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59화 (59/224)

#059. 벼랑 끝에 몰리면 (1)

“아, 네. 압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규민이 힘차게 외쳤다.

“자,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느닷없이 벌어진 노래판에 나도 규민도 무슨 마이크라도 되는 것처럼 생수병을 들고 무반주로 노래를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느새 난데없이 떠맡게 된 애새끼들이 아니라, 조카들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뀐 건 긍정적인 일이었다.

“차갑게 돌아선 그대~ 어딜 그렇게 바쁘십니까~.”

기억을 한계까지 더듬어 가며 규민과 주거니 받거니 부르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가 풀려 있었다.

“아우, 난 또 뭐 아이돌 연습생 애들이라 그래서 노래는 영 황인 줄 알았지. 이야, 둘 다 목청이 좋네~”

저는 더 잘한다고요. 규민과 같은 수준으로 묶인 것에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은 그때, 다른 조명 감독이 소리쳤다.

“어유, 둘 다 잘하지만 그래도 왼쪽이 더 잘하는데 둘이 고만고만하다고 하면 섭섭하겠다.”

나는 그 말에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규민은 기분 나빠 하기는커녕 바보처럼 웃었다.

“아~ 제가 다음에는! 더 실력을 갈고닦아서 한번 이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규민의 장난스러운 제스처에 다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두 번째 씬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 스탠바이~ 큐!”

이번 씬은 내가 한창 숨을 몰아쉬며 코트 위에 드러누우면 규민이 가까이 와서 칼로리바를 건네주는 장면이었다.

“이거 먹어.”

나는 규민이 내민 칼로리바를 거의 낚아채듯 잡았다.

“잠깐만! 각도 다시 한 번만 해 볼래요? 패키지가 잘 안 보여서.”

“넵, 다시 가겠습니다!”

칼로리바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기도 하고, 나나 규민이나 손이 작은 편은 아니어서 정작 중요한 상품이 화면에 거의 잡히지 않을 만큼 가려졌다.

“지금도 괜찮은데 조금만 바깥쪽으로 잡아 볼까?”

예상치 못한 난관에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고, 어느덧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며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때.

‘음?’

뭔가 머리 위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소나기가 쏟아졌다.

“어? 비다.”

규민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에서 무슨 물을 양동이째로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도 규민도 어느새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셔츠가 반투명하게 물들었다.

‘왜 안 멈추지?’

카메라는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맡겨진 역할을 마저 다 해야 했다.

나는 이리 내놓으라는 듯 규민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규민이 재빨리 칼로리바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이거 받아가 아니라 이거 먹어인데. NG 사인이 나온 건 아니라서 나는 감독이 누누이 지시한 대로 끝 쪽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근 1시간 만에 다시금 명랑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오케이, 컷!”

나는 그제야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컷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규민이 재채기를 요란하게도 했다.

“푸에취!”

나는 행여 내게 침이라도 튈까 재빨리 규민에게서 멀어졌다.

“아, 좀.”

규민이 곧바로 정 없다는 듯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더러우니까 좀 떨어져.”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규민은 자리를 옮겨 한창 설비를 정리 중인 스태프들을 돕고 있었다.

‘나도 도와야지.’

가만히 멀뚱멀뚱 지켜볼 수만은 없어 짐을 봉고차까지 열심히 실어 나르고 있으니 갑자기 촬영 감독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이 진짜 친한가 보네. 같은 학교라도 나왔어?”

뭔 소리야, 진짜.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쓸 뻔한 것을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대답하려 했다.

“아뇨. 저는 일반고 나와서 저 친구랑은 다른 학교 졸업했어요.”

이규민이 먼저 대답할 기회를 가로채 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 나왔는지도 알고 있었냐.’

나는 일찍이 대형 기획사의 울타리 안에서 준비했던 만큼 어렵지 않게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는 예술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굳이 소속사 배경이 없었더라도 실력으로 충분히 붙었겠지만.

“그래? 보니까 몇 개월 알고 지낸 사이 같지는 않아서. 둘이 데뷔까지 같이 갔으면 좋겠네.”

나름대로 덕담이라고 하신 말씀 같았으나 내게는 그리 덕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응원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규민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는 바람에 나 또한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무쪼록 화기애애는 성공했나. 안도하자마자 나는 스튜디오 촬영이 남아 있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촬영이 끝난 규민은 소속사에서 붙여 준 스태프와 함께 귀가하고, 나는 촬영 팀 차에 같이 타야 하는데….

“물이… 계속 떨어지네요.”

탈의실을 제일 먼저 철거해 버린 탓에 온몸이 쫄쫄 젖은 채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갈아입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어떡하지? 잠깐 머뭇거린 그때 규민이 다가왔다.

“하, 정말~ 이런 것까지 형이 도와줘야 되겠냐.”

뭐라는 거야. 내가 눈을 매섭게 뜨자 놈이 내 얼굴을 향해 저지를 날렸다.

“뭐야?”

“입으라고.”

내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놈을 바라보자 규민이 자아도취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너 나한테 그거 빚진 거다. 나 도와줬던 거랑 퉁치는 거야.”

“뭐래. 다시 가져가!”

규민을 향해 옷을 퍼덕거렸지만 놈이 말을 마치고 스태프가 빼 온 차를 향해 뛰어가 버린 탓에 나만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뭐라는 거야, 진짜.”

내가 쯧 혀를 차기 무섭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촬영 감독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이 친하구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저지를 입었다. 남의 차에 물 자국을 내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3시간쯤 후.

결국 광고 에이전시에서 소개해 준 샵에 들러 스타일링을 다시 받고 스튜디오 촬영까지 마친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죽겠다….”

지금 다시 본가로 갔다가는 진순이한테 시달려서 꼼짝도 못 하게 될 것 같아 자취방으로 온 건 올바른 판단이었다.

‘얼른 쓰러져서 자자.’

겨우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자마자 자리에 누웠는데, 막상 자려고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맞다. 저번에 찍은 사진들 나도 보내 줄까.’

개인 톡으로 보내 줘도 되겠지만, 일부는 몰래 전광판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도 있었다.

‘어쨌든 32위 안에 들어서 살아남을 것 같은 연습생들이랑 친해 보여서 나쁠 건 없어.’

대외적으로도 보여 줄 겸 SNS에 올려야겠다 생각한 그때.

알림이 너무 많이 쌓여서 더는 알림을 받을 수 없는 수준이 된 상태 바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전광판 인증 샷 올려서 그렇구나.’

팬들이 남겨 준 응원 메시지를 쭉 읽고 캡처하기를 반복하던 그때.

내가 올린 글이 아니라 남의 글에 내 계정이 태그되어서 받는 알림도 잔뜩 쌓여 있었다.

‘또 뭐야….’

자세히 확인하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Jiwon_yours]

‘얘는 또 뭘 올린 거야?’

나는 반쯤 불안한 마음으로 포스트를 확인했다.

[인수 형 발견! (pic)]

뭐? 나 혹시 뭐 지나가다가 찍혔나? 다급히 사진을 확인해 보니 아무 일도 아니었다.

‘…….’

유지원이 내 얼굴이 걸린 전광판 앞에서 활짝 웃으며 찍은 셀카였다.

‘얘도 친목질 티를 낼 줄도 아는 건가.’

의외라고 생각하며 지원의 계정을 훑어보던 중, 별생각 없이 좋아요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얘랑 같은 소속사에서 온 연습생들은 다 떨어졌지.’

그러면 조만간 룸메이트로 붙을 수도 있겠네, 같은 생각을 하며 지원이 좋아요를 찍어 둔 포스트를 확인한 순간.

‘뭐야?’

얼굴이 불이라도 붙인 듯 화끈거렸다.

[1507XX - 3rd Mission Mini fan meeting]

[1507XX - XX Artcenter]

[1507XX preview 서인수 프리뷰 ]

내 팬 계정이 올려 둔 사진이나 홍보, 영업 글 같은 거에 좋아요를 찍어 둔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왜 공개 계정으로 좋아요를 찍어. 미친 거 아냐?’

팬이라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나? 당황스럽기도 잠시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해 주는 건지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빨리 좋아요 빼라고 해야지.’

나는 서둘러 유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수] 너 이거 뭐야? 오후 11:43

[인수] (사진) 오후 11:44

연락하기에 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인수] 왜 내 팬 계정에 좋아요를 눌러 놨어 오후 11:44

[인수] 이거 내 계정 아니야 오후 11:45

물론 팬 활동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걸 셀링 포인트로 삼는 아이돌도 있지만.

‘유지원이 그게 될 것 같지 않으니까 문제지!’

이규민이나 표영인처럼 좀 그걸 잘 이용할 거 같은 애들이 팬 계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티 내는 건 괜찮다.

왜냐면 걔네는 알아서 심지어 자기 홈마를 찾아서 포즈를 취해 줄 여유가 있을 놈들이니까.

하지만 유지원은….

‘괜히 애매하게 팬들이랑 소통하는 척하면서 친목질 한다고 욕만 먹기 딱 좋아.’

그러니 아예 저는 그런 세계는 잘 몰라요~ 하고 컨셉을 잡는 쪽이 백번 나았다.

하물며 자기 팬 계정에 아는 척을 해도 애매할 판에 왜 내 팬 계정에 좋아요를 찍고 있냐고~당황한 나머지 메시지를 5~6개를 연달아 보내자 지원에게서 곧장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내가 골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화를 받자 지원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형, 나, 나 뭐 잘못했어!? 저 이제 겟데뷔에서 짤리는 거야?

“뭐?”

- 그, 좋아요는, 북마크 같은 거래서. 그냥 나중에 저만 다시 볼 수 있는 표시인 줄 알고… 그랬는데, 나, 이제 정말 겟데뷔 하차해야 해?

‘뭔 소리야.’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디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건지. ‘저’와 ‘나’를 섞어서 쓰는 모습을 보니 정말 적잖이 당황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유지원이 뭐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거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남들이 보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거라서. 좋아요 눌러 놓은 거 남들도 다 볼 수 있으니까 네 이름 석 자 달고 아무거나 좋아요 누르지 마.”

내가 다급하게 설명을 우다다 쏟아 내자 지원이 다시금 집요하게 물었다.

- 나 뭐 징계받고 그런 건 아니야?

그럴 리가. 그냥 유지원 서인수한테 아는 척하더니 진짜 팬심이었던 거냐, 같은 말이 커뮤니티에서 나오고 말 터였다.

“그런 거 아냐. 내가 너무 놀래킨 거 같네. 그냥 좋아요 누른 것만 취소하고 앞으로는 공식 계정이나 본인이 올린 거 아니면 함부로 좋아요 누르지 마.”

- 응!

지원의 씩씩한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기는커녕 외려 더 불안해졌다.

“너 근데 내 팬이라는 말 그냥 나 기분 좋아지라고 해 준 말 아니었어?”

당연히 겉치레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팬이었다고 하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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