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설렘보다도 (3)
[92위]
조항준
탈락자 명단의 하위권에 조항준이 있었다.
‘……?’
다른 연습생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야 겉보기에는 그렇지. 단체 PV 촬영 때도 안무 숙지가 고작이라 안 보이는 곳에 수납해 두지 않았나.
무대에 8명밖에 안 올라가니 어떻게 숨겨 둘 방법도 없어서 실력이 없는 게 더 티가 났다.
조 안에서 살아남은 연습생이 2명뿐인 죽음의 조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이상할 건 없는 상황이지만.
‘확실히 뭔가 달라지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1차 투표 때 1위를 차지했을 놈이 탈락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번엔 조항준 말고도 화제성을 노릴 만한 출연진이 생겨서 이렇게 된 건가….’
궁금해서라도 한번 봐야지, 하고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요소가 이전에는 조항준이었다면, 이번에는 나와 아진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원래는 이랬는데, 앞으로 이렇게 진행되겠지, 하고 기억을 떠올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단 뜻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건지….’
다소 까마득하긴 했지만 나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항준은 가까이 보나 멀리 보나 명백히 마이너스 요소였다.
당장 다음 조별 무대의 조 선정을 어떤 방식으로 할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조항준이랑 같은 조라도 걸렸다간….
‘윽….’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정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내가 같은 조가 아니더라도, 영인이나 이규민 같은 놈들은 좀 뻔뻔스럽게 자기 몫을 챙기겠지만.
‘유지원은 아니지.’
그 커다란 눈망울로 그렁그렁 울 것처럼 안절부절못할 것이 뻔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했다고 즙 짜는 민폐 캐릭터로 악편 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지금 밀어주는 걸 보면 그렇게 하진 않을 것 같다만.’
목표가 시청률이든 서사 만들기든, 필요할 때는 단물만 쪽 빨고 팽하는 게 어디 한둘이냐.
작정하고 보내 버리려면 방법이야 많았다. 아무쪼록 위험 요소가 사라진 것이니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이제 남은 건 64명…. 다음 하차자는 32명이겠군.’
그다음에는 16명, 이렇게 배수를 줄여 나가 최종 선발 때는 8명만을 남겨 놓는 구조일 터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장내 정리가 끝났다.
“서인수 연습생, 2번 인터뷰 부스로 입장해 주세요.”
하차자를 내보내고 난 후, 남은 생존자 중 몇몇만 선별되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딴 건 절반 정도인가.
이렇게 분량이 긴데 전부 다 쓰일 리는 없고.
뭐든 자극적으로 내보낼 수 있을 만한 게 있으면 순서를 조작해서라도 사용할 생각이겠지.
나는 방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보조 PD가 익숙한 듯 카메라를 조정하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우선 어제 무대 소감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나는 머릿속에 미리 생각해 둔 멘트를 꺼냈다.
“다들 워낙에 잘 따라와 줘서 즐겁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슬슬 PD가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준비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뭐였나요?”
나는 그런 얕은 질문에 넘어가 줘서 악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길 만큼 무르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한 거요.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진짜 잘할 수 있었는데, 같은 아쉬움이요?”
하지만 PD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혹시 조원들이랑 불편하거나 아쉬웠던 점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역으로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다. 연습실은 모션 감지로 안에 이용자가 있을 때는 무조건 카메라가 돌아간다. 연습실에서 투닥거렸던 게 안 찍혔을 거란 생각은 솔직히 안 하고.
어차피 방송에 나갈 거라면….
초반의 마찰을 잘 해결한 후, 무대를 올라갈 즈음에는 서로 마음을 열고 합심한 서사로 가는 것이 차라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면 비중이 좀 크게 잡힐 것 같아서 통편집되거나 집중해서 조명되거나 모 아니면 도가 될 것 같지만.’
어느 쪽이든 애매하게 싸운 것처럼 나갈 여지만 남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규민이도 저도 서로 워낙에 열심히 하다 보니까….”
자극적으로 살을 붙일 여지가 있어 보이는 서두에 PD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서로에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예상보다 훨씬 순화된 대답에 PD가 아쉬움에 입맛을 달래기도 잠시, 그게 다는 아니라는 듯 다른 떡밥을 던져 주었다.
“그래서 규민이가 손목 부상을 입었을 때 정말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팀 내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멤버였는데 당장 무대가 다음 날인데 안무를 변경해야 하니까….”
슬쩍 속눈썹을 내리깔며 얼굴에 그늘을 만들자 PD가 이거다! 하고 눈을 빛내는 것이 느껴졌다.
“규민이가 책임감이 진짜 많아요. 리더는 저지만 도움받은 것도 많고요. 부상 때문에 너무 자책하고 있어서 전날에야 페어 안무를 넣는 방향으로 수정했던 건데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안심했습니다.”
‘규민이’를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나는 내 입으로 발언하면서도 우욱, 어제 먹은 것까지 올라올 것 같은 것을 애써 삼키며 속을 가라앉혔다.
“그럼 이규민 연습생이랑 많이 친해지셨겠네요?”
나는 마지막으로 편집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발언으로 인터뷰를 끝마쳤다.
“네, 저희 진짜 많이 싸웠거든요. 싸우면서 엄청 친해진 것 같아요.”
이걸로 무대 직전 대기실에서 X쟁이라느니 쪼아 댄 것도 얼추 친해서 할 수 있는 막역한 행동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냥… 그냥 싫은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친해 보이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니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할 때였다.
‘그놈도 아마 비슷하게 말했을 거고.’
나는 4번 부스에서 촬영을 진행 중인 이규민을 흘끔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고생하셨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하나둘 짐을 싸서 나가는 연습생들이 보였다.
탈락자는 서른다섯뿐인데 왜 이렇게 나가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다음 촬영까지 일주일 대기인가….’
슬슬 시청자 투표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말이 휴식이지 다 조율해서 연습생들의 일상~ 찍을 거면서.’
나 또한 이틀 후 혹시 본가에서 간단한 일상 촬영을 진행해도 괜찮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본가지만 소속사가 있는 연습생들은 아마 소속사 트레이닝 브이로그 같은 장면을 딸 것이었다.
‘어차피 입양아라는 걸 전략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라면 미리 공개하는 게 낫긴 하지.’
세상에 사연 없는 가정이 어디 있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정상” 가정보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안 계시거나, 혹은 조부모 손에서 자랐거나, 기타 등등 사연이 있는 집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연습생이 입양 가정 출신인 것을 어필해서 동정표를 받는 캐릭터를 가져가기 전에 내가 차지하는 것이 유리했다.
‘제현호만 봐도 시설 출신이니까….’
별로 좋아하는 발상은 아니다만, 불쌍해 보이는 정도를 논하자면 저쪽이 우위였다.
‘음….’
그나저나 다들 갈 곳은 있는 건가? 휴가 기간 동안에도 계속 기숙사에서 머물러도 괜찮다고는 하던데.
기존에 제공되던 식단을 계속 주는 건 어렵고, 시설 관리자가 운영하는 간이매점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거면 그냥 나랑 같이 가자고 할까.’
우리 집에 손님방이 없는 것도 아니니 한두 놈 정도는 재워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친목질로 주목을 받은 이상 언급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휴가도 같이 보낼 만큼 친해요, 어필하는 쪽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뜻밖의 대답이었다.
“앗. 아뇨, 괜찮아요. 형 혼자 다녀오세요.”
제일 먼저 권해 본 영인이 산뜻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한 것이다.
“어…?”
전 재산 절반이랍시고 만 원짜리 쥐여 주던 놈이 무슨 배짱으로? 눈썹을 까딱이며 의문을 품자 영인이 해맑게 대답했다.
“저 기숙사 남아 있는 동안 다른 애들이랑 방 같이 쓰기로 해서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다른 애‘들’?’
누구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데? 나도 모르게 통제광 같은 생각을 떠올려 버린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뭐… 친화력 좋으니까 무대 같이한 조 애들이랑 친해졌을 수 있지.
그 안에서 절반은 탈락했지만 살아남은 녀석들도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일주일 후에 보자.”
나는 왠지 모를 괘씸함을 느끼며 두 번째 타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여기 있는 게 편한데요.”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래도 식사라든가, 불편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슬쩍 회유를 시도해 보았으나 제현호의 반응은 굳건했다.
“꼭 가야 하는 거면 갈게요.”
그 말인즉, 전략상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면 싫다는 거였다.
그래, 알았다. 나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고. 나는 하릴없이 혼자서 터덜터덜 서울로 향하는 단체 버스에 올랐다.
옆자리에 이름도 가물가물한 연습생이 앉아 내내 스몰토크를 시도했으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럼 3일 후 촬영을 제외하고 휴가인가.’
일주일 동안 머리를 좀 식히고, 남은 생존자들 중 완전히 아진 쪽으로 붙은 연습생들을 제외하고 주목할 만한 녀석들이 있나 좀 생각을 해 보자.
일단은 지원이랑 영인, 그리고 현호 정도는 내가 끌고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제현호 그놈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무대에 의욕을 가지기 전까지는 데뷔조로 데리고 가긴 무리고.
이규민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2차 재평가쯤 떨어져도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크몬 걔네랑 한번 같은 조 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형 쪽은 몰라도 동생 쪽은 확실히 자질이 있어 보이고, 싹싹하니 성격도 좋아서 형 쪽 대신 본인이 2인분의 사회성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형 쪽도….
‘곡은 확실히 좋더라.’
힙합 쪽은 사전 녹음을 깔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이브로 진행해서 실력의 격차가 확실히 드러났다. 왜 연출을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되긴 했다.
‘박하연이 랩 잘하긴 진짜 잘하던데.’
생긴 것보다 낮은 톤의 목소리로 발음을 뭉개지 않고 또박또박 꽂는데 힙합 쪽은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듣기에도 독보적이었다.
‘그래도 파트를 그렇게 주는 건 심했지.’
정말 실력대로 비중을 늘렸다는 듯 박하연 파트가 제일 많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제각각이었다. 3분 24초짜리 커버인데 파트가 10초 겨우 되나 싶은 팀원도 있었다.
‘저게 싸움이 안 났다고?’
의아했으나 은찬 본인의 파트도 10초 컷이라서 어떻게 마무리가 되긴 한 모양이었다.
다음 조 무대 때 가능하면 같은 조로 들어가 볼까.
아무리 힙합 컨셉이라 해도 보컬과의 합은 필요하니 그쪽에도 아쉬운 제안은 아닐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가 지정된 정거장 앞에 내렸다.
부모님께 내리는 위치를 말씀드렸더니 굳이 굳이 데리러 오신다고 해서 말리느라 진땀을 뺐는데….
‘설마 안 온다고 해 놓고 오신 건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며 버스에서 내린 순간.
“어억.”
나는 로켓처럼 들이닥친 복슬복슬한 주둥이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