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68화 (68/224)

#068. 뭐든 할 수 있다면 (4)

“우리 팀에 TOP 8이 셋이나 있는데 설마 내가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이번이 세 번째인 만큼 당연히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수준도 높을 겁니다. 지금 본인 순위에 맞게 행동하세요.”

그 말이 어쩐지 공민형이나 표영인을 포함하여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나 하나만을 저격해서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자의식 과잉인가.’

어차피 이쪽도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모두가 입을 다문 와중 손을 들고 물었다.

“저희가 주도해서 기획하라는 말씀이시라면 어느 정도까지 자율성을 주실 건지 먼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냅다 혼부터 나고 시작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멘토는 멘토. 더욱이 업계의 대선배인 만큼 최대한 정중한 투로 묻자 유 대표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러분이 먼저 곡과 그룹 컨셉을 기획해서 제출하면 기획을 구현하는 단계부터 지원하겠습니다.”

제로부터 땅을 파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한번 물꼬를 트자 다른 녀석들도 용기가 난 것인지 곧장 물었다.

“그럼 저희가 어떤 장르와 컨셉을 선택해도 지원해 주실 수 있나요?”

영인이 두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무대 올리는 데 단순히 여러분들의 노력만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유 대표의 낮은 비웃음과 함께 다시 연습실에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여러분이 입는 의상, 부를 곡, 녹음 작업, 무대 연출, 모두 타인의 투자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나는 자격 없는 작업물에 헛돈 쓰는 짓 아주 싫어합니다.”

말이 길었으나 요점은 간단했다. 유 대표의 수준을 맞춘 기획이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용감하게 나섰던 영인이 뺨 한쪽을 삐죽 부풀린 채 불만을 표하자 유 대표가 냉정히 비수를 하나 더 꽂았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겁니다. 노력만 하지 말고, 결과를 보여 주세요. 이상입니다.”

그러곤 핸드폰 화면에서 뭔가를 확인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 저녁 7시에 올 겁니다. 그때 다시 봅시다.”

유 대표가 더 질문할 새도 없이 자리를 떠나 버린 그때,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팀 잘못 골랐구나.’

“음….”

다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일단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제안했다.

“우선 연성에서 연출했던 유명한 무대나 그룹 컨셉부터 찾아볼까?”

연성에서 뭘 내놨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첫걸음이었다.

“아, 그렇지. 연성에서 처음 냈던 그룹이 락시였나?”

연성의 계보를 이야기하려면 유 대표의 이력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연성 프로덕션 대표 유해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걸 그룹 0세대의 시조 격인 밀키즈로 데뷔해서 아이돌 시장의 물꼬를 튼 인물이었다.

그 후로 10년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은퇴 선언.

전성기가 끝난 이후 다른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냐고 하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룹이 해체되자마자 아이돌에서 기획사 사장으로 진로를 완전히 틀어 버리더니 그쪽에서도 대성공을 거둬 버렸으니까.’

한창 전설적인 기록을 만들어 가던 밀키즈는 소속사의 비리로 꽤 더러운 해체 수순을 밟았다.

멤버들이 궂은 무대를 마다하지 않고 혹사당하며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정산해 주지 않고 대표가 착복했다고 했나.

결국 오랜 소송 끝에 정산은 받았지만 밀키즈의 해체는 막을 수 없었다.

밀키즈 해체 후 돌연 잠적인 유해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더는 아이돌이 아닌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렸을 때 일인데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대사건이었지.’

마지막 재판 때 올 블랙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유해라를 향해 전 소속사 대표가 저주를 퍼붓던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신 무대 위에 못 오르게 해 주겠다고 했던가.

유해라는 보란 듯 가수가 아닌 대표의 자리에서도 성공했다.

첫 걸 그룹 락시는 당시 유행하던 강렬한 걸스 힙합 컨셉으로 데뷔해 이목을 끌었다.

‘유 대표 후광으로 주목받은 그룹이라는 평이 좀 지배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대중을 사로잡은 건 분명하니까.’

그다음 그룹은 청순이 메인 컨셉이지만 실력파를 내세워 데뷔한 스윗팝이었다.

락시도 동 세대에 데뷔한 그룹들 중 손에 꼽힐 만큼 성공한 그룹이었지만 스윗팝은 그 이상의 역사를 썼다.

2세대 걸 그룹 중 가장 흥행한 그룹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야심 차게 준비해서 데뷔시킨 보이 그룹, 위플릭스는….

‘망했지.’

기획사 대표로서 새 출발 한 유해라에게 들이닥친 첫 번째 실패였다.

인기몰이를 담당하던 멤버가 데뷔 1년도 안 돼서 학교 폭력으로 폭로를 당한 것이다.

본인은 모함이라며 강하게 부인했고 회사는 멤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황이 반전된 건 학폭이 허위 사실이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다들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하긴 했는데….’

당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물론 과거 동창이라는 사람들이 익명 게시판에 수없이 인증과 함께 내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여론 몰이를 해 댔던 것이다.

회사는 직원의 말을 믿었고 남아 있는 모든 정황이 피해자를 무고로 몰아갔다.

피해자는 결국 자신이 무고범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녹음본을 인터넷에 올렸다.

덕분에 해당 멤버는 물론, 해당 멤버를 지킨다며 의리를 보였던 나머지 그룹 멤버들도 같이 매장당했다.

연성 프로덕션 또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피해자에게 금전적으로 배상하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였다.

그 후로도 남성 보컬 듀오를 데뷔시켜 준아이돌로 활동시키려 했으나 표절 시비 끝에 해체.

그 외에도 실시간으로 활동 중인 3세대 주축 걸 그룹이 한 팀 더 있고, 여성 솔로와 남성 3인조 보컬 팀이 하나씩 활동 중이었다.

요컨대 성공시킨 프로젝트는 많지만, 그중 정석의 보이 그룹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갑자기 이거 괜찮은 건지 걱정되는데.’

아니지, 어쨌든 전권은 너네한테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가 버렸으니까 우리가 잘하면 그만이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 버리기 위해 애쓰며 기억나는 무대들을 화면에 띄웠다.

“이거 커뮤니티에서 무대 연출 좋은 거로 유명했던 거 기억나는데 혹시 본 사람 있어?”

그러자 영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

그래, 너는 봤을 거 같았다. 다른 녀석들도 컨셉은 본 적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몇 개 유명했던 시상식 특별 무대나 콘서트 영상 같은 것을 찾아서 보여 주자 연성이 추구하는 무대가 어떤 느낌인지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보컬 의존이 크긴 하네.’

안무는 전체적으로 평범한 수준이었다. 첫 기획 그룹이었던 락시도 그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이었던 거지 안무 난이도가 가파르게 상승한 최근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 대표가 왜 보컬 멤버 중심으로 캐스팅을 눌렀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도 떼창 같은 거 유도해야 하려나?”

한참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던 연습생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녹화 초기, 영인이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던 성영온이었다.

“근데 이건 원래도 히트를 쳤던 곡들이니까 팬들이 따라 불러 주는 게 가능한 거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연습생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지난 미션처럼 시청자들이 가사를 이미 알고 있는 커버곡이면 모를까 오리지널곡에서 떼창을 유도하기는 불가능했다.

‘가사는 프롬프터 같은 걸로 띄워 준다고 해도 멜로디를 모를 테니까.’

꼭 떼창 연출이 아니어도 보컬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아니면 부분적으로 활용하거나.

“뭐, 후렴 정도라면 유도하는 것도 가능할 거 같기는 하니까.”

적당히 중도 입장에서 의견을 낸 순간 공민형이 다시 끼어들었다.

“와, 근데 인수 너 되게 머리 잘 쓴다.”

“뭐?”

반질반질하게 웃고 있지만 절대 칭찬일 리가 없는 소리였다. 공민형이 밝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잖아. 처음부터 후렴만 떼창 연출로 가고 싶어서 다들 납득할 수 있게 단계적으로 그렇게 유도한 거 아니야? 빅 픽처 대단한데?”

‘이런 말을 왜 하는 거지.’

가뜩이나 시간 없는데 이런 하급 어그로에 정신 팔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떼창 넣는 거 별로인 거 같으면 빼고. 난 넣고 싶은 것도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민형이 눈만 웃고 있는 채로 눈썹을 움찔 흔들었다.

“아니, 뭘 굳이 뺄 게 있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은근슬쩍 내가 하자고 밀어붙인 것처럼 말하는 태도가 거슬렸다.

“난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떼창을 넣을 거라면 그게 나을 거라는 의견을 낸 거지.”

말이 오고 가는 사이 다른 연습생들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류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이 되던 찰나 이규민이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배고프지 않냐? 여기는 미니바 같은 거 없나?”

이규민의 뜬금없는 말에 다들 규민을 바라보았다. 영인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어, 나 본 거 같아.”

“한번 가서 뭐 있나 좀 볼까요?”

하연과 영온까지 일어나서 거들자 일촉즉발처럼 예리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먼저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한 규민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규민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여간.’

꼭 조금이라도 칭찬해 줄 만한 게 있으면 티를 내요.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차며 다른 멤버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걸음을 늦춘 규민이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물었다.

“저 새끼 왜 저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이준상이랑 싸웠나?”

그러자 규민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상이 누군데?”

바보냐…. 남의 생일까지 외우고 다닌 주제에 전 3위 본명도 까먹고.

“아진 본명.”

“아, 그 나대는 걔.”

꼭 저 같은 묘사를 하고 앉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연습생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규민이 곧장 따라붙었다.

“아무튼 왜 저러는지 짐작 가는 거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난들 알겠냐.”

규민이 잠시 곰곰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는지 중얼거렸다.

“사춘기인가….”

사춘기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나는 모처럼 도움이 되는 일을 해서 다르게 볼 뻔했던 규민을 경멸을 담아 쏘아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잠시 후, 유 대표가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가 준비한 건 구체적인 계획 하나 없는 드래프트였다.

‘이건 100% 깨지겠는데.’

예상되는 반응에 입 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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