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기대했던 순간 (2)
무대가 끝난 후부터는 모든 게 영화 속 일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울리는 음향 소음에, 객석에서 들리는 환호성과 실시간 라이브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외침까지.
눈부신 조명 빛에 잠시 어지러워 휘청거릴 새도 없이 결과를 확인하러 이동해야 했다.
팀 블루가 선공이었던 탓에 이제 팀 레드가 준비해 온 것을 지켜볼 차례였다.
“…잘하네.”
주혜성이 무심코 내뱉은 감탄대로 팀 레드 역시 이 갈고 준비해 온 티가 났다. 간절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것처럼.
무대 아래에서 응원하는 팬들도 기세에 지지 않기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애당초 팀 블루가 너무 유리하지 않도록 조정에 조정을 거듭한 방식인 만큼 그냥 웬만큼 잘하는 정도로는 우리를 이길 수 없었다.
남의 노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쪽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 발자국만 더 뒷걸음질 치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마지막 기회.
이쪽이라고 놓칠 수는 없는 만큼 필사적으로 준비했다.
‘연습 시간으로 밀릴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누구는 간절하고, 누구는 여유가 넘쳐서 승패가 갈린 게 아니라.
이쪽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내동댕이쳐 가며 이 꿈에 사활을 걸었을 뿐이다.
“뭐 해요? 빨리 오라는데.”
잠시 현실감이 사라진 감각에 발걸음이 느려지기라도 했나. 영인이 재빨리 내 소매를 잡고 나를 끌어당겼다.
준비된 발표 무대 앞에 나서기 위해 대기 중인 나머지 팀원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중심으로 모인, 내가 키운 우리 애들.
‘애들, 이라기엔 나보다 연상이 둘이나…. 아니, 내가 일단은 정신적인 나이로는 스물여덟이니까….’
바보 같은 생각이 떠오른 순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멤버들에게로 합류해 눈부신 조명이 비추고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자, 지금까지 팀 블루와 팀 레드의 무대! 어떻게 지켜보셨을까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소년들의 마지막 무대! 결과를 지금 바로 함께 만나 보시겠습니다!]
MC석에 서 있는 비안은 평소보다 한껏 멋을 낸 차림이었다. 의상은 화려하기는커녕 바늘 하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칼정장인데도.
사람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다들 눈을 떼기 힘든 에너지를 느끼는 것 같았다.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오늘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 최고의 무대를 준비한 각 팀 연습생들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도 비안이 열심히 제작진이 준비해 주었을 스크립트를 읊으며 공치사를 했으나 귀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빨리하고 끝내…!’
‘그래서 데뷔조가 누구네인데…!?’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던 그때.
화면 뒤편의 스크린이 바뀌기 시작했다.
[심사 위원 점수]
[팀 레드]
[???]
[팀 블루]
[???]
물음표로 처리된 자릿수가 1에서 9까지 랜덤으로 바뀌더니 일순간 탁, 탁, 탁 1의 자릿수부터 확정되었다.
[팀 레드]
[945]
[팀 블루]
[960]
그리고 마침내 점수가 공개된 순간 나는 뒤의 점수를 보지 않아도 승패가 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됐다.’
팀 레드가 우리를 이기게 만들려면 심사 위원 점수에서 대폭 퍼 주기를 해서 어떻게든 점수를 끌어올리려 했을 텐데.
겨우 면피할 수 있는 정도의 점수 차를 낸 걸 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예상한 대로 순차적으로 뜬 결과가 놀랍지 않았다.
[파이널 현장 투표 결과]
[팀 레드]
[518]
[팀 블루] [WIN]
[982]
이어진 실시간 시청자 투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실시간 글로벌 시청자 투표]
[팀 레드]
1,758,932표
[팀 블루]
1,758,932표
0에서부터 출발한 7자리 숫자가 점점 수를 불려 가더니 일순 멈췄다.
동표가 나왔을 리는 만무하니 여기서 이긴 팀만 점수가 올라가는 거겠지.
모두가 숨을 죽인 그때, 비안이 마이크를 잡았다.
[팀 레드와, 팀 블루, 여기서 단 한 팀만이 데뷔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팀별로 한 분씩만 소감을 들어 볼까요?]
먼저 팀 레드부터 기회가 주어졌다. 이걸 기회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두 문장 사이에 ‘다음에는’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팀 블루에서는 내가 마이크를 잡으려던 순간, 느닷없이 제일 비안 쪽에 서 있었던 영인이 마이크를 받았다.
‘악.’
속으로 망했다, 심장이 쿵 곤두박질친 순간, 영인이 매우 놀랍게도 상식적이고 무난한 멘트를 뱉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무대 함께 즐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다 같이 정말 열심히 하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인수형이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요! 다음에는 인수 형 속 덜 썩이면서 신나는 무대 보여드릴게요!”
자연스럽지만 묘하게 영어 억양이 남아 있는 말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내용도 내용이고 우스꽝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귀여워서.
정작 본인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고개가 의도한 것처럼 돋보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운명의 시간.
멈춰져 있던 총투표수가 승패를 결정짓기 위해 정신없이 깜빡여대고, 마침내 화면에 승자 팀이 표시되었다.
[최종 우승 팀]
[팀 블루]
[서인수, 표영인, 유지원, 박하연, 제현호, 이규민, 정은찬, 주혜성]
[스타가 되기 위한 99명의 소년들의 위대한 여정! 최종 데뷔팀은 팀 블루! 축하드립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결과를 받아들인 순간.
“……?”
“헐?”
“뭐야?”
리더로서 마이크를 건네받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아.’
뺨을 타고 뜨거운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주혜성이나 정은찬, 유지원같이 멘탈 약한 멤버들이 우는 걸 달래 주는 게 내 리더로서의 역할인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틀어막기 위해 애썼으나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어머… 서인수 연습생,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 와닿는 게 많은가 봐요.]
비안이 급히 스태프에게 손짓하며 눈물을 닦을 만한 손수건을 건네주었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도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마이크를 꽉 움켜쥐었다. 꼭 누가 뺏어가기라고 할 것처럼.
데뷔.
이 짧은 단어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서 돌아온 먼 길을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딴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빨리 뭐라도 감사 인사를… 까지 떠올린 그때 옆에 서 있던 이규민이 거의 빼앗듯 마이크를 가져갔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인수가 정말 많이 고생도 했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한 규민의 표정이 웃음기와 여유가 있지만 사뭇 진지했다.
“저희 여덟 명 모두 누구 하나 열정이 부족했던 멤버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인수가 제일 열심히 했던 만큼 감회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곤 마무리 멘트에 달했을 때는 찡긋 윙크까지 해 가며 장난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릴 테니 오늘만 귀엽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멘트를 마치며 내 등을 마구 두드려 대고 머리까지 헝클어 놓는 것이, 평소였다면 나대지 말라고 짜증 냈을 테지만.
여전히 누수 상태인 꼴로는 고개를 숙인 채 규민의 수습에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이어서 다른 분들도 소감 한 말씀씩 들어 볼까요? 우선 서 있는 순서대로 이제 표영인 연습생부터?]
차례차례 순서대로 이 순간을 내내 그리며 연습해 왔을 멘트를 뱉는 와중에도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결국 차례가 넘어가서 맨 마지막으로 내가 소감을 발표할 차례가 되어서야 퉁퉁 부은 눈을 가린 채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동안 응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계속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실시간으로 실망시켜 드리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반쯤은 자조적인 농담을 내뱉자 객석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괜찮아!”
그러자 그게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객석 전체에서 같은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도 쏟아진 다정한 위로에 가까스로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약한 모습은 오늘까지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멋진 서인수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앞으로’를 확실하게 기약할 수 있어.
그게 1년짜리 시한부라는 것은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겨우 멤버 소감을 마치고 앵콜 스테이지를 위해 무대 위에 선 순간.
객석에 앉아 있는 팬들과 부모님, 그리고 다른 관계자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나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다들 즐거워 보였다.
“…….”
무대 아래를 계속 보다가는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채 눈가에 손부채질을 했다.
[한마디만 더 하면….]
내가 먼저 울어 버리는 바람에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지원도 멀쩡히 앵콜을 하는 마당에 내가 앵콜까지 망칠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마이크를 쥐었다.
[See you again 한마디면 나를 녹여 줘-]
가까스로 앵콜 무대를 마치고 모니터링용 화면에서 생방송 마크가 사라진 순간.
드디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객석을 향해 다 같이 꾸벅 90도 배꼽 인사와 큰절을 올린 다음 연습실로 향하자 각오했던 반응들이 돌아왔다.
“와, 형 지금 얼굴 대박이다. 사진 찍어도 돼요?”
영인의 즐거워 보이는 말에 나는 곧장 쏘아붙였다.
“되겠냐?”
“아, 왜. 매일 있는 일도 아닌데 사진 하나는 남겨야지.”
규민이 농담조로 거들자 옆에서 지원과 혜성이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두둔했다.
“그, 아니…. 그, 그렇게, 보기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사진으로 남기는 건 좀….”
둘 다 차마 괜찮다고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내가 어지간히도 흉한 몰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사진은 안 되는데 팩폭으로 조지는 건 나도 이해하니까….”
그러자 일순 눈이 마주쳤던 정은찬이 휙,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정도로 흉한 거냐.’
대기실에 붙어 있는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자 과연, 너무 울어서 화장은 줄줄 녹아내렸고 눈은 퉁퉁 부은 탓에 실눈을 뜬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시야가 3분의 1로 줄었더라.’
나 자신을 창밖으로 밀어 버리고 싶다.
그러나 데뷔까지 한 마당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메이크업을 거의 쌩얼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한 게 다행인가. 스모키 계열로 진하게 한 채로 울었으면 여기서 추하기까지 했을 텐데.
필사적으로 정신 승리 회로를 돌리고 있으려니 현호가 여전히 열감이 남아 있는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따 인터뷰 찍는다고 하니까 세수하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묵묵한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붕어는 붕어더라도 위생적인 붕어이기라도 해야지. 나는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 길 앞에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