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이것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3)
“여기 저희 연습실인데요.”
“?”
제현호의 단호한 발언에 다들 당황한 듯 멋쩍은 정적이 흐르다가 비안이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맞아요! 제가 간식 전달할 겸 잠깐 들렀어요!”
밀키즈 데뷔가 몇 연도였지? 94년인가, 96년이었나.
국민 매니저 대표이자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데뷔한 까마득한 대선배 비안. 그런 비안을 대하는 제현호의 태도에 뒤따라오던 수민은 얼음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
제현호가 이윽고 비안의 뒤에 놓여 있는 간식 박스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 들어 보니까 조 내에서 센터 경쟁전 같은 걸 하기로 했다면서요? 나도 구경해도 되죠?”
제현호가 아무리 마이 웨이여도 이 상황에서 안 된다고 할 위인은 아니었다.
“네.”
다만 좀… 더 붙여도 될 것 같은 인사치레가 너무 생략되어 있을 뿐이었다.
“좋아요, 그러면… 주혜성 연습생만 돌아오면 바로 한번 볼까요?”
“넵.”
이 어색한 분위기 어쩔 거야…. 주섬주섬 일단 PPL의 목적에 맞게 간식 상을 차리고 있으려니 곧 주혜성이 돌아왔다.
“????”
앞선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주혜성의 표정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주혜성이 잠시 비안을 빤히 쳐다보더니,
“죄송합니다!!”
머리를 바닥에 닿을 기세로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문짝에다 바보가 되는 트랩이라도 달아 놨나.
문 너머로 주혜성이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튼 이 자리를 피하자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여기 맞아요!!”
선배 당황자인 수민이 후다닥 달려나가 주혜성을 다시 불러들였다.
“오… 아? 아아…!”
수민에게 붙잡혀 돌아온 혜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인류와 같은 반응이었다.
‘다들 덤 앤 더머도 아니고….’
서로 누가 더 바보인지 대결이라도 하냐. 마침내 곧 타이밍 좋게 임희록도 도착해서 한 시간 동안 준비한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대단한 창작을 해 왔을 거란 기대는 안 한다만.’
그나마 좀 궁금한 건 제현호가 짠 안무일까. 같이해 보니까 제법 센스가 있어서 여러모로 악마의 재능이다 싶었다.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가졌으면 최고의 재능이었을 텐데.’
아이돌엔 그다지 관심 없고 오로지 얼굴을 알리기 위해 업계에 뛰어든 녀석이 불필요할 정도로 재능이 차고 넘치니….
‘아깝다, 아까워.’
협력을 약속한 대가로 파이널 미션 전까지는 살아남도록 도와준다고 했으니 계속 끌어 주긴 할 거지만.
언젠가는 두고 가야 할 패라고 생각하니 아쉬운 맘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러면 쭉 한번 볼까요?”
비안의 주도하에 바깥에서부터 서 있던 순서대로 오리지널 음원에 맞춰 준비해 온 안무를 선보였다.
“지금 정은찬 연습생이 편곡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이게 최종은 아니고 나중에 수정할 거고?”
비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애초에 포인트 안무였기 때문에 최종본과 완벽하게 어우러질 필요는 없었다. 음원에 맞게 안무를 수정하고 배치하는 건 나중에 할 일이고.
일단 봤을 때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가 관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적합한 안무는….
“리더 생각은 어때요?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한번 리더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데.”
아니, 왜 저한테 화살을… 이라고 해도 뭐… 말 그대로 내가 리더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잠시 턱을 짚고 곰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주혜성 연습생의 안무가 가장 적합한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간결했다. 홍수민은 곡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 발랄하고 아기자기한 손동작을 들고나왔다.
임희록은 뭐… 이걸… 안무라고 봐줘야 하나? 그건 안무가들한테 너무 무례하지 않나? 싶은 수준이었고.
제현호가 짜 온 건 제현호 본인이 하기에는 상당히 그럴싸했다.
‘문제는… 다 너처럼 팔다리가 쭉쭉 긴 게 아니란 말이다.’
이 팀에서 장신이라고 할 만한 멤버는 나와 제현호, 그리고 유지원이 전부였다.
홍수민이… 172쯤 되나. 비율은 나쁘지 않았지만 결코 팔다리가 쭉쭉 뻗은 장신은 아니었다.
주혜성이 170 후반쯤 될 거 같고, 임희록도 170 초반 선이었다.
제현호 본인이 가진 피지컬을 십분 활용하는 안무였기 때문에 키가 작거나 팔다리가 짧으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저걸 채택하면… 단신 팀원들 보고 엿 먹으라는 거나 다름없겠지.’
내가 자기편을 들어 주지 않은 게 퍽 당황스러웠는지 제현호가 평소보다 아주 약간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짐짓 잠자코 있으라는 듯 제현호에게 눈짓을 했다.
“제현호 연습생 안무도 저는 마음에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멤버들 간의 밸런스를 생각하면 주혜성 연습생의 안무가 좀 더 적합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자리를 비웠지만 정은찬 역시 장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동생 쪽이라면 모를까.’
그러니 이게 최선이다.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비안을 바라보자 비안이 정답이라는 듯 싱긋 웃었다.
“서인수 연습생 안목이 좋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거든. 혹시 내 얘기가 영향이 갈까 봐 먼저 물어본 거였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재주를 부린 건 다른 네 명인데 칭찬은 졸지에 내가 받게 되어 짐짓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다들 열심히 준비해 준 덕분에 제가 리더로서 수월하게 이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됐으니까 얼른 가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고충을 삼키며 하하 웃어 보였다.
***
결국 비안이 연습실을 떠난 건 그 후로 20분이 더 지나서였다. 다른 연습생들이랑은 촬영 안 해?
아니면 걔들 다 둘러보고 우리 쪽으로 온 건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건 변함없었다.
‘그냥 우리끼리 의논하게 놔두는 쪽이 편하다고….’
게다가 나가기 직전에는 마이크에는 잡히지 않도록, 옷깃에 꽂은 핀 마이크를 쥐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쩜, 가까이서 보니까 눈이 정말 많이 닮았네요.”
누구랑? 되묻기 전에 비안이 떠나 버리는 바람에 나는 벙찐 채로 비안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다….’
비안이 가고 난 뒤 간식도 먹고 포지션도 다 정해 놓고 나니 곧 정은찬도 연습실로 복귀했다.
돌아온 정은찬은 눈이 원래 안 좋기라도 한지 얼굴이 반쯤 가려지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포지션은? 정했어?”
시간을 그렇게 많이 줬는데 설마 안 했느냐는 듯한, 숙제를 검사하러 온 호랑이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정했어요.”
“어떻게?”
“센터 주혜성, 메인 보컬 서인수, 리드 보컬 유지원, 서브 보컬 홍수민, 오영환, 메인 댄서 제현호, 메인 래퍼 임희록이요.”
서브 래퍼는 본인이 요청한 대로 정은찬이었다.
‘솔직히 서브랑 메인이 반대가 되어야 맞는 것 같은데….’
저놈한테 진짜 메인 래퍼를 맡겨도 되나. 본인도 썩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컬이 그 수준인데 보컬을 어떻게 줘.’
편곡을 어떻게 했을지 들어 봐야 알겠다만. 임희록의 보컬 실력은 솔직히 절망적이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은 몰랐는데.’
자기 음역대가 맞는 곡은 그런대로 들을 만하게 부르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보통은 하는 줄 알 뻔했는데.’
문제는 그 음역대가 너무 좁았다. 조금만 고음으로 올라가도 가성으로 넘겨 버리는데 그다지 듣기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이게 공개되면 받을 수 있는 절망 편의 반응을 겟데뷔에 남은 연습생 수만큼이나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저음에 강하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애매함 그 자체였다.
만약 우리에게 보컬을 담당할 인재가 정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서브 보컬로 넣어 줄 수 있겠다만.
‘그러기엔 오영환도 보컬이 나쁘지 않아.’
이 팀에 나와 유지원이 워낙 강력하게 버티고 있어서 그렇지, 다른 보컬 약세 팀으로 갔으면 리드 보컬 정도는 따냈을 실력이었다.
‘춤선이 솔직히 좀 뚝딱거리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보컬로 커버한 케이스였군.’
춤은 냉정하게 말해서 죽어라 하면 봐줄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프리 스타일이나 배틀 이런 거 시킬 거 아니잖아?
회사에서 고용한 전문가가 안무 다 짜 주고 트레이닝도 빡세게 시키면 정말 절망적인 몸치가 아닌 이상 웬만큼은 한다.
‘한 2~3년 후에는 꽤 괜찮겠는데.’
그래도 아직은 아니지.
장래가 기대되지만 당장 전면에 내세울 실력은 아닌 게 아쉬웠다.
“…….”
임희록을 제외하고 나머지들은 그런대로 포지션 지정에 수긍을 한 와중, 정은찬에게 최종 컨펌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래서야 리더가 저쪽 아닌가?’
나이는 저쪽이 더 많긴 하지만… 어쨌거나 리더 롤에 이름이 올라간 건 난데. 묘한 불편함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파트 배분해 줄 테니까 기다려.”
‘?’
뭐라는 거야.
파트 배분을 다 같이 협의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해 준’다고?
다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황당해하기도 잠시, 정은찬이 회의용으로 비치된 이면지에 펜으로 죽죽 선을 긋더니 가사를 적어 나갔다.
‘가사는 그대로인데….’
개사는 안 하나? 아니면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은찬의 입이 꾹 다물린 채로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여서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멀뚱멀뚱 일곱 명이 앉아서 정은찬이 떠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딱히 정은찬 혼자 하기를 바라는 게 아닌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건 말을 해야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 잠시만요.”
그러나 나의 시도는 정은찬의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
정은찬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가사 구절 사이로 직직, 슬래시를 그어 가며 나눌 뿐이었다.
그러다 겨우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건 본인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뿐이었다.
“형광펜 있어? 색 종류별로 다 줘.”
뭐, 이런 황당한…. 연습실 천장에 달린 촬영용 카메라가 빨간 불빛을 영롱하게 빛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빨리.”
정은찬의 재촉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펜을 내밀었다.
그러자 슥슥, 보컬과 랩을 구분하여 파트를 나눈 정은찬이 파트마다 담당을 표시했다.
마침내 정은찬의 기나긴 독불장군 대장정이 끝나고.
더 손댈 수도 없게 최종본이라는 듯 내민 파트를 본 우리는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을 떠올렸다.
‘이거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이게 뭐예요?”
나보다도 먼저 임희록이 반발했다.
그럴 만했다. 왜냐면 MR으로 표기된 희록의 파트가 거의 눈에 띄는 수준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뭐긴 뭐야. 파트지.”
은찬이 그걸 못 알아보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왜 자기 파트가 그렇게 적냐는 뜻이잖아.
살얼음판같이 변한 분위기에 아까 먹다 남긴 떡볶이만큼이나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걸 제가 모르고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요. 제 파트가 솔직히 너무 적다는 생각 안 드세요?”
희록이 나름 앙칼진 반격을 해 보았으나 은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걸 왜 나한테 탓을 하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저런 동문서답을 해.
파트를 짠 게 너니까 너한테 항의하는 거잖아.
경악하기도 잠시 정은찬이 한 번 더 진실의 주둥이를 털었다.
“네가 파트를 가져갈 만하게 했으면 파트를 줬겠지. 못 할 거 뻔히 아는데 내가 뭐, 너더러 무대 망치라고 파트를 더 줘야 할까?”
‘X됐다.’
이 팀, 무대를 올릴 수나 있는 건가?
팀으로 모인 지 5시간도 되지 않아 눈앞이 컴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