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94화 (94/224)

#094. 재계약 (3)

“하. 하. 하. 정말. 너 .무. 너. 무. 기. 대. 돼. 요, 대표님.”

규민이 필사적으로 영혼 없는 대답을 하자 최 대표가 눈치도 없이 활짝 웃었다.

“그렇죠, 기대되죠!? 지금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지나치게 해맑은 최 대표가 곧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넘겨 보여 준 그룹명을 본 순간.

여기저기서 숨을 참느라 필사적으로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스트리트 보이즈]

“어때요!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도 넣고 왠지 복고풍 느낌도 나는 게 딱이지 않아요?”

어쩌면 내 인생 1회차 때의 ‘에이스트리트’도 멤버들이 나름 최선을 다해 이 사람을 저지해서 얻어 낸 팀명이 아니었을까.

팀원들 모두 차마 동조하기는 싫은데 소개 첫날부터 대표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어 곤란한 눈치가 역력했다.

‘이거 어떡하냐.’

모두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진 그때, 규민이 등 뒤로 쿡쿡 영인의 팔을 찔렀다.

“네가 좀… 뭐라고 말 좀 해 봐. 너 팩폭 잘하잖아.”

우리들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규민이 완벽한 복화술을 수행하는 것을 기가 막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즈, 즈그… 믈… 으뜩흐으.”

영인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규민이 다시 말했다.

“그냥 뭐… 호주에서 그거 엄청 이상하고 성적인 속어라서 안 쓰는 게 나을 거라고 해 봐.”

과연 그게 통할까…?

‘이 사람이라면 그렇게 중의적으로 쓰는 것도 섹시하지 않나요? 하고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와 트렌드의 인식이 현저히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은 가늠할 수 없는 법이니까.

다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자 최 대표가 약간 시무룩해진 얼굴로 물었다.

“왜들 말이 없어요? 별로예요?”

그리고 그 순간 영인 대신 다른 인물이 용감하게 총대를 멨다.

“네.”

이 똑 부러지는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은찬이었다.

지금껏 은찬을 걸어 다니는 작곡 천재(feat. 폭탄) 정도로 생각해 왔던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거봐요…! 저희 형 진짜 멋있다니까요?’

라고 얼굴에 써 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하연은 살짝 무시하고.

은찬의 반발에 부딪힌 최 대표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 어, 어디가 별로인가요?”

그리고 위축된 최 대표에게 은찬이 한 번 더 팩폭을 날렸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00년대 초 데뷔 그룹 같은 작명입니다.”

사실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기획사 업무와는 문외한이었을 최 대표가 한창 아이돌 노래를 들었을 시기는 00년대 초가 맞을 테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뒤였다.

“그… 그렇군요….”

최 대표가 잠시 큰 충격을 받았는지 주춤하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른 친구들 의견은 어떤가요? 찬성하는 쪽 의견도 좀… 들어 보고 싶은데….”

그러나 찬성 의견에 손을 드는 멤버는 그 누구도 없었다. 놀랍지도 않았지만.

‘지금 충격받았을 때 빨리 밀어붙여야지.’

나는 재빨리 손을 들었다.

“실은 대표님, 저희가 파이널 미션 때 혹시 사용할 기회가 있을까 해서 지어 둔 팀명이 있었는데요.”

이제 은찬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저희가 이렇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서 데뷔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팬 여러분들이 저희를 발굴해 주신 덕분이니까요. 팬분들과 저희가 서바이벌이라는 계기로 정말 우연히 만나서 인연이 됐다는 의미로 ‘엔카운터’로 지었거든요. 이걸 사용할 순 없을까요?”

슥, 어쩌다 보니 시선이 마주친 규민이 ‘나이스!’ 하고 표정으로 외치는 것 같았다.

‘사실 엔카운터도 지적하려면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겠지만 에잇 스트리트 보이즈보다는 백번 낫지.’

어차피 1년 활동하고 해체될 그룹명이다. 나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최악만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최 대표를 바라보았다.

최 대표가 약간은 망연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야?”

보아하니 에잇 스트리트 보이즈로 오만 CI를 만들어 배포하는 상상을 벌써부터 하신 것 같은데.

‘그래도 에잇 스트리트 보이즈는 싫어요.’

결국 최 대표는 멤버들의 의견을 꺾어 가며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악의 없이 망하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것도 잘못은 잘못이다.

다들 다 큰 어른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는 것을 보기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그럼에도 꿋꿋했다.

“그래요, 그러면… 일단 데뷔 쇼케이스 컨셉 관련해서는 이따 윤 실장이 와서 다시 이야기해 줄 거예요. 오늘 일단 다들 숙소로 가져갈 짐은 챙겨 왔죠?”

최 대표의 물음에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숙소부터 봅시다. 쇼케이스 미팅은 이따 다시 여기로 와서 해도 되는 거니까.”

여기서 ‘여기’란, KMB 방송국 사옥에 위치한 코드비 전용 사무실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따로 임대를 얻어 줄 줄 알았는데.’

예산이 그 정도는 안 나왔나. KMB 방송국 10층이 최근 부서하나를 통폐합하면서 비우게 되었다면서 그쪽을 쓰라고 통으로 내주었다.

‘외부에서 거들먹거리거나 허튼짓하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예산이 안 나온 건지 알 수 없으니 원.’

아무튼 숙소는 KMB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택시를 타면 5분, 걸어도 15분 이내로 걸리는 정도?

여차하면 KMB 본사 사옥에서 찍은 프로그램 중 펑크 나는 자리에 전부 쑤셔 넣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위치 선정이었다.

“사무실이랑 가까운 건 좋네.”

아마도 사옥을 제일 많이 들락거리게 될 은찬이 중얼거렸다.

은찬과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사옥과 붙어 있는 쪽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만큼 매니저나 관리부의 터치가 잦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뭐, 허튼짓 안 하고 쉴 때 숙소에서 얌전히 쉬기만 할 거라면 솔직히 상관없긴 하지.’

나는 아무쪼록 찔릴 게 없으니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숙소 현장에 도착한 순간, 나는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꿔야 했다.

“그, 집이 좀 낡긴 했죠? 그래도 이 근처에서 얻을 수 있는 집 중에서는 여기가 제일 넓었어요.”

최 대표가 자신 대신 안내해 줄 사람이라며 붙여 준 로드 매니저, 조우균 씨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약간 유약해 보이는 게 흠이긴 하지만 적당히 꼼꼼하고 배려심 넘쳐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향한 곳만 이런 귀곡 산장 꼴이 아니었다면 ‘우리 매니저 복은 좀 있는 것 같은데?’ 하고 홀려 버렸을 정도였다.

“죄송해요. 저도 최대한… 좋은 곳으로 구하고 싶었는데, 이 동네에서 이 예산으로 구해야 하다 보니까….”

매니저가 자기가 다 미안하다는 듯 고개 숙여 사과를 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

예산을 안 준 KMB 놈들을 탓해야지, 그 예산안에서 최선을 다한 매니저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새 이 동네에서 8명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평수의 신축 건물을 검색해 본 규민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일단… 이따 쇼케이스 미팅은 4시부터라고 했었죠? 짐부터 풀고 청소 좀 해 둘까요?”

꽤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여기서 마냥 우울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후,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지휘를 시작하자 하나둘, 매니저가 구비해 놓은 듯한 청소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숙소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으아아아악-!!!!!”

우렁찬 비명 소리의 주인공은 규민이었다.

‘아까부터 진짜 어지간히도 튀네.’

다들 흐린 눈을 하고 규민을 바라보자 규민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저, 저, 저, 저기 그, 그그, 그 그거 있다고, X발! 그거!”

“……?”

뭔 소리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규민을 바라보다가 바사삭,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빗자루 솔 사이에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설마.”

그리고 그게 머리카락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순간.

“바… 바, 바 선생….”

규민이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

다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청소용품들을 쌓아 두었던 곳에서 도망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과묵하고 덤덤하기로 제일인 제현호마저도 ‘저건 좀….’이라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친 그때.

홀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용자가 하나 있었다.

주혜성이었다.

“아, 그래도 산 바퀴네. 밖에서 들어온 거지, 안에서 사는 애 같진 않은데?”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눈앞의 빗자루를 하나 들어 날을 세운 쪽으로 정확하게 ‘그것’을 내리찍었다.

“응, 죽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틈만 잘 막으면 괜찮을 거야!”

그 모습이 어찌나 해맑고 눈부시던지 영인은 혜성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저 형이랑 같은 방 쓰면 안 돼요?”

“뭐야, 비켜. 내가 먼저 줄 섰어.”

느닷없이 주가가 상한가를 친 혜성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 벌레 정도는 다른 방이라도 금방 잡아 줄 수 있으니까…!”

느닷없이 등장한 불청객 때문에 좀 정신이 없긴 했지만 숙소에 방은 총 세 개.

작은 방에 2층 침대가 하나씩, 큰방에는 양 사이드 쪽으로 붙여서 두 개가 놓여 있는 구조였다.

“일단 4인실을 누가 쓸지부터 정하는 게 좋겠는데.”

1년 동안 다 같이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것은 똑같지만, 다들 그래도 같은 방을 쓰는 인원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죽어도 싫다 이건 아닌데.’

어차피 은찬과 하연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친분이 있는 정도였다.

둘에게 2인실 하나를 내주고 남은 2인실과 4인실은 제비뽑기로 정하기로 했다.

“오.”

결과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다.

[2인실] 제현호, 서인수

[4인실] 유지원, 주혜성, 이규민, 표영인

이규민과 표영인이 같은 방이 된 것이 상당히 꺼림칙하긴 했으나 혜성이 있으니 알아서 잘 컨트롤해 주겠지.

다년간의 단체 생활에서 오는 짬이 빛을 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럼 이제 정리는 얼추 다 된 건가?”

숙소에 도착한 후로 2시간쯤 후.

각자 걸레와 청소 도구를 들고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 그래도 좀 사람 사는 집구석 같아졌다.

“다들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잠깐 나가서 간식거리 할 만한 것 좀 사 올게요.”

우리를 도와 여기저기 손을 보탰던 매니저가 타이밍 좋게 나가자마자 나는 거실 앞에 섰다.

“우리 이제 1년 동안 미우나 고우나 한배를 탄 거니까, 서로 불편할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생활 규칙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단은 내가 당연히 리더를 맡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으니 미리 기강을(?) 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침착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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