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천재성의 대가 (1)
분명 다 같이 말 편하게 하자고 했던 거 같은데. 엉망진창으로 꼬인 호칭만큼이나 파국으로 치달은 분위기에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그럴듯한 황금 사과인 줄 알았는데.
‘열고 나니 이거 완전 독 사과잖아.’
직전 무대를 같이했던 조원들은 멘탈 괜찮은 건가 뒤늦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팀워크는 무슨. 나머지 7명의 팀원들을 볼링핀 삼아 화끈한 스트라이크를 선보이는 재앙의 주둥아리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럴 거면 아진네 조로 가서 폭탄이나 될 것이지.’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은 와중 먼저 분위기를 수습하러 나선 건 주혜성이었다.
“희록이가 이번 곡이랑 컨셈이 조금 잘 안 맞아서 어색해 보이는 것 같은데 말이 너무 심하다. 내 파트 조금 나눠 줄 테니까 수정하면 안 될까?”
주혜성이 협상 아닌 협상을 시도하자 유지원 또한 옆에서 거들었다.
“저, 제 것도 좀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이 주옥같은 분위기를 수습해 보고자 하는 F들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리더인 내가 잠자코 우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로봇 심장 T라서가 아니었다.
‘내 파트는 진짜 소화 못 해.’
거의 대부분이 애드리브 고음으로 이어지는 파트였다. 폐활량과 안정적인 발성이 반드시 뒤받쳐 줘야 했다.
아니면 저음으로 훅 떨어졌다가 다시 힘있게 고음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적인 숙련도가 필요하거나.
이런 파트를 준다고 하면 희록이 소화할 수도 없거니와 파트 없다고 징징거렸다고 엿 처먹어 봐라 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폭력 비마찰 주의자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우리의 조별 과제 대마왕 정은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왜?”
아니, 왜냐니. 그편이 이 X같은 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는 방향이니까 그렇게 하자는 건데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물으시면.
‘미치겠다, 별들아….’
나는 최대한 악의가 없음을 어필하기 위해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어쨌거나 저희 협동 무대잖아요. 다 같이 서로 빛날 수 있는 방향으로 협력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 파트는 희록이가 서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정은찬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협동이기 이전에 경쟁이지. 여기 놀러 나왔어?”
놀러 나왔겠냐고요.
X발, 나도 싫어. 임희록이 못마땅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조별 과제의 위기를 가져오는 이 상황을 원한 건 아니었다고.
얼결에 임희록을 실드 치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야 하는 이 상황이 고통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나까지 여기서 정은찬에게 휘둘리면 미션은 정말 망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한 발 앞은 온통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
결국 주옥같았던 분위기를 얼추 봉합한 건 놀랍게도 정은찬 본인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시간 끌지 말고 자신은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는 파트를 바꿔 줄 생각이 없으니 편곡 초안이나 듣고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다.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임희록 불쌍하니까 파트 줘야 한다는 거 말고. 그럼 바꿔 줄 테니까.’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 ‘바꿔 줄 테니까’.
조별 미션에서 난생처음 들어 보는 문장의 등장이었다.
‘이 인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여기가 진짜 킬 앤 힙인 줄 아나? 크루 리더인 프로듀서한테 찍히면 그대로 탈락하는 시스템이게?
안타깝게도 여기는 킬 앤 힙이 아니었고, 우리는 다 같이 고만고만한 연습생 신분이지 프로듀서님과 그 따까리들이 아니었다.
어디 얼마나 잘했는지 들어 보고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지.
결연했던 각오는 음원을 10초 재생하기도 전에 무너져 내렸다.
‘와… 미친.’
‘대박….’
‘…….’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걸 3시간 만에 해 왔다고?
정은찬이 가져온 건 원곡을 한번 싹 해체한 다음 거기서 요즘 트렌드에 맞게 세련되게 손댈 수 있는 부분만 빼서 만든 곡이었다.
그 시절 사회 저항적인 반항아 이미지는 그대로 가져왔으면서 묘하게 미래 지향적인 느낌이 나는 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는 직접 멜로디를 만든 거야?’
흥얼흥얼 따라부르기에 너무 좋은데, 원곡에서는 못 들어 봤던 부분 같아서 의아한지 주혜성이 모두를 대표해서 묻자 정은찬이 기고만장한 무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뭘 하나 봤더니 곧장 작곡 프로그램으로 재생해서 들려주겠다는 심산 같았다.
그리고 딸깍, 마우스 패드 누르는 소리와 함께 멜로디를 추출한 원곡의 파트가 재생되었다.
‘와….’
이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정은찬이 한 건 후렴 부분의 빠르게 지나가는 기계음을 늘려서 멜로디를 좀 더 선명하게 손댄 거였다.
원곡에 이런 부분이 어디 있냐 싶었는데, 듣고 나니 아 여기! 하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사랑 파트 거기 있으니까 불러 봐.’
불러 보자, 도 아니고 불러 봐.
컨셉인지 아니면 성격인지 이제는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다들 자기도 모르게 가사집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편곡된 음원에 맞춰 파트대로 불러 본 우리는 다 같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뭐라 불평을 할 수가 없네.’
정은찬의 재능이 단순히 작곡 좀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두가 정말 제일 어울리는 파트에 배치되어 있었다.
‘듣는 귀도 기가 막히게 좋은가 보네.’
지금껏 다른 연습생들이 하는 무대를 봤다고 해 봐야, 등급 평가와 2차 미션이 전부일 텐데.
그 짧은 사이 각자의 개성과 장단점을 파악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짜 놓은 것이었다.
‘천재는 천재가 맞긴 한데….’
원래 천재는 다 바보 아니면 또라이인가? 그렇다면 정은찬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쓰레기 같은 분위기 속에 첫 조별 연습을 마치고 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재배치된 기숙사에 입소하고 각자 원하는 사람은 연습실을 빌려 추가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유지원이랑 제현호만이라도 데리고 가서 연습할까. 아, 오영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머지 멤버들은 아직 잘 따라와 줄지 확신이 없었고 정은찬은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슬쩍 시스템을 불러내서 서브 에피소드 미션 내역을 확인하자 앞자리가 7에서 6으로 바뀌어 있었다.
‘3일 안에 좀 속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친해져야 하는데….’
나는 조금 전 정은찬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해져?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차라리 주리를 틀어서 자백하게 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 정도로 난이도가 높아 보인다는 뜻이었다.
‘일단 기숙사 가서 짐부터 풀고 생각하자.’
어차피 개별 연습은 할 거니까, 그때 다른 조원들이랑 얘기해 봐도 괜찮고.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 배정표 앞에 선 나는 영인과 방이 갈린 것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엇.”
“앗.”
영인도 동시에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아쉬움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 갈렸네.”
“그러게.”
이렇게 탈락자 한 번 나올 때마다 계속 룸메이트가 바뀌는 건가.
때때로 혼자 있을 때는 별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던 연습생이 케미가 잘 맞는 연습생과 만나 돋보이기도 하니 나쁜 시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좀 귀찮은 거지.’
그리고 룸메가 혹여 어떤 최악의 케이스가 걸릴지 장담할 수 없으니 그게 좀 피곤한 것도 있고.
그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재밌는 룸메 만나면 소개해 줘요.”
영인이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먼저 배정된 방을 향해 떠났다.
재밌는 룸메는 무슨. 지금으로서는 임희록이나 아진, 정은찬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셋은 싫어.’
아, 이규민도 싫긴 한데… 그놈은 어쨌거나 나한테 피해를 입히진 않을 테니 최악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다.
아무쪼록 좀 조용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런 나의 소박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방에 도착해서 확인한 룸메는 말 그대로 정말 조용하기 짝이 없는 연습생이었다.
“아, 안녕….”
주혜성이 나를 보고 머쓱하게 인사했다.
이쪽도 사실 그렇게 편하진 않은데…. 그래도 정은찬보단 낫다. 나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기로 하며 주혜성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깔끔하게 떨어지는 존댓말에 주혜성이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말 편하게 해…! 형이라고 유세 부리고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그래 보여요.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안으로 성큼 들어가 짐을 풀었다.
기본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싫지 않았다. 조금 전 연습실에서 파악한 주혜성은 실력에 비해 너무 과소평가된 사람이었고 자신감과 자존감 또한 지나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지난 조별 미션이 워낙에 헬이었어서… 그럴 만하지, 솔직히.’
혼자 엄청 애쓴 거 같던데 결과적으로 순위는 거의 탈락 직전까지 하락.
멘탈이 무너지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존댓말이 더 편해요. 오늘 연습한 거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꼭 정은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괜찮은지 의견을 듣고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주혜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무리 지금 1위 연습생이라고 해도 6살이나 연하인데 이렇게까지 쫄 게 있냐….’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자 주혜성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분위기가… 조금… 어렵긴 한데 괜찮았어.”
이게요?
나는 놀라서 옷장에 넣어 두려던 잠옷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어떤 팀 분위기를 헤쳐 오신 것인지? 궁금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저는 조금 딱딱하지 않나 싶어서 걱정했거든요.”
조금이 아니라 너무 많이 딱딱했지. 내 앞날이 걱정될 정도로….
혹여 분위기가 숙연해질까 싶어 슬쩍 주혜성의 표정을 확인하자 다소 긴장한 듯했지만 굉장히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나는 네가 정말 대단해 보였어. 은찬이가 그렇게 세게 나오는데 하고 싶은 말도 또박또박하고….”
제가요?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소리였다.
“뭘요. 리더가 돼서 결국 해결도 못 하고 그냥 은찬 형 하고 싶으신 대로 다 결정됐잖아요.”
아… 혹시라도 이게 정은찬 뒷담 까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내가 한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은찬이가 아무래도… 너무 잘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까지 생각한 순간 주혜성이 갑자기 급커브를 틀었다.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더라. 제일 나이 많은 형이 돼서, 은찬이한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그냥 민폐만 끼친 것 같아서….”
갑자기요?
주혜성에게서 퍼뜩 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내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매번 잘 안되는 걸지도…. 민폐만 잔뜩 끼치고….”
뭐라는 거야.
‘그딴 생각을 왜 해.’의 정석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떨어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