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뱀의 머리라는 함정 (2)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내게 골든링 관련해서 이야기해 준 지인들도 계속 혹시라도 자기한테 불이익이 갈까 봐 걱정했으니까.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이야기해 준 건, 8년간의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쌓아 온 신뢰 덕이었고.
‘그 정도로 신뢰감 있는 이미지일 줄은 몰랐는데….’
좀 쑥스러운 기분이 된 건 둘째 치고, 공민형은 나를 믿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설득을 할지부터 난관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줘야 하는데….’
기간이 좀 몇 달로 넉넉하면 선배 그룹이 곧 터질 걸 알려 주고 믿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는 시간이 또 안 되니까.
그렇다고 난 사실 미래에서 왔어! 그래서 프리점프와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지! 하고 고백한다?
‘돌았나….’
당장 미친놈 취급당하며 차단당할 것이 뻔했다. ‘도를 믿으세요?’도 아니고 ‘저를 믿으세요?’냐고.
“으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고 있으려니 거실이 소란스러웠다.
뭐지? 저녁은 아까 다들 챙겨 먹은 거 같았는데. 설마 또 야식?
식겁해서 벌컥 문을 열고 나서니 매니저가 거실 한가운데에서 멤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
내가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눈썹을 움찔거리자 영인이 세상 신난 얼굴로 외쳤다.
“형, 저희 진짜 대박 사건이에요!”
저놈이 대박 사건이라고 하는 건 솔직히 신뢰가 잘 안 가는데.
개중에서 제일 믿을 만한 맏형을 바라보자 혜성이 활짝 웃었다.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 잘됐어!”
뭐지? 분위기만 보면 무슨 벌써부터 신인상 확정 연락이라도 받은 것 같은 느낌인데.
의아함을 지우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자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있던 매니저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맞아. 인수 씨가 제일 기분 좋으시겠다.”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제가 제일 좋아할 거라고요?”
그러자 매니저가 드디어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블랙온 소속사에서 연락 왔거든요. 이번에 현찬 씨 콘서트 하는데 혹시 게스트로 서 줄 수 있냐고요.”
“네?”
콘서트요? 여기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꼬리를 올렸다.
“저희 싱글 무대 한 번 하고, 그다음에 현찬 씨랑 같이 콜라보로 한 번 더 해서 두 곡 요청해 주셨는데 기간 생각하면 저희 홍보도 되고 좋을 것 같아요.”
근데 그걸 내가 제일 좋아할 것 같았다고? 약간 어리둥절해져서 매니저를 보다가 3차 미션 때 기획을 주도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아.”
그렇다고 블랙온의 엄청난 팬이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때 내 싱글로는 절대 발매 못 할 스타일 마음껏 해서 기분이 좋긴 했었다.
원곡자의 콜라보 요청에 기분이 좋냐, 나쁘냐를 따지자면….
‘그건 당연히 좋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일정이 언제인데요?”
콘서트 일정이 2~3일 내외면 전 회차 참석하는 게 맞을 거고.
일주일을 넘게 소모하는 전국 투어면 아마 제일 큰 공연에서만 이벤트성 출연을 요청하는 것일 터였다.
“3주 후 주말에 3일간이요. 시간이 좀 빡빡하긴 한데…. 음방 사전 녹화가 오전 내로 끝나면 시간은 안 겹치거든요. 여러분들만 일정 무리 없으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매니저가 초롱초롱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그렇게 봐도… 나 혼자서 독선적으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나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멤버들 생각은?”
영인이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완전 좋아요!”
“나도 괜찮은 거 같은데.”
“할 수 있으면 당연히 해야지.”
“저도 괜찮아요.”
제현호는 말이 없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 해야지.”
이 김에 대선배님과 연을 트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네, 그러면 이따 복귀해서 바로 긍정 회신 보낼게요.”
아마 애초에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 같다만.
속이 훤히 보이는데도 부족한 인프라 대신 매니저 본인도 셀프로 갈려 나가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거 전해 주러 오신 거예요?”
지금 시간이 벌써 9시가 넘었는데 일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뒤늦은 지적에 매니저가 하하, 먼 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웃었다.
“저희는 여건이 여유롭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죠.”
분명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분위기에 다들 침통해졌다.
“그래도 일 없어서 노는 것보다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게 백번 나으니까요! 열심히 노력해 주고 계신 만큼 저도 힘낼게요. 내일 일정도 파이팅입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단체 스케줄의 시작이었다. 오전에 은행 CF 촬영, 오후가 라디오였나.
그나마 아직 축제 시즌이 아니라서 서울에서만 돌아다녀도 되는 게 다행이었다.
“네, 그러면 얼른 들어가 보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회사도 들르셔야 하는 거면 언제 집에 가요.”
혜성과 내가 매니저를 거의 등 떠밀다시피 해서 보내자 내일 이른 시간부터 시작될 일정에 대비해 눈을 붙여야 할 시간이었다.
‘최근에 과로했으니까 얼른 자자….’
까지 생각했던 나는 시스템창 한구석에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카운트다운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이놈을 진짜 어떡하지.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붙들고 있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메신저 앱을 켰다.
스케줄부터 확인해 보자. 언제가 시간이 되지?
나도 고소가 무서운 입장인 만큼 통화나 메신저처럼 증거가 남을 수 있는 방식으로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물론 그쪽이 작정하고 몰래 녹취를 하면 어떻게든 녹음되긴 하겠지만.’
걔가 거기까지 생각할 것 같진 않고.
우선은 내 일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는 척 불러내 볼까.
내일은 도저히 시간이 안 되지만 이틀 후는 오후에 잠깐 나갔다 오는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나] 저번에 네가 말했던 거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만나. 수요일 오후에 시간 돼? 오후 9:38
공민형의 연락처는 4차 미션을 같이하면서 원치 않게 교환했었다. 다행히 번호는 안 바꿨네.
괜히 이래저래 떠보면 그대로 무시할 듯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는데….
‘씹네…?’
30분을 넘게 기다려도 답장은커녕 읽음 확인 표시도 뜨지 않았다.
예상은 했다. 나 같아도 대충 미리 보기로 읽고 답장하기 싫겠다.
물론 지금 뭔가 일하고 있는 게 있어서 못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없었다. 빨리 확답을 받아야 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는 결국 공민형을 불러낼 치트키를 썼다.
[나] 너 프리점프랑 계약할 거라며? 오후 10:26
[나] 그거 관련해서 해 줄 말도 있으니까 시간 좀 내 줘 오후 10:26
[나] 너한테도 나쁠 거 없는 얘기야 오후 10:27
그러자 잠시 후 귀신같이 읽음 확인 표시가 생겼다.
[팀 YS 공민형]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후 10:29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몰랐어야 할 내용을 알고 있어서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나] 내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도 말해 줄 테니까 오후 10:30
[나] 일단 만나자 오후 10:31
[나] 만나서 얘기해 오후 10:31
그러자 잠시 후 민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팀YS 공민형] 오후 4시 ○○역 카페 블랑 오후 10:33
[팀YS 공민형] 날짜는 네가 멋대로 불렀으니까. 오후 10:33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는 답장을 보냈다.
[나] 그래 그때 보자 오후 10:34
우리가 사이좋게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니까.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었다.
곧 거실에 있다 들어온 현호가 부스럭부스럭 침대에 드러눕는 소리가 들렸다.
‘어렵다, 정말. 진짜 가장도 아니고.’
심지어 얘는 남의 집 애잖아.
하지만 넓게 보면, 서브 에피소드 미션을 차근차근 수행해서 아이템을 얻고 지표를 안정시키는 게 팀 생활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표가 떨어져서 불이익이 발생할 경우 리스크는 나 혼자만 지는 게 아니니까.’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자 그동안 미뤄 왔던 잠이 쏟아졌다.
***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아침부터 바쁘게 도착한 현장은 우리에게 꽤나 우호적이었다.
[♡축 데뷔♡]
[♡최강 신인 엔카운터♡]
[♡환영합니다♡]
현장 직원들 중에 우리 팬들도 있는지 케이크에 꽃다발에 황송할 정도였다.
“헉, 어떻게 이렇게 귀한 곳에 누추한 저희들이 왔는데 이런 융숭한 대접을…!”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사이 규민이 재빨리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가뜩이나 메이킹 필름까지 찍고 있어서 신경 써야 하는데, 규민이 장난스럽게 포문을 열어 준 덕분에 편안한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
“헉, 누추하다뇨! 아니에요! 저희가 더 누추해요!”
마케팅 팀 막내 직원으로 보이는 직원이 허둥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규민이 한술 더 떠서 절할 기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막내 직원이 그보다 더 낮게 허리를 숙였고 규민이 기어이 절을 올리면서 현장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러면 바로 의상 준비하시고 세트 앞에서 대기하실게요~”
신기한 건물 형태로 된 세트장은 특수 효과와 함께 연출할 예정이라 뒷배경에 크로마키용 천이 덧대져 있었다.
“와, 얼굴 진짜 작다….”
“다들 너무 잘생겼네….”
이따금씩 들리는, 촬영을 구경하러 온 사무직 직원들의 마음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비주얼 칭찬이라면 질리도록 들었으나 이렇게 면전에서 듣는 건 여전히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다른 녀석들은 괜찮나….’
혹시나 싶어 둘러보니 당연하게도 괜찮지 않았다.
하필 지원이 서 있던 자리가 잡담 소리가 제일 잘 들리는 곳이라서 쿡 찌르면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갰다.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받은 줄 알겠다.”
지원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가볍게 콕, 볼을 찌르자 지원이 마치 만화처럼 기겁하며 놀랐다.
“으응? 어…!? 형이 고백을 한다고?”
무슨 소리야. 대체 뭘 어떻게 들은 거야. 나는 기겁하며 정정했다.
“뭔 얘기야. 왜 날 갑자기 거세시키려고 들어.”
숙소에 입소했던 첫날을 떠올리며 화들짝 놀라자 지원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아, 으응. 내가 잘못 들었어. 미안.”
“됐으니까 얼굴 좀 식히고. 기껏 메이크업해 주셨는데 홍조 올라와서 뜨면 아깝잖아.”
지원의 등을 살살 토닥여 주자 어디선가 빤히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뒤를 돌자 제현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도 긴장했어?”
“아뇨.”
그리고 재빨리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얼른 자리에 서. 곧 다들 스탠바이 끝나실 것 같으니까.”
“네.”
현호에 이어 은찬과 하연까지 지정된 자리에 서니 그제야 촬영장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그때였다.
“응…?”
촬영장 한쪽 구석,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스태프가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핸드폰 렌즈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