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기다리고 있는 건 (1)
“…같은 팀 돼서, 다행이라고요.”
웬일로…? 4차 미션 때 고생을 많이 했나? 그동안 어쨌든 전략적으로 한배를 타기로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협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겠지.’
놈이 무대에 오르고자 하는 목적이 따로 있는 이상 여전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제 몫은 확실히 하는 녀석이니 구태여 모처럼 보내온 긍정적인 신호를 뭉개고 싶진 않았다.
“왜, 다른 팀 가 보니까 내가 얼마나 잘 챙겨 준 건지 새삼 느껴졌어?”
그래도 이 정도 농담은 괜찮겠지. 웃으며 대답했으나….
“……?”
이후로 아무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뭐냐.’
아직 이놈한테는 이 정도 농담도 무리였나. 거기다 대고 왜 대답 안 해 주냐고 물어보기도 좀 어색해서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이번에도 잘해 보자.”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여간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투덜거리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쨍한 햇살이 거실 창 너머로 들이쳐 저절로 눈이 떠졌다.
“…?”
양치도 하고 냉수로 정신도 차릴 겸 거실로 나온 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세 놈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야, 여기서 뭐 하는데.”
내가 화들짝 놀라자 가장 왼편에 앉아 있었던 규민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따 스태프 오면 바로 방 바꿔 달라고 할 거야.”
“뭐?”
그러고는 슥 턱짓으로 거실 창을 가리키길래 그쪽을 보니 과연, 얇디얇은 커튼을 뚫고 찬란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여기 창문 자외선 차단 하나도 안 돼. 해 뜨자마자 타 죽는 줄 알았다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세 명은 아예 온몸을 이불로 덮은 채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있었다.
“그래서 저 꼴인 거야?”
“살 다 타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것치고 위에 뭘 너무 많이 올려놓은 거 아니냐.
나는 수북하게 쌓여 있는 옷의 무덤 속에서 발만 빼꼼 내밀고 누워 있는 지원을 보며 어휴, 한숨을 쉬었다.
“아침 배식 슬슬 시작하겠네. 일어나. 밥 먹으러 가야지.”
멤버들을 적당히 다독인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이라고 하기엔 조리 기구는 전자레인지뿐이었지만… 멀쩡히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미리 채워 둔 듯한, 라벨을 제거한 생수병과 일전의 지옥에서 공수해 온 듯한 맛의 PPL 음료가 가득했다.
“우욱.”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라벨에 쓰여 있는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는 의미가 진심으로 와닿았다.
“10분 후에 내려갈 거니까 정신 차리고 준비들 해요.”
지원과 마찬가지로 잠에 취해 있는 혜성을 흔들어 깨우자 이불의 무덤에서 움찔움찔 나머지 한 명이 마저 잠투정을 했다.
“아… 10분만 더…. 흠냐….”
10분만 더는 얼어 죽을. 나는 이불 아래로 드러난 영인의 엉덩이를 발등으로 밀어 이불 밖으로 밀어냈다.
“악.”
영인의 짧은 비명 소리에 결국 지원까지 눈을 떴다.
이후 모두가 숙소를 나설 준비를 마쳤을 때는 20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
“그럼 이걸로 컨셉은 다들 OK 한 거지?”
스태프에게 최종 기획안을 전달하기에 앞서 확인차 묻자 다들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네!”
“엉~”
“응…!”
각자 한마디씩 베리에이션이 있어서 중구난방이었지만 어쨌든 더 멋진 무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그럼 안무는 혜성이 형이랑 현호가 우선 짜 본 다음에 트레이너 쌤한테 피드백 요청해서 확정하는 거로 하고. 내일까지 은찬 형이 음원 만들어서 주면 각자 파트 나눠서 가사 붙이는 쪽으로 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긴 멤버들인 만큼, 나중이나 뒤에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한번 교통정리를 하자 영인이 쭉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얍얍.”
“그럼 이제 남은 거는….”
나는 조금 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멘토단과 함께 스태프들이 연습실에 방문해서 공지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한 번쯤은 할 거 같긴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할 줄이야….’
일주일도 안 되는 여유 시간을 남겨 두고 스태프들이 느닷없이 고지한 것은 다름 아닌 팬 사인회였다.
PPL이었던 떡볶이 세트를 사 먹으면 받을 수 있는 추첨권으로 200명을 선발하여 진행하는 이벤트라나.
‘어차피 팬 사인회는 데뷔하고 나면 많이 하게 될 테니까 미리 예습이라고 생각하고 경험해 봐서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팬들도 추첨에 응모할 시간이 없어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어 보였다.
게다가 장소도 따로 대관한 어디 홀이나 소극장이 아니라 대형 쇼핑몰 중앙 광장이라니.
‘돌발 상황 터지기 딱 좋겠네.’
내 팬들만 선별되어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노출되는 건 다들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NO에서 공개 연습생으로 구른 짬이 몇 년인데 처음일 리가.
선배 그룹의 백업 댄서로 무대에 오른 후, 같은 차량을 타고 사옥으로 복귀하려다 받았던 취급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 존나 처가리고 X랄이네.’
사람이 워낙 많이 몰린 탓에 오랜 시간 기다려 준 팬분들께 인사를 드릴 여유가 없었다.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뒤의 출연진까지 주차장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발이 묶일 상황이었다.
‘인수야, 빨리 형들 따라서 붙어.’
안 그래도 깍두기나 다름없는 위치인 내가 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 순간.
앞서 지나간 멤버를 찍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다들 각자 한마디씩 던지는 혼잣말이었겠지만 내게는 수십 명이 함께 꽂는 비수였다.
다른 형들은 각자 자신을 찍어 주는 팬들을 찾아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지만 나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이런 경험을 했던 덕에 우리가 참가할 팬 사인회가 절망 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본인 팬이 아닌 사람의 무관심한 태도에 괜히 상처를 받는다거나… 우리에게 관심 없는 일반 이용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듣는다거나….’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흔히 일어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나보다도 다른 팀원들이 더 걱정인데. 내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표정이 붕 떠 있었다.
“하… 팬싸 하면 내가 또 전문이지.”
해 본 적도 없을 거면서, 이규민이 헛소리를 하는 사이 유달리 긴장한 표정으로 보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하다못해 유지원도 그렇게 긴장한 것 같진 않은데….’
바로 우리의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정은찬이었다.
“많이 걱정돼요?”
은찬의 표정을 살피며 묻자 은찬이 여전히 속을 알 수 없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전혀↗?”
“푸핫.”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 끝이 갈라지는 바람에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풋… 앗. 흠흠.”
반사적으로 다들 어깨를 떨며 웃음을 삼키다가 은찬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무대 방청이나 미니 팬 미팅이랑은 좀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문제 될 만한 몇 가지 행동만 조심하면 돼요.”
그러자 영인이 슥 손을 들었다. 나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이 팬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반응하면 되니까….”
영인이 지지 않고 반대편 손까지 번쩍 들었다. 하연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영인이가 뭐 하고 싶은 말 있다는데요?”
“응, 그냥 삼키라고 하자.”
영인이 이렇게 손을 들어서 발언권을 요청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과정이 있었다.
‘저희 비트에 두두둥, 두두두둥, 이런 거 넣으면 안 돼요?’
‘그 불꽃 나오는 그거 하면 안 되나? 진짜 임팩트 있을 거 같은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데 와이어 액션 같은 거 한 번만….’
앞선 아이디어 회의에서 영인이 과하게 아스트랄한 무대 연출을 계속 제안해 은찬의 심기를 건드려 놓은 탓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었다.
‘와이어 타는 것도 연습 진짜 많이 해야 해. 설비 예산도 생각해야 하고 우리 컨셉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아아~ 그래도 마지막인데.’
결국 팀원들의 만장일치로 영인의 발언권은 압수가 됐었다.
‘너는 앞으로 말하기 전에 손 들고 허락부터 받아.’
‘헐, 완전 독재다, 독재.’
‘괜찮아. 우리가 독재하라고 했어.’
평소 영인과 사고 칠 궁리를 하는 게 적성에 제일 잘 맞아 보이는 규민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영인의 발언권을 압수하는 데 동의했다.
‘아, 형 진짜 배신이에요.’
‘하…. 세상은 원래 냉혹한 법이거든. 데뷔를 위해서라면 팀원의 입을 막을 줄도 아는 나… 조금 멋있을지도….’
저거도 같이 말 못 하게 입을 막아 버려야 하는데.
다행히 영인은 투덜거리면서도 절차를 충실히 따랐다.
“정 걱정되면 미리 한번 연습해 볼까요?”
나는 잠시 후 펼쳐질 지옥도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정된 팬 사인회는 여느 행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렬로 쭉 책상을 두고 앉아 있는 아티스트의 앞을 팬들이 한 명 한 명씩 거쳐 가며 옆으로 이동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는 내가 앉는 게 나으려나.’
순서는 그때 가서 제작진이 정해 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원과 은찬은 최대한 뒤쪽에 배치해 두는 것이 안전했다.
‘시작부터 멤버가 먼저 당황해 버리면 팬분은 더 정신이 없을 테니까.’
괜히 첫코를 잘못 끼워 전원과의 첫 만남을 안 좋은 기억으로 남길 필요는 없었다.
추첨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를 위해 얼마든 금액을 지불하고 찾아온 팬들을 당혹시키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자, 그러면, 각자 돌아가면서 해 볼게요.”
주방에 있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줄지어 서 있는 꼴이 상당히 우스웠으나 소중한 프로듀서를 위해서라면 이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첫 타자로 내가 앞에 서서 연습장을 북 찢은 종이를 내밀자 은찬이 묵묵히 싸인을 했다.
“…….”
“…….”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
“…….”
30초 정도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흐른 끝에 나는 결국 정은찬의 팬 A에서 서인수로 돌아왔다.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하시면 안 되죠!”
은찬도 지지 않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반박했다.
“워, 원래 이것저것 팬분들이 물어보는 거 아냐?”
보통은 그렇긴 한데.
팬과 아이돌의 소통은 대부분 일방통행이다. 아티스트가 하는 이야기를 팬이 듣는 방식.
‘요즘 벌룬이다, 라이브 채팅이다, 이것저것 방식이 다양해지긴 했어도… 한계가 있지.’
내 댓글이 읽힐 확률은 만분의 일이나 될까.
안 그래도 개인의 목소리가 잘 닿지 않는 팬 활동 중 팬 사인회는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아티스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그래서 대부분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 리스트를 추려 오기도 하고 한다지만….
‘아이돌이 긴장하는 만큼 팬은 더 할 테니까.’
준비해 온 말을 그대로 백지장 상태로 잊어버리고 굳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어 주는 것도 아이돌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네, 근데 가끔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럴 때 형도 아무 말 안 하고 멀뚱히 계시면 안 돼요.”
은찬이 ‘과연….’ 납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으읍, 음!! 으으읍!!”
미처 틀어막을 새도 없이, 빛나는 눈을 한 영인이 입만 다문 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