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의도치 않더라도 (3)
[서브 에피소드 미션 ▷ 호랑이 굴]
[예상 수령 보상]
[▷코인 1개]
[▷지표 1단계 선택 보정]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또냐…. 호랑이 굴이라는 표제가 묘하게 불길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그렇잖아도 시스템 활용 못 한다고 한 소리 들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스토리 요약에서 지겹도록 지적당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용 자체는 재밌는데 왜 시스템이 있는 건지 아쉬운 지점이 있다나….
‘알겠다고요.’
나는 미션 수락에 앞서 현재 지표 상태를 확인했다.
[어그로] (보통)
[개연성] (높음)
[사이다] (보통)
어그로와 사이다 모두 곧 하락을 앞두고 있는지 빨간색으로 불이 들어와 있었다. 더더욱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그러자 미션 수락 페이지로 전환되며 수행 내용이 공개되었다.
[촬영장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지을 것]
[잔여 제한 시간: 47:59:59]
뭐지? 이렇게 빨리?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그제야 촬영 날짜를 제대로 확인해 보았다.
필요할 경우 제작진 측과 협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촬영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재빨리 이전에 뽑아 뒀던 아이템을 사용해서 계약서를 훑어보자 내 눈에만 하이라이트 칠 되어 보이는 파트가 눈에 띄었다.
[‘을’은 원활한 홍보 영상물 촬영을 위해 ‘갑’에게 일정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하며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 한 ‘갑’의 일정을 수용해야 한다.]
내가 일정 부분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사측에서 나온 담당자가 웃으며 덧붙였다.
“저희가 지금 일정이 많이 밀려 있어서 가능하시면 최대한 빨리 촬영했으면 하는데요. 혹시 내일이나 모래 일정 괜찮으실까요?”
“네?”
‘아. 이래서 나한테 연락이 온 거였군.’
나는 그제야 어리둥절했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100% 원래 계약했던 모델 따로 있었던 거네.’
걔가 갑자기 펑크를 내는 바람에 대타가 필요해진 상황인 거고.
한창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만 소속사도 보호해 줄 뒷배도 없는 연습생.
펑크 자리라고 해도 기회는 기회다.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또 어디서 후려치려고 하는지는 확인을 해 둬야지.’
나는 계약서를 뒷장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과연 여기저기 일반적인 매니지먼트 소속 연예인과의 계약이라면 안 붙어 있을 조항들이 더러 보였다.
“스케줄은 이번 주 평일 안이라면 언제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혹시 6조 2항이랑 11조 3항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일 거슬리는 거 두 개만이라도 쳐내자.
내 의사와 상관없이 계약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든가 계약한 상품 외에도 내 사진을 쓸 수 있다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 저희 샘플 계약서에만 들어가는 건데 지우는 걸 깜빡했나 봐요. 민정 씨 이것 좀 지우고 새로 출력해 줄래요?”
변명을 해도…. 자기네들이 봐도 도저히 좋게 설명할 수가 없으니 한다는 말이 어이가 없었다.
나머지 조항들까지 꼼꼼하게 살핀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 내일 오후 6시 반에 근처 스튜디오로 와 달라고 확정 스케줄을 통지받았다.
‘그사이에 이규민네랑도 협의를 했나.’
오전도 아니고 오후 6시 반.
애매한 시간대가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촬영장 분위기가 왜 개판일지 대충 예상이 가네.’
급하게 잡은 스케줄과 억지로 끼워 넣은 촬영 팀.
다들 낮에 한탕 일하고 와서 또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싫겠지.
나라도 싫었다.
‘그래도 잘해야지.’
나는 초 단위로 줄어드는 잔여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마냥 나쁘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급하게 찍는 CF라면 어쨌거나 송출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단 뜻이니까.
그 말은 겟데뷔 방영 중에 광고가 걸릴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돈 받고 홍보도 되고 일석이조였다.
‘불평하지 말고, 내일 촬영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하자.’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 근처 빵집에 들렀다.
가벼운 호감을 사는 데 먹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인원이 많지는 않을 것 같아서 간단히 한 조각씩 들고 가서 먹기 편한 걸로 15인분 정도를 주문했다.
남으면 싸 가도 될 수 있게 최대한 손이 덜 가는 포장으로.
‘커피는… 가서 인원수 보고 배달시키든가 해야지.’
최대한 싹싹하게 행동하고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도 하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당일 저녁, 나는 내 모든 준비가 의미 없는 행동이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서인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그동안 을의 위치에서 일하는 현장이라면 수도 없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 어쩔 거냐고.’
이렇게 대놓고 내게 적대적인 상황은 또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규민입니다!”
이규민도 나도 제시간보다 30분씩 일찍 현장에 도착했음에도 분위기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거기 탈의실 있으니까 갈아입고 나와요.”
일반적으로 아이돌 CF 촬영 현장이라 하면 생각하는… 젊은 나이대의 스태프라고는 보이지 않고 죄 아저씨들뿐이었다.
“옷 갈아입고 이쪽으로 오셔서 메이크업받으실게요.”
메이크업 담당자조차도 대체 언제 정리한 건지 모를, 가방 틈마다 먼지가 뽀얗게 낀, 정체불명의 브랜드로 가득 찬 가방을 비스듬히 펼친 채 의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이거 어떡하냐. 나도 모르게 잠시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머뭇거린 순간 이규민과 눈이 마주쳤다.
이규민이 재빨리 눈알을 굴려 주변을 훑어보더니 활짝 웃었다.
“저는 소속사에서 같이 온 스태프분이 계셔서 저쪽에서 메이크업 따로 받을게요.”
‘뭐?’
이 더러운 배신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 걸 바로 눈치챘는지 튀는 속도가 아주 남달랐다.
“네, 그러세요. 인수 씨는 얼른 갈아입고 나오시고요.”
15분 후, 아이돌 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출한 분장이 끝났을 때는 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어 있었다.
“윤 실장, 조명 어디다 뒀어? 내가 그거 쓸 때마다 제자리에 좀 두라고 했을 텐데?”
“그거 감독님이 시켜서 조감독님 차로 옮겨 놓은 지가 언제인데 그걸 여기서 찾아요.”
“그거 없으면 지금 안 되는데? 빨리 가서 안 가져와?”
“지금요? 아씨, 그걸 언제 다녀오냐고요!”
여기저기서 고성은 물론 모두가 짜증에 물들어 있었다.
‘이 분위기 어떡할 거냐고.’
기껏 준비해 온 샌드위치는 내밀었다간 안 사 오느니만 못한 상황이 될 게 뻔했다.
‘이딴 거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하고 호통이나 듣겠군.’
준비해 온 정성이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이미 다른 촬영 현장에서 구르고 온 후였고 다들 며칠 밤을 새우기라도 한 건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일단 야외 촬영 먼저 하고 스튜디오 촬영으로 이어서 할게요. 해 지기 전에 짧게 찍고 이동합시다.”
야외 촬영은 인근의 섭외해 둔 농구 코트에서 진행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준비된 스태프분이 해 주신 메이크업은 안 하느니만 못한 수준이었고 나는 오히려 쌩얼이 낫겠다는 판단에 몰래 조금씩 메이크업을 지웠다.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아직 해는 떠 있었지만 무식하게 덥고 습한 날씨였다.
‘최악이네.’
곧 소나기가 오려나. 다들 예민하게 날 서 있는 분위기 속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스탠바이~ 슛!”
첫 씬은 나 혼자서 농구 코트를 가로질러 뛰어간 다음 공구 골대에 공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운동 신경이 부족한 편은 아니라 어렵지 않게 공을 던져 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잠깐만! 그쪽 말고 다른 쪽으로 뛰어 봐요. 각도가 안 나와.”
그냥 겉으로 봤을 때 그럴싸해 보이는 것과, 카메라에 잘 담기는 것은 다르다.
나도 알고 있지만.
사람이 혼자 30분 넘게 코트를 뛰어다니다 보면 당연히 기진맥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컷!”
거의 1시간이 다 되어서야 단독 씬을 마무리하고 나니 마치 샤워라도 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쪽에 선풍기 있으니까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아이스 팩을 가져와 주거나 에어컨을 미리 틀어 둔 차로 안내해 주는 매니저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카메라를 향해 최대한 청량한 분위기로 웃어 보여야 하는데 솔직히 웃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스태프들이 다 죽을상을 하고 날 노려보고 있고 날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덥고….
잠깐 휴식이 주어진 찰나, 때가 됐다는 듯 이규민이 튀어나왔다.
‘뭘 하려고, 아직 지 차례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으나 다행히 허튼짓을 하진 않았다.
“얼음물 가져왔으니까 식히면서 하세요!”
시간이 늦은 만큼 커피는 줘도 욕을 먹을 때였다.
재빠르게 얼음물과 주스로 노선을 바꾼 규민이 한 분 한 분 찾아가 몸을 식힐 만한 것들을 내밀었다.
“뭐, 잘 마실게요.”
다들 무뚝뚝하긴 하지만 목이 말랐는지 순순히 음료를 받아 들었다.
‘지금이다.’
나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포장해 온 샌드위치를 건넸다.
“저녁 아직 못 드셨을 텐데 드시면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막내 스태프까지 쭉 간식을 돌리고 촬영 재개까지 기다리려던 그때.
“어, 그거 정나라 선배님 팬클럽 굿즈 맞죠?”
규민이 촬영 감독의 키 스트랩에 끼워져 있는 키 링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저희 어머니도 정나라 선배님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나라월드 2기 회원이세요.”
정나라라면… 어르신들 사이에서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유명 트로트 가수였다.
트로트와 큰 연이 없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데뷔 5주년 기념으로 발라드 낼 때 내가 코러스로 참여했으니까.’
코러스 역할로 한번 일하고 말 인연이라지만 괜한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쭉 그동안의 히트곡과 연혁을 찾아봤던 기억이 있었다.
“정나라 선배님 좋아하세요?”
내가 슬쩍 끼어들자 규민이 순간 니가 내 이미지 영업에 왜 끼어드냐는 듯 슬쩍 내 발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하지만 나도 지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 사교성으로 밀리고 싶지 않았다.
“어, 뭐…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지만.”
“모르긴요! 저도 자주 들어요. 청춘 예찬 진짜 좋아해요.”
나는 진심이라는 듯 흠흠, 목을 가다듬고는 첫 소절을 가볍게 불렀다.
“떠난 그 마음을 내가 알까요~ 야속한 사람~ 이 노래잖아요.”
그러자 내내 동태눈이었던 촬영 감독의 눈에 일순 안광이 돌아왔다.
“청춘 예찬을 알아?”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청춘 예찬은 원래 유명해지기 전에 싱글로 냈다가 망한 걸 유명해진 이후에 수록곡으로 다시 내서 역주행한 케이스였으니까.
아직 역주행하기 전이었으므로 지금으로선 팬들만 아는 명곡이었다.
“대선배님 명곡인데 당연히 알아야죠!”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대로 쭉 1절을 이어 불렀다. 자연스럽게 이목이 쏠리면서 다른 아버지뻘의 스태프가 소리쳤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좀 불러 봐요! 서울 유행가는 아나?”
내내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가 반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