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뭐든 할 수 있다면 (2)
“고구마 구워 먹을 사람?”
“?”
느닷없이 끼어들더니 고구마는 무슨 고구마야, 싶긴 했으나 일순 정적이 감돌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 저 세 개 먹을래요.”
“무슨 고구마예요? 호박? 아니면 밤?”
“색 보니까 호박 같은데.”
다른 연습생들도 하나둘씩 규민을 에워싸고 자기가 먹을 몫을 포일로 감싸느라 정신없었다.
‘이제 좀 적당히 하려나.’
이 팀으로 온 이유가 나랑 잘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다만 왜 그 잘 붙어 있던 아진과 떨어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굳이 알아야 할 것도 아니고.’
나는 나대로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16인이 정해지는 대로 데뷔조를 구성할 수 있도록 남은 연습생들의 파악은 마쳤으니 제할 놈들은 제하고 모으면 그만이었다.
‘당연히 저놈은 제외할 놈이고.’
이미 팬덤부터가 갈린 상황이었다. 민형과 아진이 첫 방송부터 가까이하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연습생들의 관계성에 환호하는 일부 팬들이 알아서 떡밥 제조를 마친 상황이었다.
애교 많고 눈물도 많은 동생 같은 아진과 밑으로 동생이 다섯은 있을 것 같은 민형 조합이 인기를 끌고 있다나….
내 눈에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 뒤에서 쑥덕거리는 두 자매들 같은 이미지였지만.
어쨌거나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면 내게는 유리한 일이었다.
“너는 고구마 안 먹어?”
어느새 본격적으로 고구마 판을 벌이고 있던 이규민이 뺨에 숯 검댕을 묻힌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해서 보는 사람이 다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나만.”
내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이규민이 곧장 얼굴을 향해 고구마를 던졌다.
“직접 하세요, 그러면.”
“아, 뭐 하는 거야.”
내가 코앞에서 고구마를 손으로 낚아챈 다음 반사적으로 말꼬리를 높이자 이규민이 웃었다.
“아, 아깝다. 비주얼 경쟁자 한 명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야, 빅 피처 무섭다.”
장난스럽게 터지는 농담과 함께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까이 가서 주섬주섬 포일을 뜯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민형은 계속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는데, 진짜.’
나는 민형을 무시하려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고구마가 따끈따끈하게 익어 하나를 시범 삼아 꺼내 보자 꿀이 진득하게 나온 고구마가 유혹적인 냄새를 뽐냈다.
“맛있는~ 구마구마~ 나는야~ 최고의 군고구마가 될 거야~”
규민이 단체곡 멜로디에 맞춰 즉석에서 지어낸 가사를 다들 중얼중얼 따라 했다.
“구마구마~”
“뭔데.”
“가장 빛나는 고구마~”
한심한 방법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와, 냄새 미쳤다.”
“저도 하나만 꺼내 주세요.”
“냄새 진짜 좋다.”
하나둘 자기 몫의 고구마를 꺼내 신문지로 싸서 야금야금 껍질을 벗겨 내던 그때, 스태프가 박스를 하나 들고 다가왔다.
“다들 목 축이면서 드세요~ 대표님께서 보내신 간식입니다~”
박스가 탁, 중앙의 테이블 위에 자리 잡는 순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말은 대표님의 ‘간식 선물’이지만, 그 까다로워 보이는 유 대표가 이런 걸 간식으로 보낼 리가 없었다. 이건 옆 구르기를 하며 백텀블링을 하고 봐도 PPL이었다.
“음….”
PPL이 괜히 PPL이겠냐. 보통 이렇게 PPL로 들어오는 식품은 그 맛이 굉장히 도전적인 경우가 많았다.
허여멀건 배경 띠지에 누런 녹색의 추상적인 그림이 ‘이건 맛대가리 더럽게 없습니다.’ 하고 미리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리 몸에 좋은 건강한 탄산! 베지소다 오리지널 맛]
[키위, 사과, 케일, 양배추, 브로콜리 추출물 함유]
앞에 두 개는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케일부터는 아무리 봐도 탄산에 처넣을 맛이 아니지 않아?
로고 옆에서 암울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브로콜리를 발견한 영인이 뒷걸음질 쳤다.
브로콜리도 초장 스푼이 아니라 탄산음료의 재료가 되는 운명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Oh….”
“와 너 방금 처음으로 외국인 같았어.”
나는 이규민의 개소리는 무시한 채 생각했다. 어쨌든 누군가는 이걸 맛있는 척 먹어야 한 장면이라도 더 편집본에 나갈 수 있었다.
고구마랑 이상한 야채 우린 맛의 탄산…. 아무리 봐도 고기 잘 먹고 난 후의 식후 디저트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먼저 페트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따고 병을 기울이는 모든 과정이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꿀꺽.
주둥이를 기울여 내용물을 마시자 당연하지만 기묘하게 역겨운 맛이 났다. 공민형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여기서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겨우 몇 모금 마신 다음 나는 웃으며 페트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되게 신기한 맛이다. 입 안이 상큼한 느낌이라 느끼한 거 먹을 때 잘 어울리겠는데?”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요즘 대기업은 식품 개발할 때 기호도 테스트 같은 걸 안 거치는 건가?
이런 맛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나? 혀에 닿는 순간 뱉어 버리고 싶었으나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견뎌 냈다.
“아, 진짜? 나도 마셔 봐야지.”
이규민이 냉큼 내가 내려놓은 병을 집어 들려고 하기에 나는 먼저 빼앗듯 낚아챘다.
“새거 마셔, 새거.”
어차피 제품은 발에 차이도록 많았다. 아무도 안 가져가려고 할 테니 촬영 중에나마 조금이라도 더 소진해야 광고주가 좋아하겠지.
규민이 치사하다는 듯 새 페트병을 따서 입을 댄 순간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때요?”
다른 연습생이 묻자 규민이 언제 표정이 흔들렸냐는 듯 한여름처럼 청량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마셔 본 탄산 중에 제일 맛있어! 비타민도 12종류나 들어 있다니 아이들 영양 간식으로도 좋겠다!”
마찬가지로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독한 놈. 나도 나지만 이놈도 어지간한 놈이었다.
“Seriously…?”
여전히 외국인 모드가 해제되지 않은 영인이 조심스럽게 새로운 페트로 손을 뻗었다.
물론.
“우웩, 퉤, 우욱. You fraud!”
“우와, 맞다, 외국인이었지.”
바닥을 향해 음료를 뱉은 건 당연하고, 영어로 뭐라 중얼중얼한 건 깔끔하게 편집될 것이 빤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길었던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까지 모두 끝냈을 때는 8시쯤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난 일정에 이대로 잠들기에는 너무 이르고,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하나둘 레크리에이션 룸으로 향했다.
애초에 이런 단체 모임 및 연수를 위해 지어진 건물인지 안무 연습을 하기에도 좋아 보이는 연습실의 형태였다.
“오….”
다시 평소 모드로 돌아온 영인이 연습용 러닝화를 신은 채로 몇 번 뛰어 보더니 감탄했다.
“마룻바닥이라 신발도 안 밀리고 괜찮네요.”
“그러게.”
다른 연습생들도 하나둘 바닥과의 마찰을 확인하는 사이 내내 존재감 없이 눈치를 보고 있었던 연습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
거울에 비치는 손을 든 모습에 다들 그쪽을 바라보자 당사자가 어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생각해 보니까 저희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랬다. 이제 3차 미션까지 왔다 보니 서로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특히나 몇 명은 방송 초기부터 데뷔 유력 멤버로 손꼽혀서 팬덤도 꽤 탄탄하게 붙어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벌써 조별 미션만 두 번을 치른 후였다. 몇 명은 이미 이전 회차의 미션에서 같은 조로 무대에 오른 이력이 있었다.
“서로 어느 정도 구면일 거 같긴 한데, 돌아가면서 쭉 간단히 소개할까요?”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이 나온 김에 서로 대강 어느 포지션을 생각하고 있는지 얘기해 두는 것도 좋겠지.
“저는 서인수고요, 21살, 메인 보컬 지망입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러자 내내 좀 잠잠한가 싶었던 공민형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어.”
알아도 일단은 그냥 남들 다 하는데 나는 안 할 수 없으니까 하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워낙에 유명하니까. 저는 모르는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규민의 농담에 분위기를 잘 맞춰 주는 연습생들이 손사래를 쳤다.
“헐, 아니에요. 무대 진짜 잘 봤어요.”
“페어 안무 너무 멋있었어요.”
규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또 띄워 준다고 나오는 거 없는데. 그럼 아시다시피 이규민이고 써머데이에서 나왔습니다. 일단 서브 보컬 쪽이긴 한데 센터도 할 수만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통성명을 마치자 대충 멤버들 포지션 비중을 가늠할 수 있었다.
7보컬 1랩. 이거 괜찮은 건가? 메인 댄서를 지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공민형은 그동안 리드 보컬이나 센터를 맡아 왔고, 영인은 올라운더형 센터, 박하연이 래퍼, 그 외 나머지들은 리드 보컬이나 서브 보컬만 맡아 왔던 연습생들이었다.
‘이렇게 되면 영인을 메댄으로 보내고 공민형한테 센터를 줘야 하나.’
사실 센터라는 개념 자체가 전체적인 포지션 배치에서 염두에 두기에 살짝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냥 전체적으로 조명받을 수 있게 안무나 파트 배치에서 비중을 늘린 포지션 정도인데….
‘그걸 공민형한테 주긴 왠지 괘씸한데.’
하지만 소화를 잘하기만 한다면 못 맡길 건 없었다. 중요한 건 내 기분이 아니라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는 거니까.
“저희 보컬이 많네요? 아, 그냥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이번에도 최연장자가 21살인 비교적 어린 팀이었기 때문에 공민형이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아, 네네. 편하게 하세요.”
하연이 대답하자 건너 건너 앉아 있던 규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도 그냥 말 다 편하게 해. 어차피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결국 다 같이 한참을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를 반복하다 모두 반말을 쓰는 걸로 종결되었다.
“근데 우리 보컬이 진짜 많긴 많다. 무대도 댄스 중심보다는 보컬 중심으로 해야 할 거 같은데?”
프로듀서가 없는 마당에 우리끼리 연출을 얘기해 봤자 대단한 진전을 이루진 못하겠지만, 그 빡빡해 보이는 유 대표 앞에서 서로 내가 센터네 어쩌네 옥신각신하는 것보단 지금 말하는 게 나아 보였다.
“아무래도 각자 잘하는 거 보여 주고 싶을 테니까.”
아이돌로서 퍼포먼스도 보여 줘야 하니 아예 발라드 무대 같은 연출을 하긴 어렵겠지만 유 대표도 생각이 있다면 보컬에 강한 멤버군을 차별화에 이용하려 할 것이다.
“오늘 하루 다들 너무 고생 많았고, 이렇게 모였으니 다들 잘해 보자.”
여전히 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남아 있는 와중, 더 이야기해도 우리끼리 결정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판단에 자리를 파하자 각자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4인실이 하나, 2인실이 두 개. 다들 2인실로 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라 나는 먼저 4인실로 향했다.
“뭐야, 좀 같이 가.”
곧바로 따라붙은 이규민을 짜증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 뒤에 줄줄이 딸린 놈들이 두 명 더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