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선택의 연속 (1)
‘실수하면 진짜 큰일 나겠다.’
그제야 나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두려움보다도 가수다운 활동을 한다는 생각에 설렘이 앞섰다.
거기다 이 천방지축들을 데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마무리 지어야 하니 책임감이 더 무겁게 다가왔는데.
새삼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이제야 빡 들었다.
‘하지만….’
손끝이 잠깐 차가워지기도 잠시, 주목받는 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 왔던 일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조차 트집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 채널이나 계정이 한둘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상황인 건 맞긴 하지만.
곧 나를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준다는 실감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자.’
다른 녀석들 걱정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나와 내 팬들을 생각할 차례였다.
***
결국 모든 스케줄이 끝났을 때는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팬 사인회가 끝나고 나서는 곧바로 무슨 지상파 연예 소식통 프로그램 인터뷰를 찍어야 한다고 갑자기 통보를 받았다.
‘저희 바로 태복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요?’
이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미리 얘기했으면 이것도 준비를 해왔을 텐데.
갑자기 인터뷰를 하라고 해도 인터뷰어는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요, 별 얘기 안 하고 그냥 인사만 하는 거니까. 얼른 이동하시죠!’
사인회 일정을 마친 팀원들의 상태는 모두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그나마 침착한 것이 의외로 주혜성. 영인은 체력은 쌩쌩해 보였으나 정신력이 달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하지….’
팬들의 요청을 하나라도 더 들어주기 위해 인당 얼마 배정되지도 않은 시간을 번번이 초과해 가며 무리를 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말리고 싶었지만 나 또한 비슷한 처지였다.
앞 순서에 입장한 분들이 유달리 좀 초췌해 보여서 혹시나 했는데.
여름밤이라 춥진 않다고 해도 전날 밤부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게 철면피였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추웠어요!’
제가 안 괜찮아요…. 오늘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내주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확 들어서 나 또한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팬싸 후기는 엄청 올라오겠군.’
정말 기력의 바닥까지 불태운 상태인데 지상파 인터뷰를 하라고.
그러나 못 한다고 뻗어 버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거절할 수 있는 위치였다고 해도 못 했겠지.’
그랬다가는 무슨 ‘기자들의 시크릿 노트’같은 A양, B군, C씨 등등 오만 찌라시를 늘어놓는 프로그램에서 귀가 아프도록 씹힐 터다.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인 주제에 콧대만 높아서 지상파 취재를 거절한다고.
그럴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터뷰라기보다도 정말 그냥 시청자분들께 간단한 인사를 드리는 촬영이었다는 점이다.
각자 짧은 자기소개와 팀 소개를 마치고 겨우 자유의 몸이 되자 다들 긴장이 쫙 풀렸다.
“…….”
사람이 너무 지치면 힘들다는 말도 못 하게 된다고. 오늘 각자 평소에 말하던 발화량의 20배는 소화했을 텐데. 목까지 반쯤 쉰 상태로 차량에 몸을 구겨 넣었다.
“도착 예정 시간이 몇 시 정도예요?”
거기에 하필 도로도 꽉 막힌 시간이라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
나올 때만 해도 여유분으로 가득 채워 놨던 혜성의 가방 속 비상식량들도 바닥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중간에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아침을 거른 건 시작에 불과했다.
점심은 스케줄상 도저히 안 될 테니 간설 무대와 짧은 이벤트까지 소화하고 나면 밥을 먹을 짬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시간을 느닷없이 인터뷰가 가로채 버렸다. 인터뷰 자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모든 방송이 그렇듯 대기 시간이 길었다.
“…….”
그럼 그 시간에 밥 먹이면 되잖아? 급히 김밥이라도 사 오겠다며 대기실을 비운 스태프는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배고파 죽겠다….’
아침부터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왔는데 점심도 걸렀으니 허기가 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겨우 인터뷰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순간, 김밥을 사러 나갔던 스태프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타이밍이 도저히 안 맞을 것 같아서, 일단 주문 취소하고 그냥 왔어요.’
‘네?’
‘자자, 지금 빨리 출발하셔야 해요. 퇴근 시간 껴서 고속도로 타는 곳까지만 가는 데도 한참 걸릴 거라서.’
거기에 뻔한 거짓말이 이어졌다.
‘저희도 바빠서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이따 들어가서 바로 식사하는 거로 하시죠.’
거짓말. 입가에 묻은 김 가루가 훤히 눈에 보였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태복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실으니 슬슬 화가 났다.
스케줄 때문에 정신없는 건 모두가 감당해야 할 문제라지만, 이건 연습생들을 무슨 짐짝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무단 이탈 건 때문에 단단히 찍히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내가 흥행 공신인 건 변하지 않을 텐데.
답답한 와중 혜성이 빈 박스를 하나 꺼내고는 그 아래에서 박스를 하나 더 끄집어냈다.
“혹시 이럴까 봐 내가 여유 있게 가져오긴 했거든? 칼로리바 더 먹을 사람?”
“대박.”
“그렇게 가지고 다니면 안 무거워요?”
다들 놀라면서도 하나씩 집어 가는 손길이 무척 재빨랐다. 주혜성이 보람이 넘쳐 보이는 얼굴로 겨우 웃었다.
“아냐, 그렇게 안 무거워.”
근력이 엄청 좋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에 행복해하는 듯하여 더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뭐…. 본인이 행복하다면 된 거겠지.’
나는 어플로 현재 위치로 잡히는 지역에서 합숙소인 태복 수련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했다.
[남은 시간: 3시간 45분]
왜 아직도 3시간 밑으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데.
이마를 감싸 쥔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순간 눈에 띄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다음 휴게소까지 35분]
‘오….’
이 정도는 되겠지.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운전석에 앉은 스태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후.
휴게소에 차량이 정차했을 때는 8시가 넘어 있었다.
그보다 좀 더 빨리 들르면 안 되냐고 닦달해 보았지만 길이 밀리는 구간은 일단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화장실은 들러야 하니까. 겨우 수납되어 있던 몸을 펴서 주차장에 발을 디디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뭐 먹지. 여기 뭐가 유명하더라.”
서둘러 둘러본 휴게소는 아쉽게도 휴게소 특식 코너는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성수기는 지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연 가게도 좀 되는 거 같은데.”
그래도 기본적인 분식을 판매하는 식당은 운영 중이었다. 김치우동에 돈가스, 소고기국밥은 물론 버터감자까지 메뉴를 긁어모았다.
“와 나 지금이면 진짜 10인분 컷 가능할 것 같아.”
“풋, 하하….”
“아니, 진짜 농담이 아니라요.”
가장 인적 드문 자리에 이 밤에 먹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 나니 겨우 얼굴들이 풀어져 있었다.
“아, 탄산 땡긴다.”
“내가 사 올까?”
“어, 아뇨. 그냥 같이 갈까요?”
“저쪽에 편의점 있었던 것 같지?”
한바탕 그릇을 비우고 배를 채우고 나자 슬슬 다른 데로 눈이 돌아간 모양이었다.
결국 제작진의 법인 카드를 들고 편의점에 방문한 멤버들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늘 고생한 게 너무 많아서인지 보상 심리라도 발동한 거 같았다.
“아, 아이스크림 맛있겠다.”
“1+1이래. 그럼 4+4로 사면 되나?”
“하나만 먹게요?”
“아, 하나만 먹는 게 아니야?”
“저도 두 개 먹어도 되나요?”
결국 내가 나서서 선을 정리했다.
“숙소 가서 유산소 뛰고 싶은 거 아니면 적당히 먹어야겠지?”
“에이~”
초 치는 소리에 영인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지만 순순히 하나를 내려놓았다.
‘웬일로….’
의외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영인이 지적했다.
“방금 웬일로? 라고 생각했죠?”
“아니, 안 했는데.”
“했으면서~”
“몰라. 가서 계산이나 해.”
긴 길을 마저 가면서 먹을 간식들도 몇 개 담아서 결제하고 나니 편의점에서 장이라도 본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인원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죠.”
스태프에게 태연하게 카드를 돌려주고 나니 차 안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먹을 거 다 먹으니 힘이 났다 이거지.
“아니, 근데 다들 어떻게 카메라를 그렇게 잘 찾아요?”
하연이 내내 궁금했다는 듯 묻자 규민이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웃었다.
“일단 들어가면 어디의 누군가 카메라 들고 있다, 그건 보이지 않아?”
“아, 네네.”
“그중에 나를 뚫어져라 계속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앞에 사람이 있는데….”
“에이, 이동하면서 시간 다 조금씩 생기는데 그때 파악하는 거지, 그건.”
옆에서 제현호가 말없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꼴이 상당히 우스웠다.
‘아까 어땠더라.’
눈치가 빠른 영인과 규민은 사인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해졌다.
‘너무 익숙해져서 문제였지.’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팬 사인회가 끝나기 무섭게 SNS에는 자신이 이규민의 일반인 여자 친구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수십 명씩 등장했다.
[@first_day_3421]
[이규민 이 FOX를 어쩌면 좋아요………… 출구 없다고 온몸으로 드러누워서 막아 버리네]
‘이따 남친이 데리러 와요? 그럼 우리는 데리러 오기 전까지만 사귀는 건가?’
팬들이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 다른 멤버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 규민만 천연덕스럽게 받아친 것이다.
‘누나 저 애교도 잘하는데 안 보고 가도 괜찮아요?’
팬들이 긴장해서 냅다 질문지만 내밀고 굳어 버린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 아 다 비키라고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라고(경쟁자 83,246,736,478 뒤에 번호표를 뽑으며)]
[@flyingkichinpan]
[이규민 X발 미쳤나ㅠㅠㅠㅠ 제일 좋아하는 플리 곡 뭐냐고 물어봤는데 나는 뭘 좋아하냬…. 그래서 대충 내 플리에 있는 거 아무거나 급히 얘기해 줬는데 자기도 오늘부터 그거로 할 거래ㅠㅠㅠ]
합숙소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계속 뭘 그렇게 외우고 있나 했더니.
저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지나치면 마이너스요, 지쳐서 한두 명한테만 했다가는 차별한다고 욕만 얻어먹을 짓이었을 텐데.
200명이나 되는 팬들, 그것도 그중 상당수는 자신의 팬도 아닌 사람들을 상대로 있는 힘을 쥐어짜 내서 어필한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네.’
덕분에 본인은 지금 기절 직전의 상태인 것 같지만.
나머지 녀석들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