 정자로 써놓은 것 같았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니지. 그래서 그냥 넘어간 거야. 결국 사람 대 사람으로 기분 문제잖아. 그 사고 친 스태프가 진심으로 사과할 사람이었으면 뒤에 세트장에서 나올 때부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을걸.”
뒤에서 나올 때부터 표정이 이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촬영을 망쳤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서 표정이 굳는 게 당연할 텐데.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지.’
당혹감이나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관계자분 달려오시는 거 봤어? 보통은 그래. 그쪽도 비즈니스고 중간에 차질 생기면 안 되니까 마음이 급하고 초조하고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야. 근데 정작 사고 친 사람은 태연하니까….”
그리고 내가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규민이 끼어들었다.
“아, 이거 아차 하면 우리 멕이려는 거겠구나 싶었지.”
졸지에 차례를 빼앗긴 꼴이 되었으나 나는 지적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거기에 모두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건 직전 내가 지적했던 스태프의 핸드폰 카메라도 정통으로 은찬을 향하고 있었다.
하연이 이해는 했지만 납득은 안 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왜요…? 누가요?”
“모르지. 우리가 지금 제일 주목받고 있는데 망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냐.”
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무리 지었으나 나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설마 이것도 박 대표가 사주한 건가?’
의심하자면 끝도 없었다. 오늘은 다행히 미수로 그쳤지만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그러니까 우리 활동하는 동안에는 더럽고 치사해도, 업무적으로 손해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기분 문제면 호구 되고 마는 게 속 편해. 괜히 따지고 세게 나갔다가 갑질 이미지 붙는 것보다. 너 은찬 형한테 데뷔하자마자 갑질남 이미지 붙었으면 좋겠어?”
하연도 더는 항의하지 못했다. 나는 침통해진 분위기를 좀 바꿔 보고자 은찬을 다시 칭찬 감옥에 가뒀다.
“형이 제일 불쾌하셨을 텐데 잘 넘어가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진짜 형 덕분에 살았어요.”
그러고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은찬을 바라보자 은찬이 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거기서 일 키워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그럴 것 같긴 했다. 은찬도 따지고 보면 참 실용적인 성격이라, 본인이 몰아붙여서 개선될 여지가 있는 녹음실이나 무대에서는 스스럼없이 악역이 되곤 했지만.
화를 내 봤자 달라질 게 없으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먹금 하는 성격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부드러워지면 좋을 텐데.’
어쨌든 자기 기분 나쁜 거보다 팀 활동을 우선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웃으며 좋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머리로 그게 낫다는 걸 아는 거랑, 실제로 참고 넘어가는 거랑은 다른 거니까요. 형이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그렇게 말해 봤자 나오는 거 없어.”
은찬이 괜히 부끄러워하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본인 딴에는 나름 쎄 보이려고 하는 거 같긴 한데 그 의중을 알고 나니 그것도 귀엽게만 보였다.
“네네, 잠깐 시간 될 거 같으니까 숙소 들려서 아예 샤워하고 가실래요? 저도 숙소 들르면 챙겨 올 거 있거든요.”
사실 챙길 것 따위는 없었지만 그냥 본인만 챙겨 주려고 가는 거라고 하면 안 갈 것 같아서 한 소리였다.
“그러든가.”
은찬이 관심 없는 척 대답을 꺼내고 나서야 나는 작전이 잘 먹혀들었다는 생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곧 관계자와 오랜 대화를 끝낸 매니저가 승합차 쪽으로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오래 기다리셨죠? 촬영 팀 팀장님이 너무 죄송하시다고 계속 붙들고 사과를 하셔서 늦어졌어요. 은찬 씨한테도 너무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시네요.”
그러곤 우리가 조금 전 하고 있던 얘기와 같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다들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간이 비어서 잠깐 숙소 들렀다 갈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저도 숙소에 가져다드릴 게 있어서 들러야 하는데 은찬 씨 빨리 씻으실 수 있으면 샤워하셔도 될 것 같아요.”
“…흡, 크흡.”
“어? 네? 왜 웃으세요 여러분?”
어리둥절해하는 매니저의 반응은 덤이었다.
***
그리고 모든 스케줄이 끝난 저녁, 매니저에게 따로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확인한 나는 쯧, 속으로 혀를 차며 한숨을 삼켰다.
‘예상 못 한 건 아닌데….’
매니저가 후에 남아서 관계자에게 사과를 받으며 물어봤더니 예의 젊은 스태프 모두 단기로 고용한 알바생들이었다고.
원래 한 명에서 세 명 정도는 꾸준히 알바생을 써 왔는데 지금까지 문제 된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쪽도 업력이 없는 업체는 아니라서 이렇게 젊은 친구들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을 받을 만한 공고를 할 때는 조심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쪽에서 보내 준 공고 이미지를 보니 연예인과 함께하는 작업을 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공고였다.
그러니 악성 팬들이 일부러 아이돌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려고 공고에 지원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그쪽으로서도 지뢰 밟은 거지. 현장 허드렛일 보조하는 역할로 뽑은 알바생이 사고를 친 거니까. 손배를 청구하기에는 어차피 빨아야 했을 옷 세탁하는 거 말고는 청구할 게 없으니.’
차라리 세트장이 망가졌으면 소품비로 청구라도 하면 되는데 사람이 물을 뒤집어쓴 건, 당사자가 괜찮다고 넘어가 버리면 어떻게 비용을 물어내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럼 정말 우연이라는 건가.’
우연히 태도 나쁜 알바생이 들어왔고, 정말 또 우연찮게 다른 알바생이 그걸 잔뜩 긴장한 채로 찍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라….
‘우연이 여러 번 겹쳤는데 우연일 수가 있나.’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