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너는 진짜 아니다 (2)
왜요. 대체 또 뭐가 불만이신데요.
나는 툭 터놓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애써 자제하며 침착하게 마선경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든 것치고는 싱거운 반응이 돌아왔다.
“군더더기 없는 무대 잘 봤습니다. 수고했어요.”
분명 칭찬이긴 한데 얼굴에 온기라고는 없어서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깔 만한 부분이 없어서 더 길게 말 안 한다, 그 정도?
아니, 그럴 거면서 뭐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데요.
나는 결국 마선경에게까지 칭찬을 듣고야만 무대를 마무리하고 방청객 점수까지 완승을 거둔 채 무대를 내려왔다.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 소리.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가 비로소 물속에서 호흡하게 된 기분이었다.
***
“승죽 님, 저 지인이 저녁 먹고 갈 거면 송대포에서 먹자는데 같이 가실래요?”
XOXO의 제안에 승죽은 귀가 번뜩 뜨였다.
아침 일찍부터 방송국 앞에서 대기하느라 위장이 텅 빈 상태였다.
땡볕에서 제대로 된 가림막도 없이 개고생을 했다. 다리는 힘이 풀린 지 오래에 눈꺼풀은 뻑뻑하다 못해 사막 수준이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으나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었다.
“지인 누구? 저 승재 팠던 거 아는 분이에요?”
곧바로 OK 하기에 앞서 신중하게 파악부터 하자 카메라 정리를 마친 XOXO가 웃으며 대답했다.
“함냐 님이요. 겹지인 좀 많아서 건너 건너 들어 보셨을 것 같은데.”
“아, 그분이면 괜찮아요. 오키, 오키.”
수년 동안 승재의 네임드 팬으로서 여러 이벤트를 준비하고 활동하면서 승죽은 팬 활동의 모든 어둠을 몸소 경험했다.
자연스레 방어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함냐 님이면… 그때 주영이 전시회 하셨던 분인가.’
서로 최애가 달라 교류할 일은 없었으나 겹지인들이 좀 있어서 소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승죽은 누구든 좋으니 쏟아 내고 싶은 말들이 가슴 곳곳에 응어리져 있었다.
야!!!! 저게 말이 되냐!!!! 저 여유와 저 손짓과 저 강약과 저 표정이 아직 데뷔도 못 한 놈인게 정말 맞냐고!
바늘로 콕 찌르면 자각 없는 주접에 가까운 극찬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상태로는 집에 갈 수 없었다.
‘나 아이돌 토크한 지 얼마나 됐지….’
마지막으로 우리 애가 이렇게 잘한다, 열변을 토했던 것이 벌써 1년도 전이었다. 이제 정말 금단 현상이 오고도 남을 시기였다.
솔직히 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안녕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혹시 서인수라고 아시나요?’, ‘알아도 들어 보세요. 이번에 겟데뷔라고 남돌 서바 프로그램을 나간 연습생인데요….’부터 시작해서 3시간은 족히 떠들어 댈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하던 참이니까.
악!!! 아니 진짜, 아니 나 정말로 보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대로라면 정말 다시 덕질의 수렁으로 끌려들어 갈지도 모른다.
승죽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자신을 말려 달라는 듯 XOXO에게 물었다.
“저 근데 지금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자제 안 돼서 오늘 외박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승죽이 슬쩍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자 XOXO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 지금 안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진짜. 함냐 님 자리 앉았다니까 빨리 택시나 잡아요.”
그렇게 반쯤 끌려가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고깃집으로 향한 승죽은 가게의 문을 연 순간 왁자지껄하게 쏟아진 웃음소리에 눈을 의심했다.
“와~ 아이고, 다 아는 얼굴들이네!”
문을 열고 들어온 승죽과 XOXO를 확인하고 박장대소한 장본인은 승재가 화끈한 불효자 쇼를 선보이기 전까지만 해도 승죽과 공개 계정에서 어울렸던 지인이었다.
“어? 대체 어디 있었어요?”
“저 대기 21번 받아서 한참 앞에 있었어요.”
대체 누가 연습생들 보자고 전날부터 대기하나 했더니 이 인간이었냐. 승죽은 익숙한 케이팝 고인 물들과 재회해 기쁜 한편 곧바로 치고 들어올 멘트를 대비하며 으윽, 딴청을 피웠다.
“아니, 뭐 저는… 쪼 님이 당첨됐다고 같이 와 달라고 해서 온 거라….”
그러자 XOXO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웃기고 있네. 함냐 님, 승죽 님 이번에 누구 잡았는지 맞혀 봐요. 걍 취향이 소나무이다 못해 그냥 지문 수준임.”
“아, 좀 조용히 하라고요.”
승죽이 XOXO의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를 잡고 앉자 예의 함냐 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봤을 때 99% 서인수 같은데. 맞아요?”
“솔직히 소나무라 하면 너무 인수라서 다른 애가 생각이 안 난다.”
“와, 대박. 그죠? 걍 누가 봐도 서인수 이마에 승죽 님 픽이라고 적어 놓은 것 같다니까?”
승죽은 차마 더 부정할 수도 없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아니… 근데… 걔가 무대를 너무 잘해요….”
그러자 함냐 옆에 앉아 있던 구 지인이 웃으며 스위치를 눌렀다.
“승죽 님 원래 8년씩 연습생을 했으면 잘해야 하는 게 맞아요.”
내내 입덕을 부정하기만 했던 승죽의 리미터를 해제하는 발언이었다.
“아뇨!!!! 그냥 오래 연습해서 나오는 짬이 아니라 그 있잖아요. 실력이 탄탄하게 받쳐 주니까 나오는 여유랑 페이스가 너무하다니까? 데뷔 전부터 이러면 나중에 데뷔하고 나서는 얼마나 잘할지. 와, 그냥 될성부른 싹 수준이 아니라….”
승죽이 목이 터져라 열변을 시작하자 XOXO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래서 계정은 언제 파신다고요?”
“네?”
승죽이 무슨 소리냐는 듯 XOXO를 바라보자 구 지인이 대신 덧붙였다.
“계정 빨리 만드셔야 할걸요. 승재 파실 때 좀 늦게 진입하신 편이라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방송 시작하고 나면 늦어요. 더구나 인수 잡으실 거면.”
“……?”
승죽이 마지막 문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지인이 대신 설명했다.
“인수 뉴페 활동 때부터 점찍어 둔 사람 많을걸요. 자리 잡아 두시려면 지금 빨리 들어가시는 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그러나 말마따나 시간이 없었다. 방송을 타면 그때부터 각종 서포트며 광고판 모금이 쏟아질 텐데.
어중이떠중이 감투와 제삿밥만 노리는 무능한 총대가 졸지에 서포트 첫 타자를 잡아 헛짓거리를 하기라도 하면?
그래서 횡령부터 부실하기 짝이 없는 선물까지 온 커뮤니티에 조롱감이 되면?
‘그 꼴을 내가 어떻게 봐.’
그럴 수는 없었다.
승죽이 팬덤 내에서 믿고 송금할 수 있는 총대로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승죽이 등장하기 전까지 확고한 네임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총대가 올린 영수증과 증빙의 오류를 발견하고 공론화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론화하고 곧바로 총대를 넘겨받아 컨셉에 어울리는 디자인의 홍보와 흠잡을 데 없는 정산까지.
거기다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일부는 기부금으로 전달해서 승재의 이미지까지 챙겨 주었다.
다른 멤버들도 라방에서 부러움을 표했을 정도로 완벽한 수습의 본보기였다.
‘최소한 엉뚱한 놈이 내 가수 망신시키는 건 막아야지.’
1군 그룹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서 중위권 정도의 위치였던 승재 팬덤에서도 이렇게 혼란하기 짝이 없었는데.
서바이벌로 화제 몰이를 하고 데뷔할, 압도적 인기의 인수는 오죽할까.
지인들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자신이 자리를 잡는 게 마음 편했다.
‘하지만… X발….’
케이팝은… 병이야…. 죽어야 고쳐…. 승죽으로서 활동하는 내내 오만 박살과 어그로들과 싸우며 과몰입에 희생된 멘탈을 생각하면 다시 그 구렁텅이로 기어들어 갈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최대로 평온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때는 학생이기라도 했지,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금 과몰입을 했다간….
‘그때보다 짬도 잔고도 쌓였으니까 훨씬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번뜩이는 미친 생각에 모든 고민이 먼지처럼 날아가 휘날렸다.
“저 닉네임 추천해 주실 분?”
받아들이고 나니 세상이 순식간에 평화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팔 거면 어덕행덕은 무슨, 존나 잘해야 한다. 내 새끼가 데뷔하길 잘했다고 눈물이 쏙 나올 만큼 간지 나는 기획과 행동력을 선보여야 했다.
왜?
그것이 최고의 무대를 보여 준 내 아이돌에게 해 줄 수 있는 팬으로서의 최고의 보답이니까.
***
마침내 오늘 준비된 모든 촬영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으윽….”
마지막에 유독 나만 인터뷰가 길게 잡혀서는 다른 녀석들은 5분, 10분이면 끝나더니만 PD가 한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션을 끝낼 때마다 주요 인물들을 뽑아서 따로 인터뷰 분량을 챙기는 거야 흔한 일이다만.
중간 점검 때 없었던 페어 안무가 최종 무대 때 등장해서 시선을 사로잡은 것 때문에 더 집중 타깃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고 겨우 숨을 돌릴 틈이 나자마자 팟, 상태창이 나타나 정신을 빼 놓았다.
[사이다 지수가 [매우 높음]으로 상승했습니다.]
[개연성 지수가 [매우 높음]으로 상승했습니다.]
[사이다·개연성 지수의 최고 등급 달성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수령]
[등장인물 - 이규민]
아, 필요 없다고.
저놈이랑 앞으로 엮이는 것도 싫은데 왜! 쓸데없어. 주지 마!
그러나 내가 거부한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이규민이 등록된 등장인물 리스트를 확인했다.
[등장인물]
[- 현재 등록된 인물 (6)]
[▶겟 데뷔 위드 미 참가자]
[▷[3위]아진(S)]
[▷[7위]표영인(S)]
[▷[17위]제현호(A)]
[▷[19위]유지원(A)]
[▷[24위]이규민(B)]
[▷[91위]조항준(F)]
이전에 봤을 때는 전부 ???로 표기되어 있던 자리가 순위와 등급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일이면 갱신되겠네.’
오늘 방청객들 앞에서 발표된 결과는 미션의 승패까지였다.
미션 결과를 적용한 새로운 순위와 등급은 그 짧은 사이에 반영해서 공개할 능력이 아직은 안 되거니와….
‘그렇게 되면 방송분에 앞서 스포일러가 되니까 곤란하지.’
내가 실시간으로 달리지 않으면 내 픽이 탈락한다, 가 서바이벌 장사의 핵심인데.
이미 결과가 나왔고 일부만 그걸 아는 구조가 되면 김이 새기 마련이었다. 온전히 틀어막기도 어려울 테고.
그래서 변동된 순위 및 등급과 탈락자에 대한 발표는 내일 오전부터 촬영할 예정이라 했다.
‘일단 내가 눈여겨본 후보들이 64위 안에 못 들 일은 없을 것 같고.’
입을 틀어막아도 방청 후기는 새어 나간다. 모두의 궁금증이 극에 달한 내일.
드디어 1화가 방영될 예정이었다.
‘이제 진짜 본격적인 시작이네.’
팬들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것도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바빠질 터였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누운 채로 가볍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 잠깐만….’
그때, 무엇인지 모를 위화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나는 내내 찝찝하게 남아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