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37화 (37/224)

#037. 설렘보다도 (2)

갑자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자 규민이 뻔뻔스럽게도 문을 밀고 들어와 영인에게도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너도 같이 찍을래?”

“아니, 뭐냐니까?”

내가 헛소리 그만하라는 듯 둘 사이를 가로막자 영인이 대답했다.

“앗, 네! 같이 찍어요!”

“야!”

얼결에 영인까지 핸드폰을 꺼내 드는 바람에 더 상황이 꼬여 버렸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사진을 찍힐 수는 없었기에 나는 셔터가 눌리는 순간에만 활짝 웃었다.

그러곤 재빨리 포박에서 빠져나왔다.

“뭔지 설명은 해야 할 거 아냐.”

팔이 닿았던 부분도 짜증 난다는 듯 옷을 털자 규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SNS에 올릴 거야. 다른 조들은 벌써 다 올렸더라.”

“그거 스포라서 올리면 안 되는 거 아냐?”

내가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묻자 규민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노, 노. 조나 곡 얘기만 안 하고 그냥 우리 친해요~ 더블 샷 올리는 정도는 괜찮대.”

과연 즉석에서 자기 계정에 스토리로 올린 사진을 보니 별 얘기 없이 너무 고생했고 앞으로도 서로 응원하자 이런 얘기 정도만 적혀 있었다.

“아무튼 우리 앞으로 친한 거다. 알았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뭐라는 거야. 너랑 내가 왜 친해.”

“아, 이만하면 친하지. 완전 절친이지. 나중에 고맙다고 하지나 말아라.”

“뭐?”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쏙, 규민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닭 쫓던 개처럼 문짝만 들여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상한 놈 진짜….”

쯧, 혀를 차고 뒤를 돌아서니 만 원짜리를 꼭 움켜쥔 영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외국인 팬을 보는 국내 팬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나는 한숨을 쉬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한 달만 끊어 줄 거야, 한 달만. 다음 달 거는 네가 알아서 은행 가서 체크 카드 만들어서 결제해.”

“네!”

내가 어쩌다 같은 방 연습생 벌룬이나 대신 결제해 주는 셔틀이 됐냐.

지끈지끈 두통을 참아 가며 결제를 해 주고 나니 순식간에 밤이 깊어 잘 시간이 되었다.

‘이것 덕분에 이상한 생각 안 하고 잘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 이상한 생각이란, 사람이 불안하거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을 앞두면 튀어나오는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이변이 일어나서 1위에서 밀려나면 어쩌지, 정말 뜻밖에도 방청객들의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게 내가 아니면 어떡하지.

혹은 내가 안무를 짤 때 생각지도 못한 무의식의 표절을 했다거나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걸려서 자질 논란이 빚어진다거나….

아예 무대를 망쳤으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않았을 텐데.

무대에 아쉬움이 크게 남지 않다 보니 괜히 말도 안 되는 변수들을 떠올리게 됐다.

많이 봐 왔다. 이런 부류의 고민에 함몰되어 조금씩 자신을 잃어 가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지. 보여지는 걸로 평가받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본인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고, 1군이라 할 수는 없어도 대중성만큼은 확고히 자리매김한 가수인데도 1위를 해 본 적 없다고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질 않나….

남에게 이야기해 봐야 배부른 투정이 되겠지만 본인에게는 눈에 들어간 들보처럼 힘든 거겠지.

그럴 때 필요한 건 단호한 객관화였다.

‘그런 생각을 왜 해.’

정답이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려면 밑도 끝도 없다. 연습생으로서 사망 선고를 받고 더 이상 가능성 없는 관계자 인생을 살던 것에 비하면 지금이 당연히 백번 나았다.

‘잠이나 자자.’

옆에서 영인이 드르렁,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향한 곳은 어제 촬영했던 세트장이었다.

좌석 배치가 바뀐 방청석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자 MC가 빨간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99명의 소년들의 꿈을 향한 여정! 겟 데뷔 위드 미! 오늘 드디어! 첫 번째 영광스러운 순위 변경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12개 조의 숨 막히는 컨셉 대결! 아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셨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오늘, 일부 연습생들은 이 자리를 떠나야만 합니다.]

본격적으로 하차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연습생들이 앉아 있는 대기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살아남느냐, 아니면 쓸쓸한 퇴장이냐! 잠시 후에 공개됩니다.]

60초 광고 컷까지 찍고 나니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1차 탈락 컷이 64명이었던가.

곧 비안 뒤로 펼쳐진 스크린에 99개의 이름표가 떴다.

‘현재 1위부터 99위까지 순위대로 정렬해 놨네.’

첫날 앉았던 의자처럼 피라미드형의 도표에 연습생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비안이 손을 들고 가볍게 손짓을 하자 등수 표를 채운 이름이 순식간에 빈칸으로 변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인원은 단 여덟 명! 그 영광스러운 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1위를 지금 바로 공개합니다.]

“…?”

1위를 이렇게 초장부터 깐다고? 예상치 못한 순서에 당황하기도 잠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며 스크린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중계되었다.

[서인수 연습생!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 바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얼결에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간 나는 서둘러 표정을 다잡고 마이크를 쥐었다.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는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를 제외한 95명의 연습생 전체가 올려다보이는 자리에서 보니 그제야 왜 제작진이 1위를 대뜸 초입에 공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순수하게 나를 부러워하거나 선망하는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모두의 표정이 밝기만 할 리가 없었다.

중하위권 연습생들을 중심으로 차라리 뭐든 빨리 알려 주고 끝내라. 두 눈을 질끈 감고 있거나 초조해 보이는 얼굴들이 많았다.

[자, 서인수 연습생. 자리로 이동해 주세요.]

MC의 진행에 따라 또다시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진 의자의 꼭대기에 앉았다. 이번엔 세트장 전체를 내려다보는 입장이었다.

‘뭐든 좀 빨리 진행해라.’

곧바로 MC가 다른 연습생들의 속에 불을 지를 만한 발언들을 속속 내뱉었다.

[자, 그럼, 1위를 차지한 서인수 연습생이 받은 득표율과 점수를 공개하겠습니다!]

표본 수가 너무 적어서 차마 숫자는 공개를 못 하고 저렇게 하는구나.

물음표로 가려져 있는 점수표 아래로 등급 평가 점수에 작게 세부 사항이 표시되어 있었다.

[※방청객 득표율에 심사 위원 등급 평가 반영]

먼저 공개된 심사 위원 등급 평가는 S, 환산 점수는 98점이었다.

연습생들이 앉아 있는 대기석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도 잠시 곧바로 공개된 득표율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득표율]

20.12%

[※공개 모집 방청객 500명 + 스페셜 게스트 50명 평가 합산]

예상했던 것과 비슷한 수치였다. 잘하면 30%까지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정도는 역시 너무 자만이었나.’

애써 침착한 얼굴로 부끄러운 듯 놀라는 표정을 짓자 카메라가 나를 여러 각도로 화면에 담았다.

[그렇다면 과연! 생존자의 평균 득표율은 얼마일까요!]

비안의 자신만만한 외침과 함께 내 점수표가 사라지고 숫자 하나가 나타났다.

[1.41%]

1퍼센트대의 숫자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방청객 한 명당 표를 줄 수 있었던 연습생은 셋.

총투표수는 이론상 1,650표. 그중 300이 좀 넘는 표가 내 것이라면 나머지 98명이 1,300여 표를 두고 경쟁했다는 소리다.

간당간당하게 턱걸이로 살아남은 연습생들은 10표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짐짓 심란해진 분위기 속, 비안이 침통한 대기석과 대조되는 목소리로 마저 진행을 이어 나갔다.

[그럼 생존자 발표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63위를 시작으로 팟, 처음에 보였던 순위표의 이름표가 하나씩 새겨졌다.

생존자 하위권에서 눈에 띄는 이름은….

[57위]

주혜성(C)

예의 죽음의 조에 희생당했던 주혜성이었다.

심사 위원 점수가 죽을 쒔던데 그나마 동정표를 받아서 살아남은 것 같았다.

[입소 평가 49위(↓8)]

거의 탈락 위기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려갔으니 본인도 멘탈이 흔들린 게 뻔히 보였다.

그 위로는 크몬의 형 쪽이 34위, 동생 쪽이 21위인가.

둘은 소폭 하락했고 나머지 망태기 후보들은 대체로 순위가 올랐다.

[11위]

유지원(A)

[입소 평가 19위(↑8)]

내내 본인이 당장 탈락 위기에 놓인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유지원이 대표적이었다.

순식간에 데뷔조에 더 가까워진 순위로 뛰어오른 등수를 보고 지원의 옆에 앉아 있던 연습생들이 자기 일인 양 환호해 주었다.

같은 조였지, 아마.

반면 다른 조로 갈라진, 지원과 같은 소속사에서 나온 연습생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남은 순위는 이제 64위와 2위부터 8위까지.

‘데뷔조 등수에 들었을 리 없으니 탈락을 예상 중인 거겠지.’

아니면 기적같이 64위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길 기도하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심장이 터질 듯 쫄리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단체 공개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카운트다운처럼 한 명 한 명, 등수와 득표율을 공개하며 연습생의 소감을 발표하게 했다.

7, 8위는 아진과 무대 준비 전부터 친한 척 달라붙어 있었던 히피보이즈 출신의 연습생들이었고.

[6위]

표영인(S)

[입소 평가 7위(↑1)]

영인의 순위가 한 단계 올라갔다. 조별 무대 총평에서 그렇게 혹평을 들었는데 얘는 오히려 등수가 올라갔네.

그럴 만한 무대이기는 했다. 조별 무대의 밸런스는 망했어도 그 안에서 영인만큼은 미친 듯이 돋보이는 구성이었으니까.

탈락할 것이 명백한, 영인과 같은 조였던 연습생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악편 한 번은 맛보고 가겠네.’

침통한 분위기의 절정은, 마지막으로 생존자, 64위가 발표된 순간이었다.

[64위 박연경 연습생 축하합니다. 이제 나머지 35명은 겟데뷔를 떠나셔도 좋습니다.]

그와 동시에 화면에 탈락자들의 최종 등수와 이름이 나열되었다.

등급 표기도 득표율도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배려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모든 공식적인 산출 자료들은 방송사 홈페이지에 별도로 게시될 예정이었다. 어련히 위키 같은 곳에서 친절하게 표로 정리해서 올릴 테지만….

방송에서 대놓고 한 표도 받지 못한 게 나가는 것과 인터넷 커뮤니티에만 올라가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다소 씁쓸한 마음으로 애써 기쁜 척 웃어 보이던 나는 탈락자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하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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