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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54화 (54/224)

#054. 대체 불가능한 (2)

‘그 연습생 A인지 B인지 하는 놈 퇴출된 자리구나.’

머릿수가 하나 비는데도 공백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쟤네는 이번에도 붙어 있네.’

인수의 착장을 눈과 렌즈에 충분히 담아내고 나니 슬슬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키 크고 무뚝뚝해 보이는 놈이 지난번 조별 무대 때도 같이했던 놈이고… 쟤는 인수 등급 평가할 때 바로 아래에 앉아 있었던 애였지?

이름이 유지원이랬나.

확실히 상위권이라 그런지 어색하게나마 포즈를 바꿀 때마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파바바바박 울려 퍼졌다.

‘좋다.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XOXO가 현장에 있었으면 이놈 저놈 망태기에 일단 쓸어 담으며 카메라에서 불을 뿜고 있을 장면이었다.

연습생 A가 어떻게 생긴 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리멍덩한 인상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비주얼 합이 상당히 좋았다.

마치 누군가가 안목을 발휘해서 골라 담은 것처럼.

‘뭐, 조 편성이야 온갖 꼼수를 다 넣어서 랜덤으로 짜 줬겠지만.’

의상 좋고 비주얼 완벽, 실력이야 더 의심할 것도 없으니 인수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놓고 먹기만 하면 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인덕은 다른 멤버의 타이를 고쳐 매 주는 인수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

“파라노말 바로 대기해 주세요.”

앞선 다섯 팀 무대가 끝나고 순식간에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이번에 뽑은 순서는 여섯 번째. 지난번에 12개 조 중 11번째였던 걸 생각하면 아주 미약한 발전이 있었다.

“제자리에 대기해 주세요.”

불 꺼진 무대 위는 어두컴컴했다.

일부러 컨셉을 위해서 객석 불까지 끈 상태였기 때문에 암흑 속에 갇힌 것처럼 어두웠다.

나는 슬쩍 제현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제현호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혹시 힘들 것 같으면 연출을 바꾸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폐소 공포증이 있는 현호에게 무대 시작 전 비상등을 제외한 모든 빛을 꺼도 좋을지 묻자 단출한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때는 멀쩡한 거 같아서 안심이었는데.

리허설할 때 보니까 표정에 묘하게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한결같은 싸가지 없는 무표정이었겠지만.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지금이라도 객석만이라도 불을 켜 달라고 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현호가 나를 막아섰다.

‘제가 괜찮다고 하잖아요.’

‘뭐가 괜찮아. 이걸로 네가 폐 끼친 거라고 아무도 생각 안 해.’

이런 거로 입씨름할 시간 없다는 듯 제현호를 지나쳐 가려 하자 놈이 모처럼 언성을 높였다.

‘제가 그러고 싶어요. 이깟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준비한 전부를 못 보여 주고 내려오는 건 싫어요.’

우기기는.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포인트 안무는 주혜성이 짰지만 안무 연출의 전반적인 부분은 제현호가 다듬은 결과물이었다.

‘무대 위에서 쓰러지면 아래로 밀어 버릴 거다.’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네 결정에 책임질 수 있냐는 듯 묻자 제현호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하겠다는데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놈이 모처럼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찬물 끼얹고 싶지도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 갇혀 있는 것도, 혼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 소매를 잡자 놈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바이, 슛!”

그리고 일순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뭐지? 바람 소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모래바람이 스치는 소리에 객석이 웅성거렸다.

온통 어두컴컴한 와중,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 거대한 달이 떠올랐다.

[… … … …]

곧 이어진 낮게 읊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우리가 가져온 이미지는 사막의 붉은 달. 편곡 자체는 상당히 트렌디하게 했지만 원곡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인트로를 따로 만들었다.

마침내 내내 꺼져 있던 조명이 팟, 불을 발한 순간, 무대 가장 왼편에 있던 지원이 천장을 향해 손을 뻗으며 일어났다.

그러곤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걸음을 옮기자 스크린의 달이 붉게 물들며 모양이 바뀌기 시작했다.

“헐, 월식인가 봐!”

정답이었다. 지원의 동선을 따라 멤버들 한 명 한 명 머리 위로 조명이 켜지자 달이 함께 기울며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정은찬, 홍수민, 주혜성, 제현호, 오영환을 지나 마지막으로 제일 오른쪽에 몸을 숙이고 있던 나까지.

마침내 달이 완전히 붉게 물든 순간 비트가 시작되었다.

[Paradox,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함부로 평화를 외쳐 보지만.]

매끄럽게 이어지는 전주에 객석까지 불이 단숨에 켜지며 대형을 바꿨다.

온통 불이라도 옮겨붙은 것처럼 붉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사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린 계속 엇나가기만 해.]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솔직할 수 있다면.]

도입부를 시작한 지원이 마치 불을 옮겨붙이는 것처럼 영환에게 파트를 넘기자 비트가 한층 더 웅장하게 바뀌었다.

[더는 아픔도 이별도 후회하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미래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게, 적절한 밸런스를 잡은 덕인지 촌스럽다거나 오글거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뒤쪽을 향해 돌아선 대형 사이로 센터인 혜성이 이동하며 중앙으로 돌아와 포인트 안무를 하면 1절은 끝.

[평화를 말하면서 빼앗으려 하는 넌.]

[진짜 원하는 게 뭐야. Tell me what you want.]

‘가사가 근본적으로 낡은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무슨 ‘역전 앞’도 아니고….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렸는데 신경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곧이어 내 첫 고음 파트가 이어졌다.

[말해 줘.]

내가 앞으로 나오자마자 환호성이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 눈이 커졌지만 머뭇거리는 일은 없었다.

[너를 지금 느낄 수 있게-!]

쭉 끌고 가는 고음의 샤우팅과 함께 나머지 애드리브를 이어 가는 사이 다른 멤버들은 군무를 펼치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공짜로 봐도 되나? 나 양심이 너무 찔리는데?”

“대박이다…. 뮤지컬 보는 거 같아….”

자연스럽게 다른 멤버들이 뒤로 빠지면서 메인 댄서가 빛날 차례가 되고, 제현호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잘하긴 진짜 잘해.’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사람을 찾아야 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것뿐이라면 너무 아까울 정도로.

큰 키에 탄탄하면서도 둔해 보이지 않는 비율까지. 팔다리가 길면 비율이 망하기 쉬운데 자기 팔다리 길이를 못 가눈다는 느낌이 전혀 없어서 그런가?

둔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뗄 수 없는 압도감만 느껴졌다.

[Paradox, Paradox, Paradox.]

[온통 모순뿐인 세상.]

뒤이어 최대한 깔끔한 비트로 묻어 버리는 것이 상책인 후렴구도 끝나고.

이제 드디어 정은찬이 스스로를 증명할 차례였다.

‘하필 전 순서가 박하연네 조가 걸릴 줄이야.’

기껏 부등부등 등 떠밀어서 할 수 있다 아이고 잘한다 칭찬해 놨더니만.

직전 조가 영인이 이끄는 조가 걸려 버렸다.

블랙온의 마지막 히트곡이었던 해무(海霧)를 커버한 영인의 조는 짜증 날 만큼 괜찮았다.

크게 걱정 안 했다만.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주목받는 멤버들만 너무 파트가 몰려서 아쉬울 뿐 무대 그 자체로는 비할 데가 없었다.

‘그래도 더 만든 건 우리지만.’

오영환은 단점은 덜 보이고 장점만 보이도록 잘 숨겨 놨고, 이제 여기서 정은찬만 잘해 주면 된다.

‘그랬는데….’

단순히 칭찬하려고 갖다 붙인 표현이 아니라, 무대 위의 영인과 하연은 마치 별세계에서 데려온 이종족 같았다.

일단 피지컬부터가 압도적이었다.

출연진 중 최장신인 영인의 프로필상 키가 189였나. 이제 19살밖에 안 됐으니 저렇게 먹어 대면 더 크겠지.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엔 확실하게 190을 넘길 터였다.

‘박하연도 188… 이었나.’

99명 중 얼마 되지도 않는 반올림 190들이 페어로 버티고 있으니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키가 큰데 머리는 또 작아서 둔해 보이지도 않고.

둘 다 호감형의 예쁘장한 얼굴들이라 팬이 무서운 속도로 불고 있었다.

압도적인 반응을 목도한 은찬은 다시금 기가 팍 꺾여 버렸다.

‘왜 우리보다 일찍 하고 난리야!’

나는 영인의 등짝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은찬에게 말했다.

‘박하연이랑 형은 수요자가 다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이게 무슨 헛소리야 싶겠지만 진심이었다. 싸가지 없는 줄 알았는데 부끄럼 많고 귀여운 구석도 많은 천재 프로듀싱멤.

수요 많지, 확실히.

연예계는 1위 독식의 세계가 아니다. 누구를 굳이 이겨 넘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 팀에 필요한 건 형이니까 형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세요.’

못하면 너도 밀어 버릴 거다.

진심 99%의 발언은 숨긴 채 무대에 올라 이제 결과를 확인할 차례였다.

앞으로 나선 은찬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무대 앞을 내려다보았다.

각양각색의 라이트와 슬로건과 배너를 흔드는 팬들.

그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화면을 흔드는 팬을 발견한 순간 은찬의 눈이 빛났다.

[이제 모두 멈춰. 인생은 끝없는 tour.]

[분쟁은 no more- 약육강식의 법칙, 더 이상 통하지 않게.]

[Notorious 변명 따위 그만. 내 손으로 끝낼 Paradox.]

꽤 긴 호흡이었는데도 흔들림 없이 잘 끝냈다. 나는 그것 보라는 듯 동선을 이동하며 은찬의 어깨를 쥐고 가볍게 토닥였다.

만나서 안 즐거웠고, 이제 정말 끝이다!

체감은 2년 같았던 3차 미션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

“고생했어, 정말로.”

탁, 기숙사의 문이 닫히는 순간, 주혜성이 그동안 꾹 참고 있었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누가 보면 뭐 데뷔조라도 확정된 줄 알겠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저는 별거 안 했는데요, 뭐. 은찬 형이 다 했죠.”

거짓말이었다. 은찬이 다 한 건 편곡과 연출 정도지 그 뒤에 있었던 오만 고통스러운 일을 담당한 건 나였으니까.

리더 같은 거 해 봤자 고생만 죽어라 하고 의미 없다니까.

그렇게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는데 파트는 고음 셔틀에 연출적으로도 다른 놈들 밀어주느라 나는 주로 배경이었다.

‘그래도….’

무대가 끝나고 누군가 얼떨결에 박수를 친 것을 시작으로 유일하게 박수갈채를 받은 팀이 된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멘토단 평도 굉장히 좋았다. 서사가 있는 하나의 작품을 본 것 같은 기분이라나.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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