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88화 (88/224)

#088. 선택의 연속 (3)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많이 기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은 뭐가 마지막이야! 인덕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던 것을 욱여넣으며 가방을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 맛에 내가 케이 팝을 못 끊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올 때보다 가벼웠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온통 흰 벽으로 도배되어 있는 기묘한 공간. 시스템 화면과 그 화면을 채우고 있는 텍스트들뿐인 이공간에서 누군가 부지런히 텍스트를 입력하고 있었다.

“K PD, 저번에 계약한 거 어떻게 됐어? 잘되어 가?”

그 아래로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뇨, 생각만큼은 아니네요. 확 눈을 잡아끌 만한 아이템이 없나 봐요.”

“바로 장르를 틀어 버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슬슬 ‘조정’이 필요하다고 봐, 나는.”

“네, 그건 맞죠.”

“그럼 그때 얘기했던 거, 지금 바로 투입하는 걸로?”

“그럴까요?”

“응, 바로 준비하는 게 낫겠어.”

짧은 대화와 함께 대화창이 팟, 자취를 감췄다.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그 중심에 있는 당사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인수 씨 잠 잘 못 잤어요?”

“네?”

“아, 아니 지난번보다 피부가 많이 상한 거 같아서.”

“아, 아뇨. 그냥 조금 피곤했나 봐요.”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잘 자는 게 이상하긴 한데.’

나 말고 다른 녀석들도 고만고만한 상태였다. 이유는 당연히 오늘이 날이 날이기 때문이었다.

세 달 넘게 기다려온 생방송 당일, 떨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허풍이거나 너무 긴장해서 간담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일 것이었다.

“오늘 이따가 객석에 탈락한 연습생들도 게스트로 온다더라.”

규민이 대수롭지 않게 전해 들은 말에 한바탕 대기실이 뒤집어지기도 잠시.

각자 마지막까지 함께 올라오지는 못했지만 신경이 쓰였던 연습생 정도는 있는 듯 바쁘게 연락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러고 보면 대부분 같이 올라온 쪽인가.’

2차 미션 때나 3차 미션 때 같이 고생했던 녀석들이 잠깐 떠올랐다.

‘너도 오냐고 물어볼 정도로 친한 건 아니니….’

그냥 가만히 있자.

슥 지난 미션 동안 개설했던 단톡방을 훑어보던 나는 핸드폰을 끄고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 비치는 것은 약간 긴장한 표정의 나였다.

‘준비한 대로만 하면 된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임에도 이상하게 실감이 들지 않았다. 계속 남 일인 것처럼 한 발자국 떨어진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곧 스탠바이 해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화장실 다녀오실 분 다녀오세요~”

스태프의 말에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온수로 녹일 겸 화장실로 향했다.

‘금방 다녀올 거니까….’

관계자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한 곳뿐이었던 탓에 갈 길이 꽤 멀었다.

걸음을 서둘러 빨리 다녀오려던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더 잘되려고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냥… 모르겠어요. 무대에 서는 건 저인데 왜 결정을 제가 할 수가 없는지…. 이게 뭘 위한 건지도 모르겠고,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누구지?

한 명은 목소리가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지경이 된 비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공민형…?’

끝이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낮은 목소리. 음색이 꽤 특이한 편이라 다른 사람으로 헷갈리기도 힘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내 일인데 왜 내가 결정할 수가 없냐니. 하차가 역시 본인 의지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던 건가?

나도 모르게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발걸음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쪽에 멈추고 말았다.

[관계자용 대기실(3)]

[비안]

호실 아래에는 비안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뭔가 제작진이나 소속사 쪽에서 압력을 넣은 게 있었나?’

4차 미션에서의 공민형은 내내 여유 있는 척했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있을 때의 초조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일단 게스트석으로 가자, 곧 촬영 시작이니까…. 나도 곧 무대 쪽으로 합류해 봐야 해서 좀 있다 나가야 하거든?”

안에서 잠시 부스럭부스럭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리며 그대로 대화의 주인공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음?”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나는 수더분한 표정을 짓고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꾸벅 고개를 숙이자 앞서 나온 공민형이 가증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얘는 또 왜 이래.’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왜 불씨가 나에게로 튄 건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너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거 짜증 나.”

“뭐?”

당황스러운 발언에 눈썹을 움찔거리자 비안이 재빨리 나와 공민형 사이를 막아섰다.

“음~ 간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천천히.”

비안이 애써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내가 뭘 모르는 척하는데?”

나도 답답해서 왜 그러는지 알고나 싶다는 투로 대답하자 공민형이 하,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그게 짜증 난다고.”

“뭔지 말이나 해야 알아들을 거 아냐.”

결국 비안이 공민형의 등을 떠밀어 다시 대기실로 밀어 넣었다.

“아유, 또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네! 아! 민형아, 내가 아까 전해 준다고 해 놓고 깜빡한 게 있거든? 잠깐만 들어가서 다시 얘기할까? 인수 연습생은 곧 무대 시작일 텐데 얼른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덩치가 작은 것도 아닌 20대들을 사이에 두고 진땀을 뻘뻘 흘리는 비안이 안쓰러워 보였다.

‘여기서 고집을 부려 봤자 내 컨디션만 망치겠네.’

나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네, 잠깐 화장실 들르려던 길이었어요. 이따 뵙겠습니다.”

꾸벅 다시 고개를 숙이고 복도 반대편으로 향하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러니까 대체 왜….’

비안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MC니까 제작진 측의 뒷사정을 다른 출연진보다 잘 알고 있을 수는 있겠다.

무대를 앞두고 느닷없이 뺨을 맞은 꼴이 된 나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출연진 대기실로 돌아왔다.

“뭐야, 나한테는 무슨 화장실에서 살 거냐고 그렇게 뭐라 해 놓고 너도 늦었네.”

대기실로 합류하자마자 규민이 뭐라 쫑알쫑알했지만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찝찝하게….’

촬영 초기부터 지금까지, 다른 연습생들의 순위가 계속 오르내리는 동안 내 순위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공개 투표가 시작되기 전부터 압도적인 득표율을 자랑했던 만큼 특혜를 받아 여기까지 올라온 것일 리는 없었다.

‘애초에 외부 투표 시작되기 전까지 난 어그로용으로만 사용되고 통편집이었으니까.’

내가 편집에서 비중을 늘리기 시작한 건 4화쯤부터.

그 이후 잠시 비중이 늘어나나 했다가 10화에서 다시 통편집 수준이 되었으니 그마저도 특혜라고 볼 순 없었다.

‘애초에 단순 출연 비중으로만 따지면 나보다 더 많이 나온 녀석들이 한둘이 아닌데….’

마선경도 유 대표도 내내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였고.

‘뭐냐고, 진짜….’

잠시 표정을 굳히고 있으니 다른 멤버들이 신경 쓰이기라도 한 건지 옆에서 계속 기웃거렸다.

“형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지원이 선발대로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는 통에 아차, 정신이 확 들었다.

“아냐. 잠깐 피곤해서 딴생각 좀 하느라.”

그러자 규민이 속도 모르고 농담을 했다.

“너 그렇게 눈에 힘주고 있으면 진짜 유 대표님이랑 닮았다니까?”

“무슨 헛소리야, 진짜….”

내가 규민을 경멸을 담아 노려봐 주자 지원이 풋 웃음을 터트리며 겨우 분위기가 풀어졌다.

방식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굳어 있을 때 상황을 최대한 유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긴 있었다.

“이제 진짜 겟데뷔로서는 마지막이니까 화이팅 한번 하고 이동할까요?”

의상 완료, 메이크업에 헤어 세팅도 완료.

남은 건 나가서 최선을 다한 결과를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네!”

“응!”

하나둘 옹기종기 모여 원을 만들고 가운데로 손을 모으자 하나하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키운 우리 애들.’

솔직히 잘 실감이 나진 않았다. 이들을 하나로 모은 건 나지만, 키웠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과장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멤버대로 데뷔할 수 있다면, 최소한 서로 오합지졸처럼 흩어져서 일을 그르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규민은 짜증 나긴 하지만 팀에 필요한 인물이다. 지금처럼 멤버들 모두 오래도록 알아 온 사이가 아니라 급하게 한 식구로 묶인 상황이라면 더더욱.

본인만 챙기는 게 아니라 다른 멤버들 간의 긴장도 조율할 줄 알고.

지원은 민폐다, 울기만 한다 욕을 먹었어도 무대 위에서는 이목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비주얼도, 음색도 강점이고.’

음색이 뭐 별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룹의 특색을 각인시키는 건 결국 음색이다.

비주얼도 중요하긴 하지만 아이돌이 복합적인 퍼포머라고 해도 근본은 가수.

음원 승부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한 지원의 장점이 빛을 잃을 날은 없었다.

정은찬은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플 지경이고 박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내게 당장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신경 뺏겨 있을 시간 없어.’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같이 모인 이 멤버의 최선을 보여 주는 것.

‘나머지는 끝나고 생각하자.’

손등이 차곡차곡 쌓인 위로 마지막으로 손을 얹자 다들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구호는 뭘로 해요?”

“그러게. 우리 아직 팀 이름도 없는데.”

“…팀 블루블루블루 화이팅, 같은 건 너무 유치한가?”

주혜성이 던진 제안에 모두가 잠시 흐린 눈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냥 팀 블루 화이팅으로 해요.”

“그래, 그게 낫겠다.”

결국 보다 못한 은찬이 나서서 정리한 후에야 최대한 깔끔한 구호로 결정되었다.

“그럼 팀 블루는 인수가 하는 건가?”

곧바로 느닷없이 화살이 나에게로 오는 바람에 나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그럼 네가 해야지. 네가 리더인데.”

“아.”

집중하자, 집중.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고개를 가로젓고 흠흠 목을 가다듬자 다들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팀 블루!”

선창을 따라 외치는 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화이팅!”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던 14년의 노력이 이제는 빛을 발할 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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