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대체 불가능한 (1)
“무슨 소리야?”
이렇게 시치미를 떼시겠다? 나는 결정적인 도움을 준 만큼 앞으로 협조와 보답을 기대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중에 남의 파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더 볼 것도 없이 형일걸요?”
물론 시키면 잘할 놈들이야 여럿이지만.
그걸 이 짧은 시간 안에 정은찬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난 못 해….”
정은찬이 주입식 귀여움을 잔뜩 당했을 때처럼 말을 더듬거리더니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아뇨. 할 수 있어요.”
“모, 못 한다니까! 억지 부리지 마!”
정은찬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더니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형, 이거 빈말로 하는 얘기 아니니까 흘리지 말고 한 번에 바로 들으세요.”
정은찬은 내게 빚을 졌다. 이 프로그램이 다 끝나고도 계속 갚아야 할 수준의.
사람이 호의를 베풀었으면 보답을 해야겠죠?
나는 친절하게 눈웃음까지 쳐 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형 비위 맞춰 드린 건 그게 저희 무대에 가장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어요. 아시죠?”
정은찬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제 무대를 망치는 건 뭐든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그것도 보셨으니까 아실 테고.”
톡톡, 내가 손등으로 벽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딪히는 소리를 내자 정은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부탁이 아니라 리더로서의 지시예요. 형이 하셔야 해요.”
잠시 내려앉은 침묵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주혜성이 유지원에게 중얼거렸다.
“무섭다, 인수….”
“그, 나, 나쁜 의도는 아니니까….”
나는 그쪽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거기 지방방송 끄시고요. 다시 연습 재개합니다. 형 이따 재녹음해야 하니까 빨리 안무 맞춰 보고 녹음실로 보낼 거예요.”
하자 있는 인간이 없는데 어딜 ‘감히’ 내 무대를 부족하게 만들어.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
그 후 순식간에 준비된 연습 시간이 끝나고 곧바로 스튜디오 녹화 당일이 찾아왔다.
‘순서가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
스튜디오 녹화는 공개 방청 무대보다 하루 앞선 일정이었다.
그 말은 즉, 최종 리허설에서 들을 수 있는 멘토 체크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촬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제 와서 멘토 코멘트를 듣는다고 뭘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물론 다른 멤버들까지 우르르 달려들어서 잘한다 잘한다 박수 쳐 주고 난리가 났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아직도 자신감이 없는 거냐고.
녹음실에서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어디 가고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열이 뻗치기도 했다.
물론 제현호나 나에 비해서는 퍼포먼스든 보컬이든 부족한 게 맞지만.
‘이번 무대에 필요한 수준은 충분히 되는데 대체 뭐가 모자란다고….’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조명과 카메라 세팅을 마치고 우리를 스테이지 중앙으로 불러 모았다.
“자, 바로 준비해 주시고요. 슛, 하면 바로 촬영 시작합니다! 스탠바이~!”
마침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순간 나는 내 앞쪽에 앉아 있는 은찬에게 속삭였다.
“형, 저는 제 안목을 믿어요.”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걸 증명하는 건 정은찬의 역할이었다.
그건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길었던 스튜디오 촬영이 끝나고 다들 기진맥진한 채로 카메라 뒤편을 향해 도망치듯 흩어졌다.
“저 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앉아도 되나요?”
“이제 메이크업 지워져도 되죠?”
“고, 고생하셨습니다!”
각자 등 뒤로 잔뜩 흐른 식은땀을 닦아 내며 손부채질로 땀을 식히기 바빴다.
전원 라이브 녹음을 감행한 바람에 다들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고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드디어 끝났다….”
홍수민이 거의 바닥에 드러눕듯 몸을 기대며 울먹이기에 나는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아니지. 내일 방청 무대까지 해야 끝이지.”
그러자 수민이 도끼눈을 뜨며 울먹였다.
“안 들을래! 내일까지 못 들은 걸로 할래!”
나는 의상 더럽히지 말고 일어나라는 듯 발끝으로 수민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빨리 탈의실 가서 옷부터 벗고 와. 얼른 클리닝 맡기고 내일 또 입어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옆에서 빨리 옷을 받아 가야 하는 스태프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헉. 죄송합니다!”
다른 멤버들도 화들짝 놀라서 우르르 탈의실로 달려가는 와중 단 한 명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정은찬도, 주혜성도, 둘 다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타입이었다.
‘생각을 못 하게 해야 해.’
나는 성큼성큼 정은찬에게 다가갔다.
“저는 틀린 선택 안 해요.”
죄송해요. 사실 구라예요.
하지만 이미 너무 처참하게 실패를 해 봐서, 그리고 내겐 오지 않았던 기회가 내게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곱씹었던 세월이 너무 길어서.
지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까 저 의심하지 말고 오늘 한 대로만 하면 돼요.”
그러곤 곧바로 다른 녀석들을 따라 탈의실로 향했다.
뒤에서 정은찬의 시선이 따끔하게 느껴졌지만… 뭐,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
마침내 방청 무대 당일.
겨우겨우 방청 표를 구한 인덕은 승리의 눈물을 흘리며 아침부터 아트홀 주차장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 쏟아부을 시간은 충분했다.
‘이거 하나 보러 오겠다고 내가 대체 무슨 고생을….’
지난주 3화가 방영되면서 시청률이 4%의 벽을 넘어섰다. 웬만큼 성공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시청률이었다.
KMB에서 기획한 지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전 회차 평균 시청률이 1% 미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KMB 사옥 앞에 인수 사진을 걸어 놔도 될 만큼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겟데뷔의 단체곡인 ‘Get debut with me’가 울려 퍼질 만큼 인기몰이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광탈하는 줄 알고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3차 미션의 방청객 수는 총 1,000명. 2차 미션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난 수였으나 쏟아지는 관심은 그 이상으로 불어난 상황이었다.
분명 2차 미션 때만 해도 경쟁률이 한 자릿수 초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서는 벌써 두 자릿수를 훌쩍 넘겼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아무튼 내 한 몸 뉠 곳은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번에는 지인 버스를 타고 입장했던 인덕이었으나 이번엔 어림도 없었다.
자비 없는 1인 1매 추첨에 인덕은 아이돌로 만난 사이를 제외한 지인들의 명의를 박박 긁어모아야만 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진짜 미안한데 (전도 X, 결혼 X, 다단계 X, 급전X 오타쿠 O) 나 방청권 추첨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을까ㅠㅠ?]
가족은 물론이요, 친척에 남사친과 남자 동기들, 그리고 이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친했던 동료에게까지 연락했다.
10명을 넘게 섭외했는데 이 중에 한 명도 안 되면 내가 KMB 본사로 불 지르러 간다.
인덕이 저주라도 퍼붓듯 온 힘을 다해 기원한 덕분일까.
대다수가 무참히 실패한 결과물을 돌려준 그때 인덕의 막냇동생이 당당히 당첨 결과를 알렸다.
‘누나가 너 군대 가면 치킨 세 번 넣어 줄게!!!’
이제 고등학생인 동생이 대체 몇 년 후의 일을 말하는 거냐며 쫑알거렸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방청권을 손에 넣은 인죽은 마침내 위풍당당하게 주차장 대기 줄 한편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문득, 주변에 자리 잡은 자신과 같은 상황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인수의 팬이 절반은 되는 것처럼 보였던 2차 미션과 달리, 이번에는 첫방 이후에 모집한 추첨이라 그런지 전보다 팬덤이 다양해 보였다.
‘그래도 얼추 누가 인기 많은지는 알 것 같다만.’
하필 인덕이 선 줄 앞뒤로 가장 상종하고 싶지 않은 팬덤이 자리 잡는 바람에 더더욱 고통이 밀려들었다.
[황금 메보 아진]
황금 메보는 또 어디서 들고나온 단어야.
황금 성대나 황금 보컬로 별명을 가져가려고 하다가 인수랑 비교된다고 욕을 하도 먹어서인지.
뒤의 두 글자만 슬쩍 바꿔서 슬로건을 만들어 온 게 웃음이 나왔다.
인덕도 처음에는 아진에게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그냥… 뭐… 다른 연습생들보다 봐줄 만한 정도인가.’
그렇다고 눈을 사로잡을 만큼 잘하는 건 아니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불쑥 공감성 수치가 느껴지는 행동을 해서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래,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개새X들이 우리 인수 역바이럴 하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아진의 개인 팬들은 NO클러스터의 팬들과도 양상이 달랐다.
그들은 인수가 친정처럼 오랜 세월 돌봐 준 소속사를 버리고 튄 배신자라고 믿었다.
배신자 따위를 NO 보컬 라인의 후계자 취급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아진이 원래 받아야 할 관심을 인수에게 빼앗긴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걔가 그릇이 그거밖에 안 돼서 관심을 못 받는 걸 어쩌라고.’
그러니 인수가 원래 본인의 위치로 돌아가고, 아진에게 그 관심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멍청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한 건 재앙이라고 했던가.
단톡방까지 팠는지 인수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이 올라올 때마다 순식간에 비추천이 수십 개씩 찍혔다.
‘아티스트 본인에게는 별 악감정이 없다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2화를 본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이거… 100% 당사자들끼리도 사이 개판인가 본데?’
별로 비중이 크지도 않았지만 2화 방영을 기점으로 아진의 악성 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진은 그걸 보란 듯이 부추기고 있었다.
[@Acejean_no]
[항상 힘이 되어 줘서 고마워요! #겟데뷔_황금성대_아진 너무너무 기분 좋은 칭찬! 더 열심히 노래할게요!]
그리고 그게 역으로 어디가 황금 성대냐 놀림감이 되고 말았지만.
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인수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봐라.’
바로 가계정이라도 파서 아진단 수준 알 만하다 고발을…. 인덕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부끄러운 생각이람. 이번엔 정말 행복한 덕질만 할 건데.’
시기와 암투가 난무하는 고통스러운 과몰입은 안녕이다!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좋은 얘기만 하고 좋은 것만 보겠어.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을 켜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를 4시간, 오랜 기다림 끝에 미니 팬 미팅을 위해 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인수!”
“서! 인! 수!!!”
“현호야!”
“유지원~!”
“서인수!!!”
이전에 비해 확연히 불리는 이름이 다양했다.
‘드디어 나왔다. 내 부귀와 영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인수는 화려한 얼굴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이걸 위해 양옆에서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아진 찬양 공격을 견뎌 온 것이다.
‘의상 미쳤나.’
무광 블랙의 가죽 바지에 품이 넓은 반팔 블랙 셔츠. 이 깔끔한 조합만으로도 돌아 버리겠는데 흉부 아래를 꽉 조이고 있는 하네스까지 너무 치명적이었다.
인덕은 추첨에서 광탈한 XOXO가 빌려준 입문용 카메라로 손을 덜덜 떨며 연사 버튼을 눌렀다.
‘어느 배우신 미친놈이 저걸….’
인수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완벽한 비주얼과 자신만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았다.
간신히 셔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인죽은 비로소 인수의 팀원이 통상적인 8명이 아닌 7명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