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기대했던 순간 (1)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오르자 무대 아래가 훤해 내려다보였다.
무대는 어둡고 객석만 불이 켜진 상태여서 다들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보였다.
‘저쪽이 가족석인가.’
리허설을 할 때는 객석을 비우고 진행해서 대충 저쯤이지 않을까 예상만 했는데.
양부모님이 대체 어디서 만든 것인지 모를 슬로건까지 들고 계신 걸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 부끄럽지만 싫은 건 아니다. 내가 싫어할 자격이나 있나. 이제야 겨우 이렇게 초대해서 모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드린 것이 죄송할 뿐이었다.
‘다른 멤버들 가족들은….’
그 근방을 찾아보자 어렵지 않게 누구네 가족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무리가 있었다.
‘저건 이규민네다.’
가족이 대인원이라는 얘기는 얼핏 들은 거 같은데, 규민의 개인 정보라면 솔직히 그리 관심이 있지 않아서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누나에 형에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것 같은 동생까지. 대가족의 얼굴에 규민의 특징이 조금씩 녹아들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보고 자꾸 유 대표님 닮았다고 할 게 아니라 저는 무슨 가족들이랑 교집합처럼 생겼으면서.’
애초에 이쪽은 겟데뷔로 만나지 않았다면 접점도 없는 남인데.
흥,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마저 둘러보자 긴장한 듯한 노인이 한 분 계셨다.
‘누구 가족이지…?’
한참을 그쪽을 바라보던 나는 어르신의 손에 붙들려 있는, 아마 밖에서 팬들이 나눠 준 듯한 사설 슬로건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원이네 할아버님이시구나.’
워낙 연세가 있으셔서 닮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특유의 섬세한 인상이 조금은 비슷한 것도 같았다.
저기 저분은 전에 뵀던 현호네 시설 담당자분이시고.
은찬의 부모님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방문 예정이 없다고 했었지.
한번 우르르 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해외에서 응원 중이라던 영인이네 가족까지.
주혜성도 그렇고 못 온 가족들도 많아서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이제 곧 시작이다.’
바닥의 신호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아래서 부지런하게 뛰어다니던 스태프들이 동작을 멈췄다.
이제 머리 위의 조명이 켜지면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
“스탠바이, 슛!”
촬영 감독의 신호와 함께 객석의 불도 마저 꺼지고는 등 뒤의 스크린이 켜졌다.
“헉, 시작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화질 나쁜 홈 카메라 같은 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10년은 족히 넘은 듯한 오래된 영상 속 주인공은 나였다.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았던 학교 예술제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14살의 나.
친구들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이는 나에게서 노이즈와 함께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지직…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직… 제가 제일… 지직… 잘하는 건 이거인 것 같아서….]
연습실에서의 규민이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열일곱쯤 되었을까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곧바로 넘어간 화면은 이제 혜성의 차례였다. 이제는 소속사 자체가 망해서 저작권도 함께 날아가 버린 자작 콘텐츠의 편집본이었다.
[지직… 지직… 자신 있으세요?]
[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으니 지치지직… 직…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뮤직비디오 세트장을 배경으로 인사하는 혜성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건 스튜디오 녹음실에 있는 듯한 하연과 은찬이었다.
[배고프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하연이 내뱉은 문장에 객석 전체가 웃음으로 들썩였다.
[편의점 갈래?]
[응.]
[그럼 가기 전에 훅 한 번만 더 녹음해 보고.]
[아.]
은찬의 익숙한 완벽주의자적 모먼트에 다시금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오고, 그 이후로 주욱, 현호의 소속사 오디션 영상과 영인의 커버 영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긴 오프닝을 마무리 지은 건.
[Rolling paper]
각자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은 롤링 페이퍼였다.
무대의 컨셉은 졸업.
각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두 문장으로 정리해서 적도록 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물 챙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더 잘될 거라고 의심치 않는 친구]
[My muse]
[└ 외국인 줄;]
[└ 외국에서도 이렇게 안 해요]
어지럽게 섞인 글씨들이 사라지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태복 수련관 뒤편의 해변을 배경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받고 곧바로 다른 멤버에게로 토스하듯 던진다.
한 번씩 화면이 멤버들을 비춘 후에야 스크린이 검어지며 무대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Good bye]
마침내 곡 제목이 칠판 형태의 스크린에 새겨진 그때 전주가 시작됐다.
“와, 미친.”
조명이 켜지고, 우리가 준비한 의상을 확인한 방청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친. 저거 K과고 교복 아니야?”
“선진예고랑 문화예고는 알겠는데 다른 교복은 어디지?”
그냥 평범한 교복으로는 심심할 것 같아서.
일부러 단체복으로 제공했던 교복은 패스하고 각자 자신이 입었던 교복을 공수해 오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다들 각자의 학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놀라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은찬이었다.
‘……?’
‘형은 아이돌을 왜 하는 거예요?’
은찬이 가져온 교복에 새겨진 교표가 교표였기 때문이었다.
[K 과학 고등학교]
애들이 죄 2학년까지만 하고 조기 졸업 해 버려서 3학년은 대학교에서 보낸다는 설이 있는 명문고였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심플하게 대답하기에는 진학한 대학도 범상치 않았다.
[H 대학교 기계 공학과]
학생증 구경 한 번만 해 보자고 우르르 달려드는 바람에 체크 카드를 겸용해서 만든 카드를 은찬은 1시간 이상 빼앗긴 채로 있어야 했다.
예고를 나온 건 나와 주혜성 둘뿐. 해외 고등학교를 나온 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넷은 일반고 출신이었다.
호주에서부터 항공 특송으로 배송을 부탁한 영인 말고는 다들 어렵지 않게 교복을 구할 수 있었다.
‘미자 두 놈들은 아직 졸업도 못 한 상황이니까.’
은찬의 생각도 못 한 고학력에 놀란 규민이 ‘전 수능도 안 봤어요. 늦잠 자서.’ 같은 헛소리를 한 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짧은 전주가 끝나고 드디어.
우리 막내가 음색을 과시할 차례였다.
[한마디만 더하면 이대로 작별일 것 같아서-]
[Seek and Hide. 슬쩍 손을 숨기고 뒷걸음질 쳐.]
확실히 부드러우면서도 귓속 깊숙이까지 꽂히는 음색에 시선이 단숨에 지원에게로 쏠렸다.
[네가 찾아 주길 바라는 이 맘. 가끔은 도망치고 싶지만.]
[알 수 없는 Secret 내게 말해 줘-]
뒤이은 혜성도 서브 보컬로서 충분한 역량을 지닌 덕에 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연결되었다.
[오늘의 나는 여기서 Good bye.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안녕, 안녕, 안녕, 인사를 하자.]
장난스러운 인상으로 무대 위에 올라 단숨에 모두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 영인까지.
전체적으로 청량하면서도 듣기 쉬운 팝 곡으로 만드느라 은찬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
처음 기획을 전달했을 때 은찬 반응이 어땠더라.
레퍼런스로 활용할 만한 청량, 청춘 컨셉의 곡을 들려주자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굳었다.
대부분 걸 그룹 곡들이었기 때문에 더 당황했을 것도 있다만. 잠시 후 은찬이 진심이냐는 듯 본인의 기존 자작곡들 레퍼런스를 들려준 순간 다들 참지 못하고 웃었다.
‘지금 나한테 진짜로 이런 걸 만들어달라는 거야?’
은찬의 기존 작업곡 대부분이 드릴이나 붐뱁 같은 강렬한 랩에 어울리는 비트였기 때문에 청량 컨셉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한번 해 보고 정 안 되면 제작진한테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컨셉 자체는 굽히고 싶지 않아서 조금 세게 말했더니 그게 은찬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누가 못 한대?’
다행히 좋은 방향으로 건드린 셈이었다.
다시 폭군 모드로 돌아간 은찬은 하루는 자신에게 말도 걸지 말라며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그 결과 비슷한 멜로디이지만 변주를 준 샘플을 세 개나 들고 왔다.
이렇게 하고도 너네가 만족 못 하면 말도 안 되는 거다! 하고 결과물로 말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하면 잘하면서.’
왜 그렇게 두려운 마음이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인지.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은찬은 좀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타인과 마찰을 빚는다면 더더욱.’
짧은 회상과 함께 춤 선이 가벼운 것이 포인트인 안무까지 넘기고 나자 드디어 내 파트였다.
[아마 두렵고 또 알 수 없는 내일이지만-]
[See you again 한마디면 나를 녹여 줘.]
동선에 맞춰 앞으로 나가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자 객석 여기저기서 셔터 소리가 헬리콥터 날아가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진 step. 기울어진 목소리.]
[true and false 구분은 필요 없어 not today.]
1절이 마무리되며 무난하게 파트가 넘어가고 드디어 댄스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우리 메댄 나와라.’
묵묵히 잘 따라와 주면서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미지수인 놈이었지만.
‘얼굴이랑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이번엔 다크한 컨셉이 아니라 청량이 테마니까 표정 좀 활짝 웃어 달라고 했는데 어쩌려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바라본 순간.
“…….”
모두 괜한 걱정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One, two, three, four, five, six, seven, and you.]
[Bye Bye Bye 한 번 더 네게 외치면.]
[끝이 아니라고 해 줘. See you-]
‘뭐야, 그런 표정도 할 줄 알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새침하게 입 꾹 닫고 인상 쓰고 있었던 건데?
발그레하게 붉어진 뺨 위로 맺힌 땀방울에, 윗옷이 들썩이면서 슬쩍 드러난 복근까지.
나이대가 딱 원래 이 곡에 어울리는 나이여서 그런지 이놈을 위해 준비한 컨셉인 것 같았다.
‘무슨 셔터 소리가 인이어를 뚫고 들어와.’
객석 반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팬 사인회에서만 해도 무뚝뚝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뚝딱이 느낌으로 귀여움받았던 것 같은데.
그런 녀석이 무대 위에서 저렇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오늘의 나는 여기서 Good bye.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아마 두렵고 또 알 수 없는 내일이지만.]
[See you again 한마디면 나를 녹여 줘.]
마침내 다 같이 합창하는 파트로 무대가 마무리되자 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숨이 턱 막혀서, 입꼬리가 저절로 활짝 젖혀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한낮보다 더 눈부신 조명을 등지고 다 같이 고개를 숙인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대는 막을 내렸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