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선택의 연속 (2)
[- 지원아ㅠㅠㅠㅠㅠㅠ 아 애기 너무 긴장해 가지고 내가 죄짓는 기분인데 아니아니아니 누나가 싫다는 게 아니고 아니ㅠㅠㅠㅠㅠㅠ]
[- 지워니 차례 끝나고 책상 뿌수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다 사람이 어떻게 유지원…? 아기 솜사탕이 걸어 다녀요 엄마 ㅠㅠㅠㅠㅠ]
[@fa_89834921]
[무대 위에서는 좀 수줍긴 해도 당당하게 잘하는 거 같았는데ㅋㅋㅋㅋ 사람 유지원으로 만나니까 진짜 너무 애기 같다 더 좋아짐]
적정했던 놈들 중 하나인 지원도 나름 귀여운 모습으로 잘 봐준 모양이었다.
좋은 소리만 들을 수는 없는 것이 이 바닥의 생태계이니만큼 어그로를 끄는 악플도 있었다.
‘중요한 건 대세가 아무튼 귀엽다인 거고.’
마음이 놓이고 나니 그다음으로 신경 쓰이는 인물이 있었다.
정작 제일 긴장해서 문제였던 정은찬은 눈물 나는 특훈 끝에 무난무난하게 마쳤는데.
‘…솔직히 여전히 제일 마음이 안 놓이는 놈이기도 하고.’
실력이야 보증된 놈이지만 데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 언제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말솜씨는 말해서 뭐 해. 입을 열면 열수록 마이너스인 마당에 내가 하나하나 케어해 줄 수 없는 상황인 것이 답답했다.
‘일단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팬이 실망하거나 기분 나빠 보였던 적은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기를 찾아본 나는 공유가 3천 회를 넘어선 영상을 하나 발견하고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열받아서가 아니라 나름 기특하고 웃겨서.
‘오실 때 어떻게 오셨어요?’
‘저 지하철 타고 왔어요!’
‘지하철이면 어디서 오신 거예요?’
‘용인에서 왔어요!’
‘아 그 XX랜드….’
‘아, 그 동네는 아닌데… XX동이에요! 수원이랑 가까워요.’
‘아… 수원이랑 가까우면 수원은 자주 다니세요?’
‘어, 제가 대학이 그쪽이어서….’
‘대학생이에요? 몇 학년이세요?’
‘저 이제 2학년이요!’
‘전공은….’
‘다음으로 이동하실게요~’
‘헉, 아, 네네.’
대화가 어색하게 끊기고 침묵이 이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더니만.
대화가 끊어지면 안 된다! 에 집중한 것인지 대국민 호구 조사가 따로 없었다.
그걸 한 명한테 한 것도 아니고 온 팬들에게 다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웃긴 후기들이 속출했다.
[- 팬싸 가서 내 돌 신상을 캐려고 한 적은 있었지 내가 신상을 털리고 올 줄은 몰랐는데]
[- 질문 스무고개도 아니고 ㅠㅠㅠㅠㅠㅠㅠ 누가 쟤한테 팬싸 저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 줬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겟데뷔 코어 시청자 통계 자료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인물: 제현호]
[└ 수상하리만치 잘생긴 통계 조사원]
[└ 반박 불가다ㅅㅂ 나도 오늘 내 동생 다음 주에 여행 가는 것까지 다 말하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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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현호 팬싸 후기 (+87)
[본문]
나 오늘 원래 다른 멤 볼 생각에 두근두근하면서 갔는데 느닷없이 제현호한테 확 꽂혀 가지고 돌아왔잖아잘생긴 것도 잘생긴 건데 무슨 서베이 봇도 아니고ㅠㅠㅠ 계속 말 안 끊기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짠했음웃긴데 열심히 하는 게 보이니까 웃을 수도 없고 제현호 거쳐 간 팬들 다 진정 안 돼서 어깨 떨면서 넘어감(동영상 링크)
너무 내 신상인 건 잘랐어
이제 나와 현호는 내가 다음 학기에 재수강할 거 세 개나 되는 것도 아는 사이다
[댓글]
[- 아 습알 니 얘기를 하라고 니 얘기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내 얘기를 듣고 싶으면 다음에도 오라는 고도의 전략일 수도]
[└ 그 정도 빅 픽처를 그릴 수 있는 애였으면 내 전공 교수님이 학점을 잘 주는지 안 주는지도 안 물어봤을 듯]
[- 얘 미니 팬 미팅에서 표정 구기고 있는다고 빠혐 논란 좀 있지 않았나?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였나?]
[└ 그랬던 듯 빠혐일 수가 없음 오늘 거기서 팬한테 말 제일 많이 시킨 게 걔일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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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종종 말이 나왔던 태도 논란도 한 방에 잠재우는 효과까지 있었다.
주혜성이야 뭐, 짬이 있어서 가장 안정적으로 팬싸에서 해야 할 일-질문에 성심껏 대답하고 시키는 거 해 주고 문제 발언 안 하기-을 잘했고.
박하연도 약간 긴장하긴 했지만 풋풋한 매력이 있어서 좋았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정은찬은 정 할 말 없으면 밥은 먹었냐고라도 물어보라고 했더니만 그 질문을 정말 정직하게 모두에게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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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가장 뇌를 훔치고 싶은 (예비) 아이돌 (+62)
[본문]
긴장했는지 오늘 온 팬들 전원한테 밥 뭐 먹었는지 물어봤다 함(동영상 링크)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 끄덕이는 게 개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머릿속에 전국 맛집 지도 쫙 깔려 있을 거래ㅋㅋㅋㅋㅋㅋ
[댓글]
[- 나한테만 물어본 게 아니었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댓쓰니 뭐 추천해 줬어? 급 궁금하다ㅋㅋㅋㅋㅋㅋㅋ]
[└ 나 걍 우리 회사 앞에 있는 국밥집 얘기해 줌 지방이라서 먹으러 오진 않을 듯ㅋㅋㅋㅋㅋㅋ]
[- 오늘 팬싸 후기들 왜케 웃긴 게 많냐 다들 풋풋한 연생인 거 티 나서 넘 귀엽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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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로 이어진 댓글들을 쭉 훑어보니 마음이 놓였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잠시 말없이 핸드폰만 보고 있었더니 불쑥 옆에서 이규민이 어깨를 쥐었다.
“뭐해? 서치해?”
“응. 어떤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니까.”
때때로 보지 않는 게 좋았을 반응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던 시절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뭐라는데?”
저도 오면서 내내 핸드폰만 보고 있었으면서. 자신만만한 얼굴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뭐… 다들 괜찮았던 것 같아서 안심이네.”
“그것뿐?”
“그럼 또 뭘 말해야 하는데.”
나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규민이 물고 늘어지는 사이 영인이 합류했다.
“저 진짜 잘하지 않았어요?”
이미 얼굴이 칭찬을 백 번은 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하,코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잘했더라, 현호도, 은찬 형도.”
그러자 자기 얘기가 나올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는 듯 현호가 마시고 있던 생수를 바닥에 내뿜었다.
“아, 칭찬해 주자마자.”
얼굴이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시뻘건 것이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목이 메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응 좋던데? 다음에 더 자연스러운 모습 보여 드리면 더 좋아해 주실 거야.”
제현호에게 동기 부여가 될 만한 문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주혜성이 헐레벌떡 여행용 티슈와 손수건을 꺼내는 것을 슬쩍 보고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이 어느새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인원으로 데뷔하게 되면, 앞으로 일 년간은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보내게 되겠구나.
‘…….’
아무 기대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시끄럽고 번거롭고 귀찮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잔뜩이겠지만.
‘그래도 조용한 것보다는 낫지.’
100일쯤 전만 해도 옥탑방 골방에서 오지 않는 섭외 전화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이 꿈만 같았다.
‘팀원으로 누가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게 우습게 됐네.’
무대 준비는 차근차근 잘되고 있고, 가장 걱정이었던 팬 사인회도 과정은 좀 짜증스러웠어도 무사히 클리어.
모든 게 순탄했다.
‘무서울 정도로.’
이러고 갑자기 뭐 문제 터지는 거 아니지?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괜히 시스템창을 켰다.
[어그로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사이자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개연성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당장 문제 될 만한 건… 없나.’
곧 낮음 상태로 내려가게 될 것을 경계해야 할 것 같지만, 그건 준비하는 과정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생방송 무대까지 시간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때 좀 반등해 주기를 기다려야겠지.’
그게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
한편 덩달아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던 인덕은….
“…….”
양손에 비공식 굿즈가 가득 담긴 가방과 사인회장 근처의 유명한 빵집에서 잔뜩 산 빵 봉투를 가득 들고 있었다.
“아, 오타쿠질 재밌네.”
XOXO가 자조적으로 읊은 말에 인덕은 반박할 수 없었다. 분명 처음 대기 줄에 섰을 때만 해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혹시 누구 최애세요? 공식은 아닌데 저희 중에 카메라 잘 다루는 친구 있어서 비공굿으로 뽑은 거 나눠 드리려고 가져왔거든요.’
아니, 뭐… 최애도 아닌 멤버의 비공굿… 대뜸 받기도 조금 애매하긴 한데… 더 좋아해 주는 분이 계시지 않을까. 이건 거절해야겠다 생각한 그때, 인덕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혹시 인연 님이세요?’
인덕이 나름대로 네임드 팬으로서 자리 잡아가는 동안 숱하게 본 사진과 슬로건들이었다.
‘아, 헉, 네네. 혹시 인수 최애세요?’
인덕은 거기서부터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케이팝 덕질 경력이 10년이 넘어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비슷한 미감을 공유하는 찍사는 유니콘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우리 애는 발캠으로 찍어도 얼굴 천재이긴 한데! 이게 아니, 더 예쁘고 잘생기게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자꾸 이상한 보정 떡칠로 원본을 훼손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냥 손을 대지 마! 원본으로 냅둬!’
승재는 정면이나 왼쪽 반측으로 찍을 때 특유의 날티 나는 인상이 매력으로 사는데.
자꾸 콧대는 잘 보이지도 않게 노출은 잔뜩 늘려서 화면을 날린 채로 정면에서 찍어 대니 애를 넙데데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나마 미모에 돌아 버린 XOXO가 가장 마음에 드는 미감을 가진 찍사였건만.
‘인연’은 그런 인덕 앞에 나타난 유니콘 같은 계정이었다.
‘와…. 생각보다 어리다.’
올리는 사진 보니 웬만한 짬이 아니라 자신과 동갑이거나 약간 더 많을 줄 알았는데.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의 주인공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어, 네네! 제가 인연이에요!’
인덕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린 채로 외쳤다.
‘저는 ‘인수 덕질 하는 사람’인데요, 혹시 아시나 싶어서….’
‘헐, 당연히 알죠! 와! 너무 반갑다!’
그대로 의기투합해서 인수에 대해서 떠드느라 무리를 했다.
정작 팬 사인회가 시작되고 나서는 사진을 건지고 준비한 질문지를 건네는 거로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좋아….’
인덕은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대화가 통하는 덕질 메이트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새겼다.
게다가 인수도 오늘 완벽 그 자체였다.
‘실제로 보니까 생각보다 유한 인상이라서 놀랐다….’
화면에서는 내내 완벽주의적인 모습으로 나와서 더 딱딱한 느낌이지 않을까 했는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거나 사인에 부탁하지도 않은 멘트나 하트를 넣어 주거나, 누가 인생 2회차 같은 아이돌 아니랄까 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슬쩍 생방 무대 스포를 부탁하자 돌아왔던 대답에 아직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