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33화 (33/224)

#033. 아직 모르지만 (2)

아침 기상 후 각 조별 리더가 나와 무대 순서를 결정하는 제비를 뽑았다.

어차피 방송분은 제작진이 내보내고 싶은 대로 편집해서 내보내겠지만.

앞 순서로 미리미리 끝내 놓으면 마음이나마 편한 채로 나머지 녹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 뽑기 통 안에 손을 넣은 나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그리고 결과는….

[Hater later B조, 열한 번째 순서 뽑았습니다.]

참담했다.

맨 마지막이 아닌 게 어디야 하고 생각해야 하나.

차라리 A, B조를 연달아 보여 주는 방식이 우리에겐 더 유리할 것 같은데.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무대만 잘하면 되니까….’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무대 아래로 내려오고 곧 최종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바깥에서는 추첨을 통해 당첨된 사전 방청객들이 대기 중이라고 했다.

무대 아래에서 객석을 내려다보자 최소 300명, 많으면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아마 스페셜 게스트나 초대 손님을 세워 놓는 용도인 듯한 특별 스탠딩 존까지.

‘첫 조별 무대부터 관객을 꽤 많이 불렀네.’

보는 눈이 많은 만큼 더 잘해야 한다. 나는 가볍게 기합을 넣고 리허설을 마쳤다.

규민의 손목을 고려해 바꾼 그 파트는 마지막까지 히든카드로 쓰기 위해 슬쩍 난이도를 하향해서 무난하게 넘겼다.

심사 위원들 모두 말없이 우리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크~ 이야, 역시는 역시야, 그지? 아니다. 내 입방정 좀 봐. 이따 얘기하자, 이따!’

다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는 와중 댄스 멘토가 신나서 입을 열었다가 나머지 심사 위원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이거면 됐다.’

준비는 완벽했으니까 이제 제대로 보여 주기만 하면 돼!

대기실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땡볕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을 팬들을 위해 잠깐이나마 나가서 얼굴을 비춰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잘됐다. 무대는 조명도 쎄고, 동선도 자주 바뀌니까 얼굴 한번 제대로 보여 주기도 힘든데.’

멤버들을 이끌고 거의 마지막 차례에 나가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때의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솔로로 데뷔한 후 온갖 푸대접을 받아 가며 겨우 무대에 섰을 때.

나를 기억하고 기다려 준 팬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12년이라는 시간의 힘은 그런 것이었다.

‘이번에는 꼭…!’

데뷔도 못 한 연습생 따라다니는 취향 이상한 팬이 아니라,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가수의 팬이 되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애써 여유 있는 척 미소를 지으며 무대 앞으로 나섰다.

연신 내 이름만 불려지는 탓에, 다른 멤버들이 조금씩 위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놈, 한 놈 앞으로 끌고 나와서 인사시키고 이럴까 봐 서인수와 아이들 꼴이 되지 않도록 파트 배분 빡세게 한 거니 안심하고 열심히 해라, 다독여 줄 생각이었는데.

“…….”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제일 괜찮을 줄 알았던 놈의 멘탈이 터져 버렸다.

“대체 언제까지 화장실 안에 갇혀 있을 건데.”

내가 하,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묻자 이규민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나도 원해서 갇혀 있는 게 아니라고!!!”

“너 화장실 한 번만 더 가면 X쟁이로 불러 버릴 줄 알아.”

“이미 불렀잖아!”

다른 조 무대가 한창 시작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 화장실이나 들락거리고 있는 이규민을 보니 어제 들었던 감상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무대를 앞두고 긴장 때문에 화장실 지박령이나 되는 놈에게 내 과거의 모습을 봤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지.

이놈이랑은 진짜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어.

나는 이를 박박 갈며 거의 마지막 순번에 걸려 천만다행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숨을 삼키던 그때, 제현호가 스윽 내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답지 않게 소심한 손짓이었다.

“…?”

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보자 제현호가 무대를 가리켰다.

“곧 시작할 것 같아서요.”

그러곤 무심하게 더 덧붙이지 않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빼곡히 들어찬 스탠딩석과 좌석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시작된 2차 미션은 수 시간에 걸쳐 촬영되었다.

아직 연습생들 수준의 무대이기 때문에 대단한 특수 효과나 무대 장치가 없어 비교적 회전이 빠른 편이었으나 대기가 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방청객들이 앞서서 함성을 질러 대느라 기운이 빠진 상태였다.

‘이러다 우리 나갔는데 제대로 호응도 못 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직전이 되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걱정이 삐죽 샘솟는 와중 이규민이 또 속을 긁었다.

“청심환 먹을걸. 청심환 먹을걸. 청심환 먹을걸. 청심환 먹을걸. 청심환 먹을걸.”

나는 그대로 이규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려다가 겨우 참고 속삭였다.

“너 긴장해서 댄브에서 이상한 짓 하면 진짜 무대 아래로 밀어 버린다.”

이건 진심이었다. 그러자 이규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누, 누, 누, 누, 누가 긴장했다는 건데!?”

“누구겠냐.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이규민이 갑자기 옆에 서 있던 제현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내가 긴장한 것 같아?!”

제현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 따위 할 성격일 리가 없었다. 이규민이 말없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바닥을 굴렀다. 나는 발등으로 툭, 이규민이 천장을 보도록 굴린 다음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합 한 번만 넣고 가자.”

어차피 이걸로 흩어질 팀이지만 2주간 함께 고생했으니 마무리는 깔끔하게 짓고 싶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둥그렇게 모여 선 멤버들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연습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잘하고 내려오면 돼.”

“그게 쉽냐.”

사실 무대가 코앞이 되니 이규민 말고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멤버가 가득했다.

어제 이규민이 다독였던 F등급이 내 손 위로 손을 겹쳤다.

“네! 열심히 해요!”

이윽고 손이 모두 모이고.

“이 밤은 Mine 하면 Sorry I’m hot 하는 거다?”

나는 가사에서 따온 구호를 정하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이 밤은 Mine!”

“Sorry I’m hot!”

구호를 외치며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Hater Later] B조 올라가실게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스태프가 우리를 호명했다.

나는 쯧 혀를 차며 계단을 올라 무대 위로 향했다. 등 뒤로 제현호가 곧이어 따라 올라왔다.

피부가 탈 것처럼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부터 아득하게 들려오는 엄청난 함성.

묵직하게 바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사운드에 체크용으로 귀에 꽂아 둔 이어 마이크까지.

조명이 꺼진 순간 모두 숨을 멈췄다.

멀리서 들려오는 엔진음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끼이이익, 스키드 마크를 만드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현호를 비췄다.

[Somebody say 난 항상 거슬린대]

[Hot body, 치켜든 Cheek, 네 심장을 또 저격해]

현호가 바이크에서 내리는 것처럼 주먹을 쥔 손을 가볍게 까딱이며 옆으로 이동하자 곧바로 다음 타자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옮겨갔다.

[어떡해, 오늘도 터지는 WOW]

[네게 거슬려도 이 밤은 Mine, Sorry I’m hot]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코디를 변형해가며 락시크 느낌으로 차려입은 의상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가장 조마조마했던 F등급 그놈도 잘 넘겼고, 일동이 1-3-4 대형으로 칼군무를 유지하다가 파트가 끝난 멤버들이 훅 옆으로 빠지며 독무처럼 연출한 부분도 무사히 지나갔다.

[Hater later, 지금 내가 바빠]

[너도 알지, Hater later]

[날 어디로든 치우고 싶겠지만]

그리고 마침내 후렴이 시작되기 직전, 내 첫 파트가 나올 시간이었다.

[네게 거슬려도 이 밤은 Mine, Sorry I’m hot]

비로소 센터에 선 내가 포인트 안무인 어깨 아이솔레이션을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 기다림에 대해 반발이라도 하듯,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수야!!!!!!!!!!”

“서인수!!!”

“서인수 데뷔하자!!!!”

혹여 기운이 빠져 우리 무대에서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의 성량이었다.

아직 무대 중인 것도 잊은 채 내 이름을 외쳐 대는 팬들 너머로.

잔뜩 뭐 씹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놈이 있었다.

‘이제 너랑 내 차이를 알겠냐.’

아진은 현역 NO 연습생인데도 나만큼의 화제성이 못 된 탓일까.

그야 연습생 생활이 길지도 않고 공개 연습생도 아니었어서 당연한 거지만.

NO 연습생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었을 뿐 방영 전부터 팬들이 대기하고 있진 않았던 것이다.

물론 NO 연습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놈을 지지하는 NO클러스터의 팬들도 있긴 하다만 이번엔 다소 특수한 상황이었다.

NO 소속 연예인들을 통칭하는 NO클러스터의 팬들 대부분이 나를 너무 오래 알고 지낸 팬들이라 아진이 아니라 나를 지지해 준 것이다.

‘솔직히 그건 기대도 안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회사랑 척을 지고 나간 게 아니라서인 것도 있고, 실제로도 나를 이때까지 데뷔시켜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팬들이 너무 많았던 덕택이기도 했다.

‘원래 회사의 계획대로라면 내년쯤 데뷔할 예정이었긴 하다만… 그건 뭐, 외부에서는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때마침 가사도 너무나 그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긴장해, 쉿, 이 판은 Mine, You better run]

마침내 짧디짧은 내 파트가 끝나고 동선을 따라 뒷줄에 서자 다시 군무 파트가 시작되었다.

말이 퍼포먼스지 사실상 댄스 포지션 경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칼군무만큼은 확실하게 준비했다.

앞으로 비스듬히 나가 다시 뒤로 물러서고,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면서 앞머리를 훔쳐 올리자 시야가 한결 가벼워졌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는 팬들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벅찼다. 빡센 군무 파트가 끝나고 브리지 간주가 나오며 동선 이동으로 무대를 채우는 타이밍이 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중앙에 섰다.

“Sorry I’m hot----!”

모두 마이크를 확인용으로만 차는 와중 유일하게 라이브로 처리하는 애드리브 부분이었다.

내가 노래 잘하는 거 알지? 아는 김에 확인하고 가^^ 쐐기라도 박듯 안정적으로 쭉 치고 올라가는 고음에 앞줄에 앉은 댄스 멘토는 연달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려 있었다.

‘아직 만족하긴 이른데요, 쌤. 큰 거 갑니다.’

브리지가 끝나고 B등급 연습생들의 무난한 파트가 지나고 나서는 곧바로 그놈의 ‘남들이 못 할 만한 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흘끗 시선을 뒤로 돌려 이규민과 마주 보았다.

‘진짜 내가 저놈 때문에….’

이게 이렇게까지 고생할 미션이 아닌데 마지막까지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하….

할 수만 있다면 남들이 안 볼 때 다리오금을 한 대만 걷어차 주고 싶었다.

‘빨리 나와.’

내가 눈짓으로 가볍게 신호를 하자 박자에 맞춰 이규민이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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