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이것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1)
비안의 질문에 연습생들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뻔했다.
블랙온이 케이팝 역사에서 가지는 상징성이란 그런 거니까.
전성기가 지났다지만 여전히 막강한 코어 화력을 가진, 입 잘못 놀렸다가는 팬들에게 죽도록 까일 수 있는.
[다음 순위 변동 때는 여기 있는 연습생 중 절반인 32명이 겟 데뷔 위드 미를 떠나게 됩니다. 2주의 시간 동안 다들 최선을 다해 멋진 무대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부터는 시간을 좀 더 주려나 싶었는데, 이전 미션과 동일하게 2주뿐이었다.
‘그럼 곡 준비할 시간이 너무 짧지 않나.’
걱정이 앞선 그때 비안이 생각지도 못한 안내를 이어 나갔다.
[더불어 이번 미션에서는, 유튜브 채널을 통한 대중성 평가로 추가적인 특전이 주어집니다.]
‘……?’
대중성 평가? 또 뭔 소리야.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다시 차이점이 생겨서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무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번 미션은 방청객 무대에 앞서 스튜디오 녹화를 선진행합니다. 스튜디오 촬영본은 방청객 무대 당일 겟 데뷔 위드 미 채널을 통해 공개되며 본방연 때 특전 대상 조가 발표됩니다.]
특전은 또 뭔 소리야. 스튜디오 촬영? 다들 머릿속에 의문이 잔뜩인 그때 비안이 웃으며 손짓하자 스크린의 내용이 바뀌었다.
[자, 그러면! 특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특전 대상은 어떻게 가려지는지 많이 궁금하실 텐데요! 지금 바로 설명하겠습니다!]
비안이 힘차게 가리킨 스크린에는 은색의 글씨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회수 TOP 2]
[뮤직 패스 출연권]
“오….”
확실히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보상이었다.
‘와… 이거면 확실히….’
특전이라고 할 만하지. 뮤직 패스는 KMB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방영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내가 번번이 출연을 까인 프로그램이기도 하지.’
솔직히 좀 석연치 않은 지점이 있었다.
나보다 더 인지도 없고, 나보다 더 심각한 상태의 신인들도 많이 출연하더만.
왜 나는 번번이 출연을 거절당했을까. 내 소속사가 로비를 안 해서?
연예계의 더러운 이면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으나… NO에서 막은 게 아닌가 강한 의심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뮤직 패스에 생방송으로 출연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홍보 기회였다.
오디션 프로? 그거 다 연습생만 나오는 거라 무대 허접하지 않아?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존 아이돌 팬들에게 어필해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제작사 측에서도 조회 수로 한번 대중성이 검증된 팀에게 특전으로 출연시켜 주겠다고 하는 거겠지.
‘이건 꼭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와서 대중성 없는 노선으로 픽한 게 약간의 후회가 되었으나….
‘근데 저번에 편곡한 거 보니까 감은 있는 것 같아서….’
선곡으로 어그로는 팍 끌었으니 나머지는 일단 편곡 방향을 듣고 나서야 정할 수 있었다.
저 협업이라곤 불가능해 보이는 폭군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은찬을 바라보던 중, 팟, 상태창이 나타났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 ▷ 꽁꽁 싸맨 임금님]
[예상 수령 보상]
[▷호감도 시스템 개방]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호감도 시스템?
나 이제 대놓고 애들 호감작까지 해야 하는 건가.
머릿속으로 의아해하기도 잠시, 간단한 도표로 표현된 설명이 눈앞에 나타났다.
[호감도 시스템]
★ 등장인물별 현재 스탯 열람 가능
★★★ 등장인물별 보유 스킬 열람 및 활성화 가능
★★★★★ 등장인물별 서브 에피소드 미션 수행 가능
이게 뭐야. 필요 없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순간 추가 설명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을 수행할 경우 다양한 지수 보정 효과와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이건 필요하긴 한데.’
뭔지 모르겠지만 지수가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대로 주목받을 만한 사건을 만들어 내려면 다음 미션 무대까지는 기다려야 할 텐데.
마냥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서브 에피소드 미션을 외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일단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수락]
조용히 수락 버튼을 누르자 자세한 클리어 조건이 나타났다.
[등장인물 ‘정은찬’의 출연 이유를 밝혀낼 것]
[잔여 제한 시간 71:59:59]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좀 미션 수락하기 전에 구체적인 내용이나 알려 줄 것이지.
물론 알려 줬어도 어쩔 수 없이 수락했겠지만 알고 누르는 것과, 후에 속은 기분이 드는 건 다르니까.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닌가.’
잠시 단순하게 생각한 나는 곧 정은찬의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물어봤다간 네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하겠군.’
그래도 시도를 안 해 볼 이유는 없으니 이따 타이밍이 될 때를 노려보면 좋을 것 같은데… 생각한 그때.
무대 중앙에서 비안이 진행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건투를 빕니다! 이제 각 조별로 개별 연습실로 이동하여 미션을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중간 평가는 1주일 후. 그 안에 웬만큼의 뼈대를 만들어 놔야 스튜디오 촬영 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스태프의 인솔에 따라 연습실로 이동하며 은찬에게 물었다.
“혹시 편곡 시안은 언제까지 작업하실 수 있으세요?”
이틀? 3일은 잡아야 하나? 그래도 방향만 잡는 정도라면 빨리 나올 것 같은데…. 가늠해 보고 있으려니 정은찬이 인간미라곤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3시간이면 돼.”
‘……?’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나는 귀를 의심하며 은찬을 바라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 와중 정은찬이 쐐기를 박았다.
“작업실 가서 이따 다시 올 거니까 알아서 포지션 정해 놔. 나는 서브 래퍼로 갈 거고 너네 포지션 경쟁 신경 써 줄 시간 없으니까.”
그러곤 정말 그대로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은찬의 돌발 행동에 다들 벙찐 채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팀 진짜 괜찮나…!!??’
대체 지난 조는 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한 거야? 아니면 끝까지 해결을 못 했나?
혼란스러운 와중 말마따나 음원이 나오지 않았어도 정할 수 있는 건 미리 정해 둬야 했다.
“늦었지만 일단 소개부터 할까요?”
나는 애써 침착하게 분위기를 수습했다.
“저는 서인수고요, 나이는 스물하나입니다. 제가 제안한 곡으로 정해진 만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예의 내게 친한 척했던 A등급 연습생, 홍수민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이었다.
“앗, 그럼 저도. 저는 홍수민이고요, 스무 살이라 그냥 다들 편하게 말 놓으셔도 돼요. 아무래도 2주간 같이 준비하려면 서로 형, 동생 하는 게 좀 더 편할 것 같아서.”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럼 말 편하게 하자.”
다른 녀석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제현호와 유지원도 짧은 소개를 끝내고, 다른 연습생들도 통성명을 했다.
이제 남은 건….
‘저 녀석뿐인가.’
예의 3번째 데뷔 도전인… 아까부터 내내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어서 이렇다 할 인상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연예톡톡에서 뭐라고 했더라….’
[- 얘는 진짜 작작 나와라 좀ㅋㅋㅋㅋㅋ 재활용을 몇 번을 하는 거임]
첫 번째 데뷔전에도 다른 소속사에서 거의 확정 데뷔조로 발표되었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던 것 같았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운이 아예 최악이라면 나처럼 데뷔조로 발표되지도 못하고 연습생으로 남았을 텐데.
운이 좋다기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으니 마냥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본인도 고생이 많았겠지만….’
솔직히 데뷔를 한 번도 못 했던 입장에서는 배가 아플 만한 연습생이었다.
‘내가 지지하는 연습생이 이번이 첫 번째 기회라면 더더욱 눈엣가시처럼 보이겠지.’
우리 애는 이번이 전부를 건 첫 기회인데 쟤는 뭔데 자꾸 오만 거 다 하고 굴러와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냐, 같은.
‘아무쪼록 내가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나는 잠자코 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주혜성입니다. 아마 제가… 나이가 제일 많을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마, 가 아니라 이미 공식에서 발표한 통계만 봐도 27살의 주혜성이 최연장자였다.
“말 편하게 해요.”
나는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을 뻔한 것을 끼어들어 막았다. 그러자 홍수민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네네, 다들 그냥 말 편하게 할까요?”
나이는 대체로 18살에서 20살 사이에 포진해 있어서 맏형인 주혜성이 27, 그다음이 정은찬, 그리고 그 아래가 바로 나였다.
“그렇게 하자. 그럼 바로 포지션부터 정할까?”
정은찬이 서브 래퍼는 자기 거라며 침 발라 두고 갔으니 이제 남은 멤버들끼리 자리를 나눌 차례였다.
“네!”
“앗, 네네.”
“다들 말 편하게 하라니까.”
내가 멋쩍은 듯 웃자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그럼 반말할게…!”
거기에 막내인 유지원이 쓸데없이 비장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정말 진심으로 다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유지원이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귀엽긴 한데 빨리 포지션이나 정하자, 얘들아.
“없어. 그럼 바로 센터부터 정하자. 센터 하고 싶은 사람 3초 만에 손 들기. 3, 2, 1!”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냅다 타임 어택부터 하자 우르르 손을 들었다.
“으악, 잠깐! 잠깐만요! 타임!”
뭐가 타임이야. 손 들었으면서. 나는 아까 쭈뼛거리다가 정은찬에게 무안할 정도로 쪼인 희록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으니까 손 든 거 아냐? 센터 희망자 이렇게 넷이야?”
나는 둥글게 모여앉은 조원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손을 든 조원은… 제현호, 임희록, 유지원, 홍수민. 이렇게 넷인가.
주혜성도 뭔가 손을 들고는 싶어 하는 눈치인데 주위만 슥 둘러보더니 그대로 잠잠해졌다.
그럼 일단 빼고 생각해야지. 자기 몫 하나 제대로 챙길 줄 모르는 걸 내가 하나하나 떠먹여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서 제일 잘할 수 있다 자신 있는 사람.”
센터에 얼마만큼이나 진심인가 싶어 한 번 더 떠보는 질문을 던지자 이번에는 우르르 손을 내렸다.
정확히는 네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하여간…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 자신감만큼은 대단해.’
바로 제현호였다. 아이돌에 진심인 것도 아니면서 센터는 해서 뭐 하게? 면박을 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이 네 명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제현호였다.
‘유지원도 잘하기는 하는데 컨셉이 센터에 잘 맞을 거랑 생각은 안 들어서.’
이번 미션에서 지원은 최대한 분위기가 튀지 않도록 수납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음색이 좋으니 도입부를 맡겨도 괜찮겠고, 목소리와 비주얼은 튀되 이놈이 팀의 색깔이 되진 않게 눌러두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편곡을 뭐 아예 갑자기 미쳐서 어쿠스틱이나 발라드로 하지 않는 이상 인상이 강한 쪽이 확실히 잘 어울릴 텐데.
나는 태연한 무표정의 제현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