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종착역 (1)
2박 3일간의 힐링인지 정신 공격인지 모를 휴가를 마친 후 나는 본가에 잠시 들렀다.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촬영이 끝나고 바로 찾아뵙지 못해 신경이 쓰였던 것과 달리 두 분 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셨다.
“지난주에 동호회 아줌마들이랑 같이 밥 먹었는데 연희 아줌마가 방송 잘 보고 있대. 다들 너무 잘한다고 난리더라.”
“아빠 회사에서도 아드님 아니냐고 난리던데?”
겟데뷔가 전국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가족들 역시 의도치 않게 관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 같았다.
“어쩜, 갑자기 회사 나온다고 해서 우린 걱정만 잔뜩이었는데 다 생각이 있었구나?”
예, 뭐, 아무래도요…. 요 근래 시스템이 도움이 됐던 적이 솔직히 손에 꼽는 것 같은 기분이다만.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팀원들도 잘 따라 줘서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고요.”
물론 모두가 다 잘 따라 주진 않았지만요. 부모님이 유튜브로는 요리, 여행, 반려동물 정도만 보는 분들이셔서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렉카 영상 같은 거 보셨으면 걱정하셨을 테니까.’
봤는데 혹시라도 내가 상처받을까 봐 못 본 척하신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은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스포 반응도 좋은 편이네.’
무단 외출 건은 해명되었지만 여전히 나에 대한 논란과 억지 루머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괜히 신경을 빼앗기는 게 싫어 최소한으로 확인한 서치 결과는 다행히도 극찬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 올해 드라이빙곡은 이거다]
[└ 개신나 진짜ㅋㅋㅋㅋㅋ 운전하면서 틀어 놓고 추임새 넣으면서 밟으면 딱일 듯]
[└ 음원 발매 언제 해요ㅠㅠㅠㅠㅠㅠ? 궁금해 미치겠네]
[- 걍 팀 YS가 찢었음 환호성 자체가 다르더라]
[- 네 팀 중에 떼창 나온 거 연성밖에 없지 않았나?]
[└ ㅇㅇ 내 기억으로도 그런 듯]
[- 아 박탈감 느껴진다고 스포 그만하라고ㅠㅠㅠㅠㅠㅠㅠ]
[└ 지가 스포 표기되어 있는 글 들어와 놓고 난리야ㅡㅡ]
[- 청춘락밴드하이틴무비 한 편 뚝딱이었다 증맬…]
[└ 222222 후속 편 언제 나와요 나 현기증 난다고ㅠㅠㅠㅠ]
[- 멀리 왔지 돌아보면 까마득한 길… 틱… 드르륵… 멀리 왔지 돌아보면 까마득한 길… 틱… 드르륵… 멀리 왔지 돌아보면 까마득한 길… 틱… 드르륵…]
[└ 그니까 뭘 그렇게 멀리 간 거냐고 빨리 나도 들려 달라고ㅠㅠㅠㅠ]
[└ 방청 다녀온 지인들 다 이 소리밖에 안 해ㅋㅋㅋ 이게 하이라이트야?]
[└ 멀리 왔지 돌아보면 까마득한 길…]
[└ 대통령님 겟데뷔 10화를 조속히 방영하도록 법으로 제정해 주세요 ㅅㅂ 빨리요 저급함ㅠㅠㅠㅠㅠ]
[└ ㅡㅡ 저급만 보고 존나 놀랐네;]
‘이만하면… 대중 반응은 안심해도 될 것 같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경연도 슬슬 끝나 가고, 방영 속도가 촬영분을 따라잡기 직전이었다.
‘이번에 4차 미션 무대랑 순위 공개되고 나면 스페셜 편 방영한다고 했었나?’
겟데뷔 촬영의 첫 삽을 뜬 날로부터 3개월 이상 지났으니 그사이 많은 것들이 바뀔 만한 시간이었다.
‘초반에 하차한 참가자들은 슬슬 종영하는 대로 데뷔하려고 준비 중이겠지.’
영인이나 규민을 통해 전해 들은 그룹만 셋이었다. 그 외에 비밀리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나, 아직 하차하지 않은 멤버가 포함된 그룹도 있겠지.
그걸 전부 감안하면 이 프로그램 하나로 파생되는 그룹이 최소 열 그룹은 될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프로그램 흥행은 확실히 성공했다.’
남은 건 나의 데뷔와, 누구와 데뷔하느냐였다.
‘1회차 때랑 동일한 방식으로 데뷔조를 결정하려나…?’
그때도 그거 욕 엄청 먹었을 텐데. 이긴 팀에 속해 있어도 데뷔를 보장할 수 없고 개인별 득표수로도 데뷔를 확답할 수 없는 방식이었으니까.
기껏 시청률 잘 끌어 놓고 막판에 다 망치는 짓을 또….
‘할 수도 있지.’
제작진들은 겟데뷔가 한번 처참하게 망했던 프로그램이라는 걸 꿈에도 모를 테니까.
모든 건 시간이 지나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안개 속에 갇힌 채 시간이 지나 순위 발표식 당일.
셔틀 정거장에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어 더는 셔틀 운행 지원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럼 좀 일찍 말하라고!’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차를 타고 촬영지에 도착하자 처음 봤던 인원의 3분의 1로 줄어든 연습생들이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여기서 또 절반 줄어드는 건가….’
단순히 운만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처음 100여 명이 모여 있을 때와는 인상이 사뭇 달랐다.
다들 어깨에 긴장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만 간절한 건 아니니까.’
마음을 다잡고 안쪽으로 먼저 들어가 있으려던 순간.
‘어디서 왜 이상한 시선이….’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 뒤를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지원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며 묻자 지원이 시선을 피했다.
“…….”
“뭐야, 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일찍이 도착한 이규민이 느긋한 표정으로 화이팅,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나한테 뭐 서운한 거라도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상처 입은 표정을 왜 짓는 건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지원이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띠고 있으니 영인이 웃으며 정답을 알려 주었다.
“규민이 형네 놀러 갈 때 안 불러서 서운한가 봐요.”
아. 그걸 또 언제 누가 말했대? 라고 생각하고 나니 규민이 진작 SNS에 올렸던 것이 떠올랐다.
전부는 아니지만 자기도 아는 인원이 꽤 겹치는 모임에 부르지 않은 것이 어지간히도 속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저렇게 유기된 강아지처럼 파들파들 슬퍼할 일인가. 내가 주동한(?) 일은 아니지만 괜한 오해는 해소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도 갑자기 끌려간 거야. 어디 가는 줄도 몰랐어.”
다급히 변명하고 달래자니 우선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해 주자 싶었다.
“다음에 가게 되면 그때는 꼭 같이 가자.”
다음이 있을지 보장은 할 수 없었으나 공수표를 던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어, 시간 내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니까 아쉬워할 필요 없다며 지원을 달래 주기도 잠시, 안으로 입장해 달라는 스태프의 외침이 들려왔다.
“일단 들어가자. 가서 결과 확인하고 이따 촬영 끝나면 다시 얘기해.”
토닥토닥, 지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촬영장 안으로 향하자 이전과 달라진 구조의 스테이지가 보였다.
‘촬영 쉬는 틈에 그새 공사했나 보네.’
무대 뒤편에 준비된 의자는 16개. 그 개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갑습니다. 겟 데뷔 위드 미 드디어 네 번째 미션! TOP 16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저, 국민 매니저 비안과 함께합니다. 남은 여정도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안의 안내 멘트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자 장내가 온통 고요해졌다.
[글로벌 시청자와 함께하는 데뷔 서바이벌, 겟 데뷔 위드 미! 지금부터 바로 TOP 16을 공개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TOP 15부터 TOP 9까지 지금 바로 만나 보시죠.]
앞선 순위 발표식과는 달라진 진행 순서에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어차피 1위는 서인수라는 듯 1위 카드부터 오픈하고 시작했었는데….
‘설마 1위가 바뀌었나…?’
아무리 글로벌 투표로 확장되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격차가 뒤집히지는 않았을 텐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럴 리는….’
나도 모르게 신경을 빼앗긴 찰나 TOP 15부터 순차적으로 스크린에 이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TOP 15]
[제현호]
[394,324표]
‘휴….’
익숙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지난번 등수보다는 하락하긴 했지만 여기서 탈락하진 않았으니 순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새도 없이 곧바로 14위가 공개되었다.
[TOP 14]
[정은찬]
[372,165표]
[+30,000표]
이번 2위 팀이 정은찬과 유지원이 있던 피아체였던가. 정은찬의 실력이야 의심할 수 없는 수준이고.
3차 미션 때 팀에서 은찬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부끄럼쟁이 이미지로 탈바꿈시켜 준 덕분일까.
그 전까지만 해도 힙합 레이블에서 나온 프로 의식 없는 놈, 정도로 욕만 먹던 은찬은 이제 솔직하지 못한 귀여움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저쪽 조에서도 준비할 때 보니까 막내랑 맏내라고 엄청 귀여워해 주더만.’
이미지의 힘이란 참 대단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정은찬이 틱틱거릴 때마다 저 재수 없는 새끼는 뭐야? 같은 반응들이었는데.
지금 정은찬은 감정 표현이 좀 솔직하지 못해도 팀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귀염둥이, 정도의 이미지를 가져가고 있었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선을 넘는 태도는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고.
뒤이어 TOP 13에는 예상했던 중국인 연습생이 랭크되었다.
[TOP 13]
[리첸싱]
[419,240표]
‘이건 뭐 예상했으니까.’
이제 이 위로 다른 중화권 연습생이 새로 끼어들었을지 아닐지가 문제인데…. 이후로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등장해 더 신경 쓸 새 없이 다음 발표를 기다리게 되었다.
박하연 12위, 이규민 9위. 이제 남은 건 16위와 1~8위들뿐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나랑 같은 팀 해 봤던 녀석들 중에 확정적으로 16위 안에 올라온 녀석이….’
제현호, 정은찬, 박하연, 이규민인가. 지원이랑 영인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안정적으로 8위 안에 들어가 있을 것 같고.
TOP 8 안의 멤버들 간 변동이 문제인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촬영장 안을 슥 둘러보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본 나는 불현듯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안 보이는 거지?’
일정 때문에 대기실에 조금씩 늦게 합류하는 연습생이 매번 몇 명씩 나오긴 했는데,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2위를 유지해 왔던 유망주인 공민형이 촬영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내가 계속 두리번거리자 제일 먼저 눈치를 챈 규민이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누구 찾는데? 그 보부상 형?”
“아.”
나는 그제야 주혜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공민형.”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이규민이 눈썹을 까닥이며 대답했다.
“엥? 몰랐어? 걔 하차했는데. 아마 알 사람은 다 알걸?”
“뭐?”
갑작스러운 하차 소식에 당황하기도 잠시, 비안이 TOP 8부터는 한 명 한 명 불러내서 소감 발표를 시킨다고 안내하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아~ 나도 소감 발표해 보고 싶다.”
규민의 아쉬운 소리와 함께 공개된 8위는 지원이 아닌 다른 연습생이었다.
‘순위가 올라갔나?’
7위까지도 아진-공민형 라인에 붙어 있던 연습생이라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기도 잠시, 드디어 반가운 이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TOP 6]
[유지원]
[579,981표]
[+30,000표]
확실히, 지난 미션 때보다 득표수가 1.5배씩은 불어나 있었다.
‘글로벌 시청자 투표가 합산된 거치고는 그렇게 많이 늘어난 건 아닐지도….’
어쩌면 생각보다 영향이 별로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 순간, 아진을 비롯하여 아진네 라인의 3~5위가 발표되고, 공민형의 빈자리를 누가 차지했는지가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