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새 출발 (3)
“일단 저희 공식적으로 데뷔 스케줄 공개하기 전까지 팀명은 미공개로 갈 거예요. 어차피 시간이 많이 남은 게 아니라서 2주 안으로 발표될 거긴 하지만요.”
그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사이에 한창 프로필 찍고 연습하고 이거저거 한다고 쳐도 결국 대중 앞에 나서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 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린다.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황인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았다.
“그럼 공식적으로 데뷔 전까지 저희 활동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주혜성이 타이밍 좋게 묻자 실장이 약간의 화색을 띠고 대답했다.
“그 전까지는 데뷔 팀명이 아니라 각자 겟데뷔 데뷔조 소속 연습생으로 출연해 주시면 됩니다. 일단 섭외 요청이 들어온 예능부터 간단히 추려 봤는데요….”
실장이 틱, 마우스 버튼을 눌러 보여 준 섭외 요청 리스트는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래서 표정이 좋았군.’
대강 훑어도 지금 한창 유명한 프로그램들 중에서는 안 들어온 게 없었다.
연애 코칭 프로그램부터 국민 상담 프로그램, 하우스 리모델링에 여행 배틀까지.
정말 어디든 골라잡으면 출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외에도 출연 의사만 있으면 데려가고 싶은 곳이 한가득이겠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관심받는 존재인지 한눈에 보였다. 아직 어딜 나가기로 확정된 거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빨리 방청 있는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싶다.’
파이널 미션 무대 때 계속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던 탓일까.
이번 무대를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무대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여유만 있으면 대기 시간 동안 간단히 미니 팬 미팅도 할 수 있으면 좋은데.’
팬들이 드디어 나를 연습생 서인수, 망한 지망생 서인수가 아닌 아이돌 서인수로 만들어 줬으니, 나도 조금이나마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돌려주고 싶었다.
‘일단 그 전에 화제성 죽지 않게 예능부터 돌아야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각자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꼽기로 했다.
일반적인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 8명 전원이 출연하는 건 당연하지만 특수 케이스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거 아니야.”
나는 자연스럽게 오지 탐험 프로그램을 고르고 있는 영인을 저지하고는 서너 개 정도 리스트를 추렸다.
[1. 기적의 선곡]
[2. 시크릿 스타]
[3. 위클리 노래방]
[4. 불러 주세요]
전부 출연자가 나와서 노래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야 아무래도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이거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웃기는 재주는 없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말로 웃기는 건 이규민 같은 녀석들 전문이니까.’
영인도 좀 위태위태해서 그렇지, 예능감 자체는 좋았다.
한국어는 잘하는데 알맹이는 어쨌든 외국인이라 말이든 행동이든 직설적인 데서 오는 유머 코드도 있었다.
박하연은 인상이 워낙 좋아서 상담이나 코칭 예능 같은 데 나가면 좋을 것 같고.
‘지원이랑 밥 얻어먹고 다니는 거 찍어도 괜찮겠네.’
박하연, 유지원, 주혜성. 우리 그룹에서 선한 인상을 담당하는 세 명이 주르륵 한 끼 얻어먹겠다고 초인종을 누르고 다니는 모습을 생각하니 실소가 터졌다.
‘잘 어울린다, 진짜.’
어느 집에 가더라도 얘네를 어떻게 굶기고 보내냐고 고기를 내올 것 같은 조합인데.
반대로 나나 정은찬, 제현호 셋을 내보내면 어색한 침묵이 흐를 것이 뻔했다.
나는 그래도 살갑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나머지 두 명은 전혀 아니니까.
아무튼 각자 리스트를 고르고 나니 금방 스케줄이 정해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개인 최종 스케줄을 받아 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테트리스야, 스케줄표야.
“……? 저 스케줄이 이게 확정인 건가요?”
의문을 담아 묻자 윤 실장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따 출연 멤버 지정해서 연락 싹 돌릴 건데 그러고 나서 최종 확정이에요. 일단 지금은 스케줄만 맞춰 본 거고요.”
아니, 그 맞춰 본다는 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이렇게까지 꽉꽉 눌러 채운다는 뜻이냐고요.
분명 내가 출연 희망으로 체크한 예능은 네 개였는데, 일주일 스케줄에 배치되어 있는 스케줄은 9개였다.
‘그중 몇 개는 짧게 끝나는 인터뷰나 잡지사 화보 촬영 같은 것도 끼어 있네.’
촬영에 한나절 이상 걸리는 프로그램은 하루에 하나씩이지만, 사이사이 단발성 스케줄이 두 개씩은 끼어 있었다.
“이제 데뷔하면 거기에 금, 토, 일은 기본으로 음방 스케줄이 들어가고요. 행사도 포함될 테니까 지금이 가장 여유가 있는 스케줄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거예요.”
윤 실장… 아까부터 계속 이래도 알겠습니다, 저래도 알겠습니다, 로 나오길래 최대한 우리에게 맞춰 주려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내막이 있는 거였나.’
기획 면에서 최대한 양보해 줄 테니 스케줄은 불평 없이 가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힘들겠지만 불평할 게 아니지. 불러 주는 곳이 많은 건 당연히 좋은 거니까.’
확실히 과한 스케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획적인 부분을 양보받았다면 우리도 뭔가 하나는 노력해 주는 것이 맞았다.
불러 주는 곳이 많다고 힘들어하는 건 배부른 소리이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녀석들이 정말 괜찮은 게 맞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개인 연습생이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사양할 수 없는 처지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협의를 이어 나갔다.
***
잠시 후, 바로 작업실로 향한 은찬을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자연스레 숙소로 복귀했다.
최대한 치운다고 치웠지만 집 자체가 낡아서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방법이 없었다.
“내일부터 엄청 바빠지네.”
매일매일이 연습이었던 겟데뷔 촬영 시절보다 더 힘들 것이 분명한 스케줄에 다들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조금은 의욕을 돋워 줘 볼까.’
나는 매니저의 차가 멀어진 것을 창문 너머로 확인하고는 커튼을 친 다음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스케줄 확인했지? 당장 내일부터 시작인 거.”
그러자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다들 의문이 담기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 영인이는 제외하고, 다들 활동 계약서 따로 작성한 거 있지? 보여 줘 봐.”
“…?”
“그걸 왜?”
다들 여전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제일 옆에 있는 제현호가 가방을 뒤져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아니, 이걸 왜 가방 같은 데 보관하는 거야.’
내가 보여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가방에서 덥석 꺼내 줄 줄은 몰랐지.
제현호의 계약서를 살펴본 나는 제일 먼저 정산 항목부터 찾았다.
‘선투자금이랑 정산 비율이 얼마로 잡혀 있지?’
다행히 비율은 나쁘지 않았다. 좋지도 않지만, 중소에서 흔히 제시하는 비율이었다.
‘비율에서 메리트가 없으면 선투자금을 적게 잡았어야 양심이 있는 건데.’
정산 항목을 꼼꼼히 뜯어본 나는 정산에서 제외하는 금액, 그러니까 회사가 연습생을 데뷔하는 데 이만큼 썼기 때문에 수익에서 제외하고 정산하는 비용을 확인하고는 쯧 혀를 찼다.
“그래도 양심이 없진 않네.”
제현호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겟데뷔에 나온 덕에 애초에 소속사에서 받은 지원이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한 달 정도 확실히 활동하면 해소 가능할 금액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괜찮으면 보여 줄래?”
다른 놈들도 보여 달라고 손짓하자 하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꼭, 보여 드려야 해요?”
계약서는 사실 개인 정보의 영역이긴 하다. 우리가 영원히 같이 갈 사이라도 서로 다른 조건으로 계약한 녀석이 있으면 얼굴 붉히기 싫어서라도 불문율로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한번 확인해 두는 게 좋긴 한데.’
굳이 억지로 달라고 겁박할 필요는 없지.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불편하면 안 보여 줘도 돼. 대신.”
나는 제현호에게 계약서를 돌려주며 이유를 설명했다.
“선투자금이랑 정산 항목은 지금 다시 확인해. 그거 다 까기 전까지는 통장에 한 푼도 안 꽂힌다는 소리니까.”
“아.”
그제야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계약서 사본을 찍어 두었던 사진이나, 원본을 찾아 내용을 확인했다.
규민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냐?”
항상 직구를 날리는 놈이니 이쪽도 가감 없이 묻자 규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2억 5천.”
“켁. 뭐 하는 데… 아.”
나는 그제야 놈이 장수 연습생이라는 실감이 났다.
유지원이나 제현호처럼 우리의 스케줄을 생각하면 금방 깔 금액인 녀석들도 있지만….
‘2억 5천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이규민을 비롯해 암울한 금액이 적혀 있는 놈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거 다 까려면 스케줄은 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 꽉꽉 채우는 게 좋아. 어쨌든 우리는 기간제잖아.”
그룹이 해체된 후에도 인기가 유지될지 어떨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의 화제성과 인기뿐. 언제 대중에게 외면받을지 모르는 직업인 만큼 물 들어올 때 모터라도 달아서 나아가야 했다.
“우리는 거기다가 중간에 KMB한테 이중으로 수수료를 뜯기니까 다른 일반 그룹들보다 불리해. 그러니까 좀 힘들더라도 불러 줄 때 우선 최선을 다해 해 보자.”
여기에 이견이 있는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갑작스럽게 닥쳐온 현실에 분위기가 어색해진 그때, 지원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불러 주는 곳, 많아서 다행이다….”
막내가 저렇게 말하는데 형들이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아이고, 애기다, 애기야.”
규민이 어이가 없을 만큼 귀엽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지원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래, 얼른 열심히 일해야 정산받지.”
제일 어두운 표정이었던 혜성도 지원을 보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각자 의지를 다지며 방으로 해산하려던 찰나, 슬쩍 규민이 슬쩍 혜성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안 보는 척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규민이 혜성에게 속삭였다.
“형, 얼마 까야 해요?”
그러자 혜성이 부스럭거리면서 규민에게 자기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아, 헐…….”
‘뭐, 저렇게 놀라는 거지.’
라고 생각했던 나는 곧 규민이 떤 입방정에 덩달아 놀라고 말았다.
“제 거의 두 배네요?”
아, 그러고 보니 혜성이 지금 소속된 소속사,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그룹 그대로였던가.
‘망한 그룹 활동 하나 껴 있으면 그 금액 나올 만하지.’
그러니 이런 데 나올 거면 아예 계약 기간 종료 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나오는 게 나은데.
그렇지 못할 만한 사정이라도 있었나.
거기는 내가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이 팀을 잘 운영하는 건 내가 어떻게든 키를 쥐고 고군분투해 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멤버 하나당 빌딩 살 정도로는 안 되더라도, 성공했다는 소리 들을 만큼은 가져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비주얼 컨셉용으로 쓸 만한 자료들 스크랩이라도 해 두자.’
나는 결국 노트북을 들고 와 책상 앞에 앉았다. 묘하게 어깨가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싫지 않은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