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새 출발 (2)
요약하자면 크몬 대표이자 유명 래퍼 글렌은 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유망주를 돈 벌자고 아이돌 판에 팔아먹은 악덕 사장이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언더 판 한정의 이야기지만.’
외부인들에게는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또 있을 테니.
은찬도 내심 신경 쓰이는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잠시 하연과 은찬을 보다가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저희 활동 끝나면 그때는 다시 힙합 씬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걸 알아야 뭐라도 말해 줄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 거, 배포가 쥐콩만 한 쫌생이들이네. 다 결국엔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 돈 벌면 뭐 큰일 나는 줄 아나. 본인들은 가사에 매일 돈, 차, 시계 얘기 안 쓰면 죽는 것처럼 굴면서 킬앤힙 나오기만 해 봐요. SNS를 아주 저격으로 도배해 줄 테니까.
라고 말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나도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할 거 아냐.
기껏 욕해 줬는데 알고 보니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든가 하면 그런 낭패가 따로 없었다.
“음….”
내 질문에 하연이 잠시 대답을 유보하고 은찬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둘이 같이 묶어서 나온 이유가 은찬 때문이었지.
‘하연도 아이돌 활동이 싫은 눈치는 아닌데.’
싫으면 이렇게까지 잘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은찬이 아이돌 활동할 거 계약직으로 해 봤으니 이제 미련 없다! 손을 털면 본인도 굳이 남을 필요는 없다, 그 정도의 생각인 듯 보였다.
“형은요?”
하연이 생각에 잠긴 듯한 은찬을 바라보다가 내게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나?”
이거 묻는 의미가 있어? 나는 당연히 아이돌이었다.
“아이돌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룹으로 하게 될지 솔로로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돌은 계속할 거 같은데.”
나를 찾는 팬들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먹고살 일을 찾아봐야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겨우 올라온 이 자리에서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평생은 어렵더라도 최소 10년은 하고 싶은데.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계속 은찬이 생각하도록 세워 두는 것도 그림이 좀 이상했다.
내가 다시금 화살을 은찬에게 돌리자 은찬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일단은 계속 아이돌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히 읽혔다.
‘자신이 없다 이거지.’
확실히 은찬은 솔로 아이돌로 활동할 만한 재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연과 2인조로 활동하는 것도 썩 아이돌 그룹으로서 그럴듯한 그림은 아닐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크몬에서 뭘 계획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내가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적당한 위로를 건넸다.
“그럼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형이나 하연이나 재능 넘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당장 그분이랑 협업해야 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거기에 어차피 욕할 사람은 뭘 해도 욕한다고 덧붙여 주고 나니 뒤에서 뭔가 수상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와, 여기 ♡♡치킨 있네.”
“확실히 서울 도심이라 그런지 배달비 진짜 싸네요.”
“원래 배달비 얼마 나왔는데?”
“저 본가가 솔직히 별로 외진 곳도 아니거든요? 그냥 신도시인데도 6천 원, 7천 원 이렇게 받더라고요.”
“대박. ◇◇◇떡볶이 있다.”
그간 태복 시골짝에 박혀서 외식이라고 해 봐야 중국집이 전부였던 녀석들이었다.
도심으로 나오자마자 펼쳐진 배달의 신세계에 눈이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정작 데뷔를 앞두고 관리 실패로 혼쭐이 날 수는 없으니까.’
나는 한숨을 삼키며 은찬네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나머지 놈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다 시켜, 다 시켜. 치킨이랑 떡볶이랑 또 뭐 있지.”
“숯불갈비 맛있겠다….”
“그럼 숯불갈비도….”
내가 가까이 가자 신나서 메뉴를 취합하던 영인의 머리 위로 스윽, 그늘이 드리워졌다.
“뭘 그렇게들 다들 집중해서 보고 있는지 나한테도 좀 보여 주지 그래?”
그러자 영인이 재빨리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던 혜성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형, 그거 결제만 그냥 해 주세요. 카드 등록되어 있어요!”
“어…?”
“빨리요! 얼른! Hurry!”
그러자 혜성이 무슨 상황인지 영문도 모른 채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어… 총 21건 결제 완료되었다는데? 이게 맞아?”
“아, 네네!”
나는 곧장 영인을 향해 약간의 경멸을 담은 눈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대체 뭘 얼마나 담은 거야?”
“사람이 8명이잖아요!”
인당 3인분씩은 그냥 먹겠다는 마인드인 거지? 못해도 30만 원은 나왔을 것 같은데….
“돈은 누가 내고?”
열량도 열량이지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머리가 어지러워 물으니 영인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희 할아버지가 사는 거예요!”
“어?”
그러자 금시초문이라는 듯 나머지 멤버들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N분의 1 아니었어?”
“엥?”
모두의 몰랐다는 반응에 영인이 씨익 웃으며 주혜성으로부터 돌려받은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짠! 할아버지가 활동하면서 생활비로 쓰라고 보내 주셨어요!”
그러면서 자신만만하게 내민 통장 잔고는 다들 자릿수를 한 자리 착각할 뻔한 금액이었다.
“…?”
다들 눈을 의심하며 눈꺼풀을 비비고 화면을 다시 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너 혹시 뭐 집이 150평이고 그런 거 아니지?”
규민이 돌직구로 묻자 영인이 해맑게 대답했다.
“아마 그 정도 될걸요? 아, 농장까지 포함하면 엄청 넓어요. 차 없으면 못 들어와요!”
그러자 규민이 얼굴을 싹 바꾸면서 선언했다.
“오늘부터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머릿속에 영인은 뭐 먹을 때마다 슬쩍 나타나는 한 입 스틸러에서 대농장주 3세로 특급 진화를 이뤄 냈다.
“너희 할아버님도 한우 전문점 크게 하시잖아.”
규민에게 지적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거랑 농장은 또 다르지. 요즘 이거저거 비용이 다 올라서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으셔. 게다가 고모랑 삼촌이 몇 분인데.”
앓는 소리 하기는.
나라고 뭐 부족하게 자란 건 아니어서 나는 얌전히 신경을 끄기로 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더 바빠질 테니까 적당히 먹고 부기 뺀 다음 자자.”
머릿속에 꽉꽉 눌러 새기라고 일부러 음식 도착하기 전에 해 둔 말은 하나 마나였다.
‘이게 사람 먹는 꼴이냐.’
그래,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즐겨 놔라.
숙소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지나갔다.
***
다음 날, 드디어 새로 만든 로고와 CI를 받아 든 나는 모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해서 어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넓고 넓은 케이 팝 유니버스에서, 기적처럼 ‘조우’한 나의 스타, 라는 이미지로 컨셉을 잡아 보았는데요.”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앞으로 지겹도록 볼 그룹 로고도 디자인상을 괜히 받은 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꽤 괜찮았다.
‘아이돌 그룹 로고보다는 뭔가, 디자인 제품 같다는 게 약간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고 자체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그렇게 나를 겨우 안심시켰다가 다시 뒤집어 놓은 건 그 이후로 이어진 세부 컨셉이었다.
“그러니까 저희 개개인한테 수호성이라는 게 하나씩 붙어 있는 설정이라는 거죠?”
느닷없이 우주에 꽂혀서는 우리가 각자 출신 별이 따로 있고, 아이돌을 하기 위해 지구로 찾아온 외계인들이라는 무리수 설정을 들고 왔다.
“아, 네네. 실존하는 별이나 행성을 지정해 주셔도 되고요. 아니면 가상의 별을 작명하거나 해서….”
영인을 제외한 모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총대를 들고 맞섰다.
“구체적인 설정은 빼는 게 어떨까요. 상징하는 별이 있는 것까지는 좋을 것 같은데요. 외계인 설정이 붙으면 플러스 요인보다는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것 같아요.”
그러자 영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요? 많이들 하지 않아요? 재밌을 거 같은데? 막 변신! 같은 것도 하고.”
나는 잔잔히 웃는 미소를 얼굴에서 거두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재미는 있겠지. 놀리는 재미가.”
기획사들이 무리를 둬서라도 튀는 컨셉을 쥐여 주는 이유는 정해져 있다.
그렇게라도 주목받아야 하니까. 이게 뭐지? 하고 한번 클릭이라도 받아야 유리하니까.
‘하지만 우린 화제성은 일단 깔고 가는 그룹이니까.’
아마 최소 3년 안에는 겟데뷔만큼 성공한 프로그램이 나오지 못할 터다. 아류 프로그램은 계속 나오겠지만.
‘막방 시청률이 결국 5.3%를 찍었는데 대우가 이 수준이라는 건 솔직히 용납 안 되는 일인데….’
지금 각 멤버들별 소속사 대표들은 죄 빨리 이 뜨거운 화제성을 가진 멤버들을 본인들이 기획한 메인 프로젝트에 넣고 싶어서 안달들인 상태겠지.
안정적인 관리 능력을 갖춘 기획사는 기껏해야 위탁 수수료 먹자고 일이 넘쳐나는 외주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KMB가 처음부터 아예 프로듀싱을 맡길 기획사부터 컨택해서 확정했으면 이럴 일이 없는 건데.’
이미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누구를 탓해도 소용없었다.
기분 나빠하지 않을 선에서 최대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외계인은 아니잖아.
“외계인 설정은 보는 분들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상징 별은 크게 불호를 타지도 않을 것 같고 나중에 연계 굿즈로도 상품화할 수 있을 듯하니 하나씩 정해만 두는 게 어떨까 싶어요.”
적당히 절충안을 내자 영인을 제외한 멤버들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 그렇게 할까요?”
회사로서도 급하게 모인, 결속력이라곤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리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라면 우리만 정신 바짝 차리면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전문적이고 치밀한 프로듀싱을 기대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룹의 개괄적인 설정과 CI를 확정 짓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인 데뷔 싱글 이야기가 나왔다.
“시간이 많이 촉박한데 정말 괜찮겠어요?”
키워드와 컨셉이 나왔으니 하루 만에 음원을 만들어 오겠다는 은찬의 포부 넘치는 말에 실장이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괜찮습니다.”
정작 은찬 본인을 비롯하여 다른 멤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저, 저희 지금 준비된 곡으로 해도 최종 편집 마감일까지 기간이 굉장히 촉박한데….”
“내일 10시까지 A안 B안 작업해서 보여 드리면 되는 거죠?”
“내일 10시…. 헉,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요?”
은찬의 데드라인 선언에 반사적으로 시간을 따라 읊은 실장이 놀라 되물었다.
“일단 하나만 해 보고 맞을지 확인을 한 다음에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전에 작업하신 미발매 곡을 다듬어서 주시는 거라면 그것도 괜찮고요.”
그러나 은찬은 꿋꿋했다. 우리와 함께 작업할 때 그러했듯이.
“아뇨. 새걸로 데모 두 개 가져올게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깔끔하게 일어나 버렸다.
“내일 10시에 뵙겠습니다.”
남겨진 멤버들은 이제 그 외의 것들을 결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