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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69화 (69/224)

#069. 그렇게까지는 좀 (1)

떼창 건 이후에도 공민형이 호시탐탐 나에게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는 독재자 캐릭터를 내게 들이밀려고 해서 뭘 제안할 수가 없었다.

다들 아이디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중구난방으로 던지고 보는 느낌이 강해서 서로 충돌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 안에서 그나마 다들 동의할 수 있는 걸 모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남은 건 ‘너희 이 긴 시간 동안 뭐 한 거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쪽도 어떻게 나서기가 애매해져서….’

틈만 나면 공민형이 다 내 의견대로 밀어붙인다는 듯이 몰아가 버리니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영인이 제안하는 건 대부분 허무맹랑한 아이디어였고 박하연은 예스맨이었다.

‘대체 지난 미션들은 어떻게 했던 거야?’

거기서도 누군가 개고생을 하며 그럴싸한 기획으로 다듬기 위해 애썼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다른 연습생들은 나나 공민형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리고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당사자인 공민형은….

‘나는 정말 뭐든 크게 상관없으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맞출게.’

라는 개소리로 책임을 싹 피해 갔다.

‘이 새끼 무슨 다른 팀에서 보낸 스파이도 아니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정말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2위라고는 하지만 나처럼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게 아니라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표 차였다.

특히 3위부터 10위까지는 표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지라, 베네핏만으로도 순위가 여러 단계 뒤집힐 여지가 있었다.

그 말은 즉 어쨌든 공민형도 데뷔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만큼 스파이질 따위에 무대를 낭비할 여력 따윈 없다는 얘기였다.

사실 다른 루트로 데뷔가 정해져 있다거나… 그런 경우가 아니면….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퍼뜩 가능성의 폭이 넓어졌다.

오히려 탈락하는 게 더 나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겟데뷔는 물론 최근 2년간 방영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 제일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룹의 흥행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겟데뷔로 데뷔하는 그룹은 1년짜리 프로젝트성 그룹.

겟데뷔는 시청률이 잘 나온 김에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탈락하자마자 바로 완벽하게 준비된 데뷔조에 합류해서 데뷔할 예정이라면?

스파이질을 할 여유가 있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공민형은 지금까지 아진과 딱 붙어서 본인의 최선을 다해 왔다. 이제 와서 태도가 바뀔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는 한 무대를 올리는 날까지 불안 요소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조원 자체는 나쁘지 않다 싶었더니 별게 다….’

쯧,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드래프트 수준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확인한 유 대표의 표정이 영하 이하의 온도까지 식었다.

“…….”

망했다는 걸 알면서도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뒷모습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나는 태연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영인이나 규민을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모두 사형을 앞둔 얼굴이었다.

“할 말들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유 대표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입을 열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혼나면 혼나야지 이걸 어떡하냐. 여기서 어떻게 말하더라도 변명일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뒤지게 혼나고 후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공민형이 가타부타할 수 없게 확정 지어 버리자, 결심한 그때.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공민형이 나서서 잘못을 빌었다.

유 대표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뭐가 죄송한데?”

이건 공민형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인수가 의견 내려고 할 때마다 입을 틀어막아서요? 그럴 리가 없었다.

“다들 의견을 내기 어려워하는 분위기여서 좀 더 의미 있는 의논을 할 수 있도록 연장자로서 보조했어야 하는데 너무 듣는 데 치중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니가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다른 멤버들이 뭐가 되냐고.

유 대표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연습생 중 한 명을 랜덤으로 지목했다.

“고다음 연습생. 오늘 회의 중에 본인이 냈던 의견 말해 보세요.”

내가 회귀하기 전 시간 선에서는 최종 데뷔조로 선발되어 활동했던 연습생이었다.

‘사실 실력 자체는 애매해서, 위 등수의 실력자가 다 하차해 줘서 데뷔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연습생으로서의 기량 자체는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력 이상의 기획력이나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번 회의에서도 공민형의 눈치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고다음이 눈을 굴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질문이 차례로 다른 멤버들에게로 넘어갔다.

“저희 불꽃 같은 거 쓸 수 있나요? 그 슈융-! 하고 터지면서 파바바바박, 하는 그거요.”

영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유 대표는 흡사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답변 한 번 듣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그동안 연성 프로덕션에서 기획했던 무대들 중 화제성 있는 연출들을 분석하고 연성 프로덕션에서 선호하는 듯한 연출법을 파악했습니다.”

드디어 그런대로 들어 줄 만한 이야기가 나오자 유 대표가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우리 회사에서 뭘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유 대표를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보컬 중심으로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MR을 끄고 무반주로 라이브를 내보내거나, 객석 참여형 무대를 자주 사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녀석들의 답변 수준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준치라고 기특해할 만도 한데.

유 대표의 표정은 여전히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요?”

“저희도 전반적으로 보컬에 강한 멤버들이 많으니 전반적으로 보컬 난이도는 높이되 후렴 정도는 방청객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무대를 연출할 수 있으면 좋을 듯합니다.”

유 대표가 겨우 쓸 만한 얘기가 나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왜 아이디어 스케치에서 빠져 있어요?”

이 새끼가 방해해서요. 솔직하게 대답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제한 순간, 갑자기 공민형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인수가 아이디어에 너무 자신 없어 해서 일단 보류한다는 게 제가 판단을 잘못했네요.”

뭐라는 거야, X발.

나는 순간 극도로 경멸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할 뻔했다.

‘안 돼. 지금 카메라 돌아간다.’

겨우 침착하게 화를 가라앉혔지만 이미 분위기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유 대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공민형 연습생.”

유 대표의 부름에 공민형이 낯짝만큼은 성실한 모범생처럼 대답했다.

“네.”

유 대표의 기가 찬다는 듯한 비웃음이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본인이 아무것도 안 한 것에 대한 변명은 더 안 해도 됩니다.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면서 의미 없이 고개 숙이지 마세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 불쾌합니다.”

나에게만 우호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공민형의 성자 코스프레만큼은 확실하게 저지된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공민형이 다시금 고개를 숙이자 유 대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더 얘기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내일까지 각자 본인이 생각하는 아이돌로서 최선의 무대가 뭔지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서 제출하세요. 서로 상의하지 말고.”

그렇게 새로운 숙제를 남긴 유 대표는 다시금 합숙소를 떠났다.

남겨진 팀원들의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흠~ 흠~ 흐음~”

혼자 신나서 드래프트 연습용으로 주어진 복사 용지에 펜으로 마구 휘갈겨 써 대고 있는 영인이었다.

“형도 지난번 미션 때 하고 싶은 거 꽤 있었잖아. 어차피 진짜 해 준다는 것도 아닌데 일단 적어서 내 봐.”

영인의 제안에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럴까. 근데 나는 아무래도 다른 팀원들이랑은 방향이 좀 다를 것 같아서….”

“에이, 다 들어준다는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벌써부터 신경 써.”

“그런가?”

영인에게 설득된 하연을 필두로 다른 연습생들도 끄적끄적거리기 시작한 그때 공민형이 내게만 들릴 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떼창 하고 싶은 거 맞잖아.”

“……?”

뭐라는 거야. 내가 곧장 공민형을 쏘아보자 놈이 무슨 일 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왜?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어?”

이번에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였기 때문에 나머지 조원들도 모두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나는 속을 가라앉히고는 마주 웃어 주었다.

“어? 아냐, 조금 전에 누가 구시렁거린 걸 들은 거 같아서. 근데 내 착각이었나 봐.”

그러곤 더 신경 쓰기도 싫다는 듯 나도 눈앞의 종이에 집중했다. 그 후로 뭘 더 말했는지 아니면 안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거슬리지 않았다.

***

잠시 후, 다들 쓸 거 쓰고 더 짜낼 것도 없어서 해산하게 되었을 때는 열 시쯤이었다.

탁, 4인실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이규민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뭐 공민형한테 원한 진 거 있냐?”

“있겠냐?”

이쪽도 억울했다. 왜 저러는지 이유를 좀 알아야 납득을 하든 할 거 아니냐고.

왜 본인도 자멸할 짓을 하는 건지 누구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저 형 진짜 이상해. 원래 안 저랬던 거 같은데.”

“잘 생각해 봐. 너 뭐 쟤 돌려 까거나 화면에서 가린 적 없어?”

영인과 규민이 같이 투덜거리자 하연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멘토님 말은 잘 따르실 것 같으니까….”

위로라고 하는 말인 거 같은데 문제는 그 멘토도 나서서 뭘 해 주는 타입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리끼리 끌고 나가야 하는데 저기서 저렇게 자꾸 은근한 시비를 걸어서 브레이크를 잡아 대니 이쪽도 골이 아팠다.

“그냥 네 생각에 괜찮을 거 같은 거 다 질러. 우리가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되지.”

규민의 태평한 발언에 나는 곧장 반박했다.

“그러다 나 독재자 이미지로 방송 나가면 독박은 내가 쓰고?”

“아니, 우리가 자발적으로 결정권을 독재자한테 맡긴 건데 뭔 상관이야.”

“나는 싫어. 가뜩이나 내가 주도해서 기획한 무대가 대부분이라, 지금도 독선적인 이미지 잡히기 쉽단 말이야.”

그러자 규민이 2차 미션 때의 원한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반은 맞지.”

“야.”

영인이 풋 웃음을 터트리자 하연이 안절부절못했다.

“너는 누구 편이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규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데뷔조로 올려 줄 사람 편?”

나는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쓴 채 대답했다.

“그럼 빨리 공민형이랑 같은 방 쓰러 꺼져. 침대 하나 더 놔 달라고 해.”

“아, 그게 누가 저쪽이래?”

하여간 사람 속 긁는 데는 공민형이랑 다른 쪽으로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둘이 한참을 바락바락 다투고 있으니 얌전히 있던 하연까지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넌 왜 웃어?”

내가 한숨을 섞은 목소리로 묻자 하연이 겨우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진짜 친한 거 맞구나 싶어서요.”

“아, 그렇지?”

“누가?”

동시에 엇갈린 반응에 영인이 다시금 핀잔했다.

“거봐, 친한 거 맞다니까.”

내가 부정하기도 전에 기회라는 듯 규민이 핸드폰 화면을 켜고 다가왔다.

“아, 맞다. 야, 생각난 김에 나 셀카 하나만 좀 찍자. 옆으로 가 봐. 니가 왼쪽에 서야 해.”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을 담아 규민을 노려보았다.

“미X놈, 진짜.”

“원래 아이돌 하려면 사람이 좀 돌아 있어야 해. 예쁜 애가 돌아 있는 거 잘 먹히거든?”

골이 울려 왔다. 왜 이렇게 미션 한번 쳐내기가 힘드냐. 나한테만 고역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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