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첫 단추를 잘 끼우려면 (1)
그리고 그때, 핸드폰 화면에 뜻밖의 연락처가 떴다.
“음?”
[팀 블루 정은찬]
010-XXXX-XXXX
아직 저장명을 바꿔 두지 않은 정은찬이었다.
‘웬 전화지. 뭐가 막혔나?’
반쯤은 불안한 생각과 함께 전화를 받자 정은찬이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 지금 사옥에 있는 지하 스튜디오니까 빨리 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통보식으로 들이닥친 연락에 이쪽도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뭔지 얘기는 좀 들어야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입술 끝을 우물거리며 묻자 정은찬이 곧장 또 말을 바꿨다.
- 아냐. 됐다. 오지 마.
정말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최근에 좀 달라졌다 싶었더니만 여전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오락가락했다.
‘유지원도 이렇게는 안 한다.’
외국인인 표영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설명을 해 주셔야 제가 준비를 하고 가죠.”
그러자 정은찬이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 양 말이 없다가 불쑥 전화를 끊었다.
“뭐야?”
어이가 없어서 통화 종료 화면만 노려보고 있자 곧 컨셉 이미지가 엄청나게 도착했다.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1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1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2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2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2
[팀 블루 정은찬] (사진) 오후 9:23
전부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개수를 꽉꽉 채운 메시지였다.
“이게 무슨….”
무한 로딩에 빠진 메신저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이번엔 텍스트만 있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팀 블루 정은찬] 연습실 B104호 오후 9:24
[팀 블루 정은찬] 빨리 와 오후 9:24
하여간 여전히 독재자가 따로 없었다.
***
잠시 후 도착한 연습실은 꽤 작았다. 작업용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데스크와 믹싱용 기기들이 빼곡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히려 녹음 부스 안쪽이 더 쾌적해 보일 정도였다.
“뭐예요, 이게?”
오면서 하나하나 확인해 본 이미지를 가리키며 묻자 정은찬이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너한테 선택지가 세 개가 있어.”
“네?”
선택지고 나발이고 설명을 좀 하라니까. 나는 은찬의 말을 끊으려고 했으나 은찬의 눈이 뭔가에 반쯤 미쳐 있는 천재의 눈이라 지적하기를 그만두었다.
‘저러고 곡만 어쨌든 잘 뽑으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니까.’
내가 얌전히 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은찬이 마저 입을 열었다.
“우주랑 레이싱이랑 클럽 파티 중에 뭐가 나아?”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클럽만 아니면 돼요.”
여돌이고 남돌이고 할 것 없이 클럽 파티는 아이돌 컨셉의 단골손님이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언젠가 시기가 맞으면 할 수도 있겠지만 멤버 중 넷이 말도 안 되는 루머로 곤욕을 치렀는데 굳이 클럽 이미지를 데뷔 싱글로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 우주랑 레이싱 중에서는?”
소거법처럼 던진 물음에 나는 은찬의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건 들어 봐야 알 것 같은데요.”
그러자 은찬이 곧장 키패드 위로 손을 움직여 파일 두 개를 대기시켰다.
“하나 먼저 들어 봐.”
그러고는 그대로 푹, 헤드셋을 눌러 씌웠다.
“앗.”
그러나 사이즈가 맞지 않았던 탓에 그대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
잠시 사이즈를 줄이는 동안 정은찬의 싸늘한 시선이 꽂혔다.
‘머리가 작은 게 뭐 잘못인가.’
나는 애써 쓰린 시선을 외면하며 헤드셋을 제대로 썼다.
“이제 제대로 썼으니까 재생해 주세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나온 데모는….
‘……진짜 천재는 천재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비트 수정한 거예요?”
내가 슬쩍 묻자 은찬이 탁탁, 키보드를 몇 번 만지더니 다른 음원을 틀어 주었다.
“베이스는 이거야. 나머지는 아까 와서부터 작업한 거고.”
은찬이 베이스라고 들려준 비트는 정말 딱 멜로디랑 라인만 잡혀 있는 수준이었다.
저 뼈뿐인 비트에 이렇게 빨리 살을 붙이다니. 세련되면서도 밀도 있는 전자음과 악기음의 밸런스가 문외한인 나도 경이롭게 느낄 정도였다.
“대단하네요… 진짜….”
내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자 은찬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재촉했다.
“됐으니까 두 번째 거도 빨리 들어.”
은찬이 타박하는 바람에 재빨리 헤드셋을 다시 뒤집어쓴 나는 새롭게 재생된 데모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더 좋네.’
아까 것도 좋았는데 이건 진짜 누구한테 들려줘도 좋다고 하겠는데.
멜로디 라인도 식상하지 않으면서 너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튀었고 원래 힙합 쪽 작업을 하는 프로듀서라서 그런가.
전반적으로 세련되면서도 강렬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가 레이싱이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베이스에 효과음으로 배기음과 스키드 마크를 만드는 소리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두 번째요. 두 번째로 가요. 굳이 첫 번째까지 안 들려줘도 될 것 같아요.”
“왜?”
“데뷔 싱글은 강렬할수록 좋으니까요. 첫 번째 거는 컨셉에 맞게 조금만 다듬어서 데뷔 앨범 때 타이틀곡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두 번째 데모가 강렬하기만 하고 대중성은 내다 버린 곡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라서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정은찬이 덤덤한 얼굴로 수긍하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저희 시간 없어서 진짜 걱정했는데 형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소속사에서 미리 준비해 둔 곡도 있긴 하지만, 그게 우리를 세상에 알릴 첫 곡으로 가장 적합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니었으니까.
“다행은 무슨. 한 달 안에 일정 맞추려면 다 같이 갈려 나가야 할 텐데.”
맞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택과 집중.
“그걸 모르고 시작한 건 아니니까요.”
모를 수가 없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하하, 웃으며 애써 먼 산을 바라보았다.
***
- 인수야, 이거 진짜 내가 너무너무 아끼는 제자라서 해 주는 거인 거 알지?
“아유, 알죠. 쌤, 진짜 너무 죄송해요.”
- 죄송한데 기간을 이거밖에 안 줘?
“사랑합니다, 쌤.”
- 됐어, 아이돌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 무서워.
“하하. 그럼 쌤을 존경하는 제 마음만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 그런 말도 됐다니까 그러네. 내일 오전 9시에 연습실에서 보자. 끊어.
“넵, 들어가세요~”
겨우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쉰 순간, 소파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던 세 놈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열, 우리 리더 사회생활 한다. 봤어? 아빠가 저렇게 힘들게 안무 받아 오신 거야.”
규민의 한심한 상황극을 영인이 놓치지 않고 받았다.
“제가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꼭 짜장면 시켜 드릴게요!”
둘의 웃음도 안 나오는 꽁트에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지원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게 대체 언제 적 드립이야.”
“별로 그렇게 오래 안 됐을걸요?”
“아마 요즘 중학생들은 뭔 소린지 못 알아들을걸?”
“에이, 형이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잡담은 이걸로 충분하고. 나는 영인의 사설을 머릿속에서 가뿐히 지워 버린 채 공지했다.
“안무 영상 받았으니까 지금부터 거실 TV에 연결해 놓고 다 같이 볼 거야.”
거실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방 전체에 들리도록 입 주변으로 손을 모아 말하자 하나둘 거실로 나왔다.
데뷔 싱글 공개까지 준비된 시간은 한 달.
그마저도 이런저런 준비와 방송 활동으로 일주일을 흘려보낸 상태라 실질적인 연습 시간이 많지 않았다.
유튜브 예능에 화보 촬영에 라디오에 특집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지금 서바이벌 때문에 2주 만에 준비하는 짬이 차서 가능한 거지, 그냥 데뷔조였으면 어림도 없지.’
내일 안무 맞춰 보고 이틀 연습한 상태로 바로 MV를 찍는 일정이라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30초 안에 안 모이면 음쓰 버리기. 하나, 둘, 셋….”
하나둘 어슬렁 나오는 시간마저도 낭비하기 싫어 마법의 주문을 외자 어느새 머리 일곱 개가 나란히 TV 앞에 섰다.
“재생한다.”
곧 인연이 있는 트레이너 쌤이 보내 준 영상을 틀자 완성된 음원에 맞춰 안무가 시작되었다.
[Three two one, action. 터지는 flash. 눈 감아, 벌써.]
[빨라지는 pitch, 속도를 높여. 더 higher emotion.]
강렬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 문장형 가사보다는 키워드 중심으로 작사했더니 깔끔하게 끊어지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백업 댄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멤버들 중심의 구성.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실력 있는 댄서를 섭외하기가 어려워서 형편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멤버가 여덟이나 되면 그 인원만으로도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이 들어야 맞는 거니까.’
여덟 명으로 허전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정말 멤버 개개인의 역량 부족 문제라고밖엔 할 말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구간이 많았으나 기간 내에 소화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한번 쭉 재생시킨 결과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좋네요.”
안무의 베이스가 되는 포인트와 요구 사항을 담당했던 현호가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더 수정할 만한 부분 있어?”
혹시나 아쉬운 부분이 있을까 봐 묻자 제현호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나중에라도 말해 줘. MV 촬영 버전이랑 무대 버전이랑 달라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네.”
그렇게 다들 OK인가 하고 쭉 한 명 한 명 훑어본 순간.
어쩐지 얼굴이 굳은 것 같은 멤버가 두 명 있었다.
“나머지는 각자 영상 보면서 내일 연습 전까지 외워 오는 거로 하고, 은찬 형이랑 지원이는 잠깐 저랑 따로 사옥 연습실 좀 다녀올까요?”
말은 권유였지만 사실상 강제였다.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숙소가 사옥에서 워낙 가까워서 한두 시간쯤 다녀오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래.”
“응…!”
두 사람 모두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려던 그때.
“저도 같이 갈게요.”
의외의 인물이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