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의도치 않더라도 (2)
누구지? 등록이 안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는 사람이나 같은 조로 무대를 올렸던 팀원들은 아니었다.
혹시 나한테도 악성 팬이 붙었나?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일부러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상대방이 스스로를 소개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산뜻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제과 홍보 팀인데 혹시 서인수 연습생 맞으실까요?
○○제과? 나는 그 순간에도 제과 회사에서 나를 왜 찾아? 지금의 나는 CM 가수도 아닌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지금의 ‘서인수’가 어느 위치인지도 모르고.
“네, 서인수 맞습니다. 혹시 무슨 일로 전화 주셨을까요?”
무슨 일이긴. 제과 회사에서 아이돌(아직은 연습생이긴 하지만)에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 안녕하세요, 서인수 씨.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이번에 출시할 신제품 광고를 기획 중인데 혹시 모델 출연이 가능하실지 의사 여쭙고자 연락드렸습니다.
“…?”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거 피싱인가?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광고 모델이요?”
일단 확실하게 들은 키워드로 되묻자 상대방이 웃으며 대답했다.
- 네, 지금 인수 씨가 소속된 매니지먼트가 따로 없으시다고 해서, 우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설명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 때 미팅 가능하실까요?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 했다. 나는 너무 들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대답했다.
“네, 제가 다음 주 주말에는 다시 합숙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아서 되도록 주중에 빠른 시일 내로 뵙는 게 좋을 듯한데요.”
- 네, 그러면 화요일 오전 11시 괜찮으실까요? 저희가 점심 식사도 같이 준비해 드리고 싶습니다.
결과물만 잘 나온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내 이름 하나 제대로 실리지 않는 목소리 출연자가 아니라 이렇게 광고 모델로 섭외되는 건 처음이었다.
“화요일 오전 11시 가능합니다. 회의 장소 알려 주시면 시간 맞춰서 방문하겠습니다.”
- 넵, 늦은 시간인데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이게 사기가 아니라 진짜 계약 의뢰라면 새벽에 전화가 왔어도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그럼 들어가시고 당일에 뵙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짧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제과의 공식 번호에서 미팅 장소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서인수 님. ○○제과 마케팅 홍보부 성진아 과장입니다. 화요일 오전 11시 월드플렉스타워 2407호 미팅 룸에서 뵙겠습니다.]
짧게 확인 회신을 보내자 잠이 싹 달아났다.
“…….”
당연히 CF겠지? 아니면 그냥 홍보용 화보 촬영만?
너무 김칫국 마시지 말자. 한창 화제의 인물이라곤 하나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한테 기업이 큰돈을 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기대를 버리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
이제야 정말 내가 연예인이라는 실감이 났다. 전광판에 붙은 팬들의 메시지를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연예인으로서의 내 가치를 인정받은 기분. 동시에 내가 더 이상 일반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으윽…!”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숨을 참아 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끼잉-?”
내가 한참 이불 킥을 이어 가자 진순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지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냐, 형 좋은 일 생긴 거야.”
진순이를 잔뜩 쓰다듬은 나는 혹여 뭔가 잘못돼서 백지화되더라도 부모님이 실망하시지 않도록 얌전히 임을 다물었다.
‘미팅 다녀와서 잘되면 그때 말씀드리자.’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최대한 비주얼을 끌어올리고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등록해 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와, 회원님 대박! 다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혹시 사인 한 번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회원 등록 번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나를 에워싸고 놓아주질 않았다.
‘여기 다신 못 오겠네.’
평일 한산한 오전 시간이라 사람이 얼마 없는데도 시선이 내게만 쏠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죄송한데 혹시 사인 좀….”
“어, 저도 부탁드려도 되나요?”
겨우 유산소로 워밍업을 하려는 타이밍에 누군가 수군거리더니 다가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음….’
여기서 거절하면 안 되겠지.
저 지금 30분 뛰고 막 내려왔는데요. 운동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지만 아직 데뷔도 못 한 마당에 사인 좀 부탁했다고 싫은 티를 내더라 소문이 날 순 없었다.
겨우 사인을 다 해 드리고 기구 앞에 앉았으나 내가 뭘 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집에 가자.’
이러다 내가 3대 몇 치는지까지 커뮤니티에 다 퍼지겠다.
‘이래서 형들이 회사 피트니스 센터만 이용하는 거였구나.’
이전까지는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만 아는 예비 연예인이었지 이렇게 유명해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NO 차기 기대주 서인수를 아는 건 아이돌 판에 관심이 있는 젊은 사람들뿐이었으니까.
남자 아이돌에 관심이 크게 없을 사람들까지 ‘연예인’인 나를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게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민망했다.
결국 서둘러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진순이 산책도 못 시켜 주려나.’
얼굴을 꽁꽁 가리고 나갔더니 다행히 아무도 나를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밖에 그냥 다니는 것도 신경 써야겠다.’
집에 돌아와 괜히 신경 쓰여서 핸드폰 패턴 잠금을 바꾼 나는 핸드폰을 건드린 김에 갤러리도 싹 정리했다.
문제 될 만한 사진을 찍거나 보관해 둔 적은 없지만 혹시나 핸드폰을 잃어버리거나 했을 때에 대비해야 했다.
이 핸드폰을 쓴 지도 벌써 3년째.
그동안 쌓인 데이터라곤 내내 연습실에서 찍은 셀카나 안무를 확인하기 위해 찍은 영상들뿐이었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
녹음 파일에는 전부 보컬 연습용으로 불렀던 노래들뿐이었다.
짧게는 30초, 길게는 5분에 달하는 녹음 파일이 500개가 넘었다.
‘죄 NO 연습실에서 찍은 것들이라 뭐 올릴 수 있는 게 없네.’
개인 SNS에 올리려면 진작 올렸어야 하는데.
이제는 외부에 보여 줄 일 없는 사진들인지라 컴퓨터에 백업해 두고 모두 지워 버렸다.
‘그러고 보니 겟데뷔 촬영장에서는 셀카든 영상이든 뭘 안 찍었네.’
앞으로 좀 찍어서 올려야지.
스포일러가 될까 봐 몸을 사렸는데 다른 연습생들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SNS에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이놈.’
나는 이번에 내 전광판 투어를 돌면서 얼결에 장소가 겹쳐서 보게 된 다른 녀석들의 광고판 사진을 보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놈을 떠올렸다.
[써머데이 성실맏내]
[♡이규민♡ 잘 부탁드립니다!]
4화에서 나와 ‘처음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함께 위기를 넘기고 진심을 나누며 친해진 친구’로 서사를 찐하게 부여받으면서 나와 관련된 게시글만 벌써 여섯 개째 올리고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찍었냐.’
제현호랑 나랑 가까이서 뭔가를 상의하고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였다.
나는 이규민과 관련된 게시글이라곤 한 장도 올리지 않았는데 참 정성이 대단했다.
‘이미 커뮤니티에서도 말 나오고 있네.’
[- 근데 인수는 SNS 딱 공지용으로만 쓰는 느낌인데. 이규민은 걍 암거나 막 올리는 소통 계정이라서 그런가. 이규민 혼자 친한 척 ㅈㄴ 하는 것처럼 보임]
[└ 그게 팩트 아닌가여?ㅋㅋ 방송에서도 서인수는 걍 극혐 하는 거 같고 이규민 혼자 들이대던데]
[└ 찐친이 아니라 반에서 제일 눈치 없고 나대는 애 아무도 안 놀아 주니까 선생님이 강제로 반장보고 놀아 주라고 시킨 느낌]
[└ 이규민 이거 보고 3천 원 비싸짐]
[- 이규민 보고 댕댕미 비글미 그만 실드 쳐라 그냥 산만한 거 가지고 올려치기 쩌네]
[└ 주변에 저런 애 있으면 진짜 진절머리 날 것 같음 인수 그만 괴롭혀]
그리고 이규민도 나름 중형 중에 자리가 잡혀 있는 소속사에서 인지도가 있는 연습생인지라, 반박 글도 만만치 않았다.
[- 사진 몇 장으로 억까 하는 거 개어이없네 역시 픽이 까면 흥하는 중이라는 게 맞말인 듯^^ 인수버스고 나발이고 써머데이 맏내로 겟데뷔 출연 전부터 유명했고요 다른 연생들이랑도 친분 셀카 많이 올리는데 왜 인수랑 엮어서 억까질이신지 그럴 시간에 현생을 살아 억까들아]
[└ 썸데 댓글 주작단들 실드 치러 등판했죠ㅋㅋ?]
[└ 먹금]
[- 발이 너무 넓어도 이렇게 억까를 당하네ㅋㅋㅋㅋㅋㅋ]
[└ 이규민 혼자 나대는 거 맞는데 현실 부정하고 부들부들 중]
[└ 니는 같이 셀카 올릴 친구가 없어서ㅎㅎ 뭐든 친분버스 타는 걸로 보이나 봄]
‘그만 보자.’
남이 욕먹는 거 봐서 뭐가 좋다고…. 그보다는 내일 있을 내 미팅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신제품이라면 역시 과자류인가. 아니면 아이스크림일 수도 있고…. 뭐든 나랑 이미지가 잘 맞는 제품이면 좋겠다.
이런저런 소망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미팅 장소로 향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
생각도 못 했던 청천벽력이었다.
“그… 혹시 설명을 한 번만 더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되묻자 자신을 홍보 팀 팀장이라 소개한 여자분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옥외 광고판이랑 지상파 통해서 송출될 메인 CF는 인수 씨 단독으로 기획 들어갈 거고요. 저희 전무님이 이번에 4화 방영된 회차 보시더니 인수 씨랑 다른 출연진분 케미가 너무 좋아서 그것도 활용해 보면 어떻겠느냐 제안하시더라고요.”
“…….”
나는 여기까지는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이 본격적으로 쐐기를 박듯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규민 연습생도 같이 섭외를 해서 사이드 영상으로 촬영했으면 좋겠는데….”
‘싫어!’
하지만 세상엔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싫다고 거부해 봤자 내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었다.
나는 휘황찬란한 커리어를 가진 톱스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좀 유명해진 것뿐인 연습생이었으니까.
“음…. 이규민 연습생 소속사에서 협의가 잘될까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상대측 소속사 핑계를 대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네! 전화로 문의드렸는데 무척 기대된다고 답변받았습니다.”
그렇지. 썸데가 바보 집단이 아닌 이상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잠했던 상태창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