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이럴 줄 알았지 (2)
“레전드?”
“뭐야?”
영문으로 된 간결한 단어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지방방송이 시작되었다.
“뭐, 레전드 갱신 이런 거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나는 같은 방송사에서 하는 경연 프로그램의 포맷이 떠올랐다. 캐치프레이즈가 ‘전설을 재현하다.’였던가.
‘아마 그거 같은데.’
곧이어 내 예상이 적중했다.
[여러분들은 아이돌의 꿈을 어떤 무대를 보며 꾸게 되었나요?]
비안의 질문에 누군가 목 놓아 소리쳤다.
“비안이요!”
아부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를 외침에 비안이 활짝 웃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유,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들 각자 머릿속에 미래의 스타를 꿈꾸게 해 준 아이돌이 있을 텐데요.]
[이번 3차 미션에 도움을 줄 ‘전설’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아이돌 가수 최대 규모의 팬클럽 회원을 자랑하는, 케이팝의 역사! 대한민국이 낳은 최초의 빌보드 1위 아이돌!]
나는 설명을 듣자마자 누구를 말하는지 곧장 눈치챘다.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지. 지금 촬영장에 있는 건 대다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였다.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설 그 자체인 아이돌.
[네, 맞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대한민국 최정상의 역사를 쓴 블랙온의 전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북한에서도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 나온 순간 여기저기서 휘파람과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블랙온이면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지.’
각종 수련회, 장기 자랑, 문화제의 단골 소재였던 것은 물론이요, 기록 자체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그룹이니까.
전성기를 지난 이후 각종 다사다난한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지금은 과거의 위상이 많이 흐트러진 상황이지만.
‘그래도 블랙온이 전설적인 그룹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으니까.’
그런데 2차 미션도 커버였는데 3차도 또 커버야? 약간은 의아한 생각이 들던 그때.
비안이 조 편성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2차 미션 때는 간단한 미니 게임을 통해 조원을 결정했는데요.]
나는 머릿속으로 조금 전 떠올리고 있던 것과 같은 문장을 중얼거렸다.
‘추첨은 안 돼. 추첨은 안 돼. 추첨은 안 돼. 추첨은 안 돼.’
그러나 비안의 설명은 반쯤은 ‘돼!’였다.
[이번에는 조별로 선곡부터 편곡, 그 외 각종 연출까지, 모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주셔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변수를 반영한 편성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변수는 또 뭐야. 머리가 아파 오기도 전에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1조 - 리더: 서인수]
[팀원]
[???]
응?
왜 내 이름이 처음부터 저기 적혀 있어? 당황하기도 잠시, 1위부터 8위까지 쭉 각자 1조부터 8조까지의 리더로 이름이 올라간 상황이었다.
[지금부터 각자 조장이 앞으로 나와 조원 선발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발전의 규칙은 간단했다. 리더들이 간단한 게임으로 조원을 선발할 순서를 정한다.
리더들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나머지 56명 중에서 멤버들을 한 명씩 데리고 온다.
리더가 아닌 일반 연습생의 경우 리더의 지명을 딱 한 번 거절할 수 있다.
모든 리더가 선발 기회를 소진한 후 리더끼리 팀원 트레이딩을 1회 진행, 최종 조가 확정된다.
[Pick your own team!]
대놓고 마지막 데뷔조 선발전에서 할 짓을 지금부터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아…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일 먼저 데리고 와야 하나. 일단 8위 안에 든 영인은 제일 먼저 목록에서 제외였다.
제현호는 일단 데리고 올 거지만 두 번째로 데려와도 되겠고.
‘알아서 다른 리더가 지명하면 거부하겠지.’
첫 번째로는… 나는 또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울먹거리고 있는 유지원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저놈부터 데리고 와야겠다.’
그다음은… 편곡에 써먹으려면 확실히 프로듀싱 멤버가 있는 게 좋지.
회사나 제작진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체 프로듀싱 쪽이 좀 더 잘 쳐주는 감이 있으니까.
세 번째로는 정은찬을 데려오자.
머릿속으로 간단히 시뮬레이션을 마치자 비안이 리더들을 무대 위로 불러세웠다.
[자, 8명의 리더들은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무대 위로 올라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랜덤 댄스 매치]
저게 뭐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스크린에 뜬 설명을 읽어 보니 말 그대로 랜덤 플레이 댄스와 퀴즈를 결합한 형태였다.
블랙온의 지난 히트곡들의 랜덤 소절을 재생하고 제일 먼저 맞힌 리더가 음원에 맞춰 알맞은 안무를 추면 승점을 가져가는 게임이었다.
‘이건….’
꽤 자신 있었다. 지난 수년 동안 NO 지하실에 박혀서 연습한 블랙온 곡만 몇 곡인데….
물론 블랙온은 NO 소속이 아니긴 하지만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고 200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타 그룹이다 보니 감히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연습생 기간 짧은 녀석들은 불리하겠네.’
어쨌거나 내가 중간 이상은 할 거 같으니까 괜찮다.
나는 그게 오산일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 한 채 자리에 섰다.
[자, 첫 번째 퀴즈 나갑니다! 노래를 잘 듣고 손을 들어 정답을 외쳐 주세요! 안무까지 10초 이상 수행해야 정답으로 인정됩니다.]
[♩~♬~]
오, 이거 안… 다까지 생각한 그때 8명의 리더 중 네 사람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제일 먼저 손을 든 공민형 연습생 정답을 맞혀 주세요!]
“정답! Black it on!”
내게는 아쉽게도 정답이었다. 뒤이어 반주가 흘러나오자 공민형이 막힘없이 안무를 췄다. 잘 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포인트는 살아 있어서 오답 처리할 수가 없었다.
[네, 맞습니다! 바로 다음 문제 나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정답! Time out!”
아니, 다들 뭐 음정 두 개 찍히자마자 알아듣는 거야? 어떻게?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내게는 사실상 +7년의 시간이 더 지난 곡들이기 때문에 이 게임은 내게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 이런 생각도 못 한….’
어이가 없었다.
“정답! 너와 나!”
“정답! 시크릿 키스!”
“정답! 폭주!”
여기저기서 첫 음만 듣고도 정답을 맞히는 와중, 나만 홀로 쓸쓸히 춤 한번 춰 보지 못하고 게임이 종료되었다.
[자, 바로 점수 정산하도록 하겠습니다!]
[1조 - 리더: 서인수: 0점]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점수가 공개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나 너네보다 7년 더 늙었다. 다 비웃어라, 비웃어.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처연하게 8위를 받아들였다.
‘미안하다, 지원아. 니가 그새 다른 팀으로 잡혀가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 이걸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아쉬운 건 전적으로 유지원 쪽인데.
입 안이 씁쓸한 와중 본격적인 조 편성이 시작되었다.
“자, 그러면 1위를 한 조부터 1지망을 픽해 주세요!”
그리고 픽이 시작되자마자, 프로듀싱 멤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모두가 하고 있었는지, 대번에 정은찬의 이름이 불렸다.
“3조, 정은찬 연습생 픽 하겠습니다.”
3조의 리더가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정은찬의 이름을 부른 그때, 이변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 할까.
정은찬이 거부 의사를 표했다.
“거부권 사용하겠습니다.”
조금의 거리낌도 미안한 내색도 없는, 불쾌감까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와….”
“쎄다….”
“대박. 첫 지명부터 바로 거절 때리네.”
정은찬의 분위기라곤 고려하지 않는 거부권 행사에 촬영장 전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비안이 재빨리 투입되어 진행을 넘겼다.
[네, 정은찬 연습생!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거부권인데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정은찬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사용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3조 리더, 다시 지명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다행히 다음으로 지명한 연습생은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팀에 합류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또 거부권을 썼다가는 분위기가 정말 험악해져 제작진에게 찍힐 수도 있을 테니.
‘아니면 오히려 편집 거리를 만들어 줘서 고마워하려나.’
어느 쪽일지 당장은 확신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8번째인 내 차례가 되었다. 다행히 지원은 아직까지 어디에도 잡혀가지 않은 채였다.
‘솔직히 내가 봐도 애매하긴 해. 음색도 좋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재능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건 본인이 성장을 마치고 난 후의 이야기고. 지금은 무대를 준비하는 내내 저 잘 못 해요, 미숙해요, 도와주세요, 잔뜩 울먹거리다가 막상 무대 위로 올라가면 관심을 독차지하는 빙썅이니까.
단어 선정이 좀 심했나. 물론 저 녀석이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 속 쓰리게 하는 눈새인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만 해도… 보컬조 양보하고 내 무대를 망쳤으면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테니.’
여러모로 같은 연습생들 사이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이미지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지원 연습생 픽하겠습니다.”
일단은 내가 잘 다듬어서 옥석으로 만들어 보자. 냉큼 유지원부터 데리고 오자 놈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가, 감사해요, 형…!”
반말하라니까.
그래,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머리 아픈 조 편성을 이어 나갔다.
***
잠시 후, 근 30분 만에 겨우 조 편성이 마무리되었다.
‘진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조에서 주목할 만한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총 네 명이었다.
[1조 리더 서인수 팀. 최종 조원 명단입니다. 서인수, 유지원, 제현호, 홍수민, 주혜성, 오영환, 임희록, 정은찬, 이상 8명.]
정은찬이 우리 팀으로 오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첫 번째 지명을 거절한 은찬에게는 거부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은찬에게 거부할 수 없는 두 번째 픽을 날린 것이 누구냐 하면….
[4조, 아진 연습생 첫 번째 지명권을 사용해 주세요.]
‘정은찬 연습생 픽하겠습니다!’
바로 아진이었다. 정말 날름 채 갔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5분 후, 정은찬은 팀에서 트레이드로 방출되었다.
‘이 무슨….’
대체 그 짧은 사이에 뭐라고 입을 턴 건지 아진이 씩씩 얼굴이 빨개진 걸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정은찬을 내보낸 것이다.
때마침 우리 조에는 엉겁결에 데려오게 된, 아진 무리에 섞여서 어울리던 연습생이 있었다.
그렇게 날름 엿 바꿔 먹듯 그놈을 보내고 정은찬을 우리 조로 데리고 왔다.
‘설마 우리 조에서도 불만이려나.’
걱정으로 손바닥에 진땀이 흐른 그때, 정은찬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