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이럴 줄 알았지 (3)
“무슨 곡 할 거예요?”
은찬이 대뜸 물어왔다. 인사도 없이…. 굉장히 실용적인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우선 간단히 통성명부터 할까요?”
잔뜩 위축된 분위기에 리더인 내가 완충재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은찬이 그런 건 중요치 않다는 듯 눈썹을 삐죽 들어 올린 채 재차 물었다.
“곡부터 정해요. 자기소개는 나중에 하고.”
아, 거참. 조금의 타협도 없다는 듯 꽉 막힌 태도에 왜 트레이딩으로 방출되었는지 예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괜찮은 거냐….’
설마 내가 조별 과제 절망 편이 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직전 무대는 퀄리티만큼은 괜찮았는데. 나는 애써 유연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럼 곡부터 정해요. 다들 생각해 둔 거 있어요?”
블랙온의 히트곡이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10년이 넘는 활동 기간 중 한때 유행했던 더블 타이틀, 트리플 타이틀 붐 때문에 타이틀만 15개가 넘었다.
아마도 프로듀싱에서 주축을 담당할 은찬이 성격이 너무 쎄 보였기 때문일까.
다들 선뜻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다.
그때, 무대 뒤편에 설치된 스크린에 다른 조가 선택한 곡명이 떠올랐다.
[3조]
[선곡]
[Black it on]
블랙온의 데뷔곡이었다.
‘와, 저걸… 용감하게도 픽했네.’
선곡은 기본적으로 선착순임에도 선뜻 가장 유명한 곡을 다들 망설였던 이유는 뻔했다.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팬도 많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는 거니까.’
잘하면 정말 또 다른 전설이 되겠지만… 어중간한 수준이어서는 원곡을 망쳤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일 것이다.
‘까이기만 하면 다행이게?’
방송이 끝나고 난 후에도 블랙잇헬, 헬잇온 등으로 네이밍되어서는 잊을 만하면 노출되는 흑역사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이번 무대부터 실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직전 무대는 사실상 탈락자가 없는 상태에서 준비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선녹음도 눈감아 줬고 보컬조 빼고는 거의 립싱크로 갔으니까.’
그럴듯하게 커버해서 올리기만 하면 합격, 이라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평가도 추첨으로 걸러서 받은 방청객 일부와 내부인에게 받는 게 아니라 전국구 투표로 받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서부터는 삐끗 잘못하면 당사자는 묻힐지언정, 영상은 두고두고 남아 조리돌림감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몇 년으로 끝나면 다행일지도.
‘X발….’
내 뮤비 재생 수는 백만도 안 되는데 내 버스킹을 찍은 영상은 길이길이 재생되던 것이 떠올라 갑자기 열이 올랐다.
아무튼, 이번엔 마냥 유명한 곡, 멋진 곡, 대중성 있는 곡을 고를 게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골라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멋쩍은 상태로 다들 침묵하는 동안 다른 조에서 속속 선곡을 시작했다.
‘다들 계속 유명한 것만 고르네.’
어쩌면 그게 당연할 수도 있나. 잠깐 멈칫거린 사이 시스템 경고 메시지가 떴다.
[<경고> 어그로 지수가 (낮음) 상태로 한 단계 하락했습니다.]
[(낮음) 상태가 24시간 이상 지속될 경우 돌발 에피소드가 발생합니다.]
아오. 그래, 노잼인 거 나도 알겠다고. 뭔가 여기서 확…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걸 골라야 하는데….
‘눈에 띌 만한 거…. 내가 잘할 수 있는 거…. 그리고 함부로 따라 할 수 없을 만한 거….’
퍼뜩 머릿속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거 괜찮으려나? 진짜 괜찮나?
‘지금이 딱 시기적절하긴 한데….’
지금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지금’이 아니면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건이었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다른 녀석들이 동의할 것인가인데….’
연습생들 안에서 내 위치를 생각하면 나머지 녀석들은 일단 밀어붙여 볼 수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정은찬인데.
싫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해야지. 그래도 말을 안 해 보기엔 역시 아까운 기회였다.
“다들 따로 하고 싶으신 거 없으시면 제가 제안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걸 굳이 이렇게 쿠션까지 깔아 가며 설득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 블랙 패러독스 하고 싶거든요.”
솔직히 이건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골라도 품절되지 않을 곡이었다. 지금 와서 이걸 어떻게 해, 란 느낌이 강할 테니까.
내 발언에 다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들어 봐. 이유가 있다고.
“다들 솔직히 어렸을 때 노래방에서 한 번씩 불러 보셨잖아요. 아시다시피 이제는 상업 성적을 생각하면 낼 수 없는 곡이기도 하고요. 이번 미션 주제가 전설이기도 하니 저희가 나중에 아이돌로 데뷔하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무대를 이번에 최선을 다해 올려 보면 어떨까….”
설명이 장황하게 길어지는 것 같아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현호야 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고. 유지원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네네, 형 말이 전부 맞아요! 상태고.
나머지 세 명은 반쯤 넘어온 것 같긴 한데 확신이 없어 보였다.
‘제일 중요한 건 정은찬인데….’
싫으면 직접 원하는 걸 말하든가. 정은찬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싫으면 빨리 말해.’
시간이 없는 건 어쨌거나 사실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정은찬이 불쑥 입을 열었다.
“편곡은 어떻게 하게?”
이건 긍정이냐, 부정이냐. 나보고 지금 그걸 편곡해서 그럴싸하게 만들라는 소리냐. 아니면 지적하는 건가.
아무쪼록 잘하기만 하면 된다. 이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전권을 잡는 쪽이 나았다.
“하고 싶으신 대로 해 보세요.”
그러자 잠깐의 정적 끝에 정은찬이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럼 그걸로 해.”
정은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지원이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졌다.
“와, 그, 그럼 그걸로 확정해서 스태프분께 전달할까요?”
정은찬의 허락도 떨어졌건만 나머지 인원들은 여전히 표정이 마냥 개운치 않았다.
그럴 만했다. 왜냐면 블랙 패러독스는….
‘솔직히 이제는 다시 못 나올 스타일이긴 하니까.’
말 그대로 세기말 감성이었다. 정확히는 세기 초 발매이긴 하지만.
블랙온이 데뷔한 건 2001년. 블랙 패러독스는 2002년에 발매한 곡이었다.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
어린 시절, 처음 TV에서 얼핏얼핏 본 MV가 떠올랐다.
2000년대 초반 감성이 어때서? 싶을 수 있겠으나… 2000년대 초반에 찍은 완벽한 ‘세기말’ 감성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우선 뮤직비디오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촬영되었다.
사방이 온통 모래뿐인 사막에서 사이버 전사 같은 옷을 입은 멤버들이 나와 유리 벽을 부수며 춤을 춘다.
지적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무튼.
동시에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듯한 장면과 함께 흥청망청 사치를 일삼는 사람들과 고통받는 난민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일렉 기타의 비트와 함께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깔리며 시작되는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Paradox,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함부로 평화를 외쳐 보지만]
[우린 계속 엇나가기만 해]
여기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노래 노랫말 전체가 그야말로 사회 고발과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투쟁 그 자체였다.
블랙온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블랙온 이후로 그 누구도 시도할 수도, 시도하지도 않았던 컨셉.
‘하지만 다들 이거 한 번쯤은 가슴에 품고 자랐을 거 아니냐.’
월드컵 시즌에는 응원가로 개사해서 높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90년대생이면서 블랙 패러독스 한번 안 불러 봤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지!
전체적으로 보컬 난이도가 높아서 실력을 자랑하기에도 좋았다. 일단 고음으로 쭉 지르는 애드리브가 많으면 보여 줄 게 많아서 풍성하게 느껴지니까.
정 안 되면 고음 파트만 나한테 넘겨서 고음 셔틀로 써도 되고.
얼추 블랙 패러독스로 제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정해지자, 처음 보는 연습생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 역시 좀 너무 난해하지 않을까요? 요즘 분위기랑은 안 맞는 거 같아서….”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하자는 건데! 다시금 쩌적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먼저 입을 연 건 정은찬이었다.
“그럼 넌 뭐 하고 싶은데?”
척 봐도 꽤 어린 인상이었던 탓에 정은찬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말로 쏘아붙였다.
“어… 그게….”
놈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에게 보내는 편지, 같이 좀 대중성 있는 걸로….”
그러자 정은찬의 가차 없는 반박이 꽂혔다.
“너 그거 원곡보다 잘할 자신 있어?”
“네?”
“니가 세찬 선배님보다 잘하냐고.”
세찬 선배님은 블랙온의 리드 보컬이었다.
“어…. 아, 아뇨.”
연습생 A, 아니… 임희록이랬나.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정은찬에게 1:1로 쪼이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그럼 무슨 생각으로 그거 하겠다는 거야? 어떻게 바꿀지 아이디어는 있어? 그냥 유명하고 부르기 쉬운 걸로 하면 무대가 잘 나와?”
아…. 왜 정은찬이 원래 조에서 쫓겨난 건지 그 이유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건 고맙긴 한데….’
저러다 애 울겠다. 나는 슬쩍 끼어들었다.
“최대한 컨셉은 살리되 요즘 들어도 세련된 느낌으로 잡아 보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럼 다수결로 할까요?”
일단 8명 중의 네 명은 확실하게 확보를 한 상황.
저놈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예의 그 재활용 세 번째랑 전에 친한 척했던 녀석인가. 나머지 하나는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연습생이고.’
친한 척했던 녀석은 아마 내 편을 들어 줄 것 같고.
어떻게 할래. 침착하게 옅은 미소를 띠고 제안하자 임희록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 그럼 블랙 패러독스로 가요….”
결국 이럴 거면서.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설득을 하든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태프에게 선곡을 전달했다.
[1조]
[선곡]
[Black Paradox]
우리 조의 선곡이 스크린에 표시되자 여기저기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전부 응원이나 칭찬의 의미는 아니었다. 일부는 대체 저걸 무슨 생각으로 고른 거냐 비웃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래, 지금은 마음껏 비웃어라.’
[어그로 지수가 (보통) 상태로 상승했습니다.]
어쨌거나 낮음에서 탈출했으니 목적은 달성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어그로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사이다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개연성 지수가 (보통)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모든 지수가 겨우 보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곧 어느 하나가 낮음으로 떨어질 텐데…. 어그로는 겨우 다시 올려놨다고 쳐도 사이다와 개연성이 언제 곤두박질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번 무대 끝나고 둘 다 매우 높음 찍은 게 어제 같은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물 나는 속도로 훅훅 내려앉아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모든 조가 선곡을 마치자 비안이 다시 무대 한가운데로 올라왔다.
[자, 이렇게 8개 조 모두 선곡을 마쳤습니다! 어떠신가요. 다들 자신 있으신가요?]
자신 있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