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29화 (29/224)

#029. 너랑 나랑은 (1)

각 조장을 제외하고 투표권이 있는 건 평조원 6명.

우리 조 녀석들이 모두 나를 뽑아 준다 치더라도, 상대 조 조원을 최소 한 명은 설득해야 의미가 있었다.

‘솔직히 어떤 기획을 들고 와도 밀릴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편 가르기 싸움이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4:4로 끌고 가서 멘토에게 지지를 받는 쪽이 어쩌면 제일 기대할 수 있는 방향인지도 몰랐다.

‘저쪽에서 괜한 고집만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약간의 걱정과 함께 거울이 있는 연습실에 8명이 모였다.

“누가 먼저 발표할래?”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가위바위보?”

천장에 달린 카메라가 선명한 빨간 불빛으로 녹화 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짧은 승부의 승자는 저쪽이었다.

‘오히려 잘됐지. 저쪽에서 얼마나 해 왔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곧바로 제작진에게 노트북을 빌려 스크린에 연결한 화면이 커다랗게 벽면을 채웠다.

“음….”

자신만만하게 들고 온 것치고는 심심할지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딱 나쁘지만 않았다.

각종 경연 프로그램에서 무대 실전 경험이 없는 연습생들이 구상한 것치고는 괜찮은 정도?

제작진이나 소속사 스태프의 힘을 빌려 가다듬으면 방송에 내보냈을 때 그럴싸한 그림이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왜 자신 있었는지는 알겠네.’

웬만한 상황이었다면 의상 컨셉부터 소품 활용이나 저예산 무대 구상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지! 했겠다만.

안타깝게도 이규민이 넘어서야 할 상대는 또래의 평범한 연습생 A가 아니라 나였다.

“의상이나 중간에 댄브 활용하는 방향이 좋네.”

내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평하자 이규민이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웃음을 되찾았다.

마치 무슨 의중으로 하는 칭찬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표정 관리를 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곧 못 웃게 될걸.’

나는 우리 차례가 되자마자 여유로운 모습으로 PPT를 화면에 띄웠다.

대기업은 물론 중형과 다 쓰러져 가는 소속사까지, 구천을 떠돌며 각종 양식을 경험해 온 내게 PPT를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와….”

애들 스크랩 같았던 이규민네 발표 자료와 달리 본격적인 회사발 자료 같은 비주얼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아직도 NO 소속이었다면 정말 소속사에서 도와준 거 아냐? 의심을 받았을 반응이었다.

‘개인 소속으로 나와서 그럴 위험은 없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나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숨기며 발표를 이어 나갔다.

“컨셉 제안은 여기까지고. 일단 간단히 구간별로 안무 동작이나 동선 같은 거 짜 봤어.”

그리고 비로소 PPT의 마지막 페이지, [안무시안_최종_진짜최종_진짜진짜최종_final_제발final.mp4] 영상을 틀 차례가 왔다.

‘확실히 잠자고 머리 식히고 보니까 수정한 게 훨씬 낫네.’

제현호가 막판에서야 입을 열어서 과정이 다소 짜증스럽긴 했으나….

수용한 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이규민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섰다.

“…….”

저 공허한 표정을 봐라. 입꼬리는 간신히 들어 올려서 웃고 있지만 눈은 독기가 가득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야 하는데 난이도나 밸런스 문제도 마지막에 완벽히 조정되어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진짜 너무 좋다….”

“회사에서 봤던 기획안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것 같아요.”

자기 조 편을 들어야 하는 이규민네 조 연습생들조차도 입이 떡 벌어져서 감탄만 연발하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열심히 준비해 봤는데 어때? 괜찮아?”

그러자 눈치도 없이 이규민네 조 연습생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

“와, 대박인데요? 안무 동선도 직접 다 짜신 거죠?”

나는 팀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누구 아이디어에서 착즙한 것인지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다 같이 정리해서 만든 거긴 한데 그 파트 아이디어는 현주가 낸 거야.”

그러자 D등급 연습생의 눈이 반짝 빛났다.

별거 아닌 사소한 공치사라도 자부심과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모양이었다.

“따로 의견 없으면 바로 투표 진행할까?”

나는 너무 재수 없어 보이지 않도록 표정을 가라앉히며 제안했다.

“…그래. 펜이랑 종이 달라고 하자.”

이규민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보기 좋은 기장으로 다듬은 탈색 머리를 헤집었다.

‘꽁해 있기는.’

이규민의 태도에 나답지 않게 속으로 맞불을 놓아 버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놈과는 죽어도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데 뭐 어떡해. 누구나 한 명씩 있잖아, 이유 없이 친해지기 싫은 사람이.

‘…이번 미션만 끝나면 제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아.’

어느 순간 나까지 속 좁은 불평을 하고 있는 것에 살짝 놀라며, 투표를 위해 제작진에게 용지를 받아 들었다.

***

“그럼 일단 편곡 방향 확정됐으니까 홍 피디님한테 전달드리고 올게.”

“그래.”

“MR은 언제쯤 나오는 거예요?”

“빠르면 이따 저녁에도 주신다던데? 크게 수정할 게 있는 게 아니라서.”

제작진을 통해 편곡 지원 스태프에게 편곡안을 전달한 나는 겨우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C등급 연습생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 예상한 대로긴 한데.’

투표의 결과는 6:2.

당연하게도 우리 팀이 6이고 저쪽이 2였다.

‘보는 안목이 있으면 그래야지.’

저쪽으로 간 표 두 개 중 하나는 이규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소속사에서 온 녀석이려나.

나는 자연스럽게 진행의 주권이 내게로 온 상황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내 기획대로 된 만큼 더 말 안 나오게 잘해야지.’

단체 미션을 제외하면 첫 무대부터 너무 빡빡하게 힘이 들어가서 피로도가 걱정되긴 했으나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외려 여기서 이규민한테 밀렸으면 그 충격에 제대로 못 했겠지.

나는 괜한 걱정은 잠시 뒤로 미뤄 두며 우선 제일 급한 MR 재제작을 먼저 요청했다.

보자…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그럼 이제 파트랑 포지션을 확실히 나눠야 할 거 같은데.”

기본적으로 댄스 그룹이라 다 같이 댄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야 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건 따로 있었다.

‘센터, 중요하긴 하지.’

물론 나는 굳이 센터에 목을 맬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메인 댄서가 아니라 메인 보컬이니까.

그러니 지원자 중에 제일 효율이 좋아 보이는 녀석을 밀어줄 의향이 만반이었다.

물론 그거 말고 다른 걸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하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물어보면 또 쭈뼛거리면서 어색해질 것 같은데….’

어차피 하고 싶은 방향은 따로 있으니 빠르게 끝내 버려야지. 나는 극약 처방을 감행하며 입을 열었다.

“센터 하고 싶은 사람 3초 안에 손 들기. 하나둘….”

그러자 여기저기서 잴 것도 없이 다급하게 손이 올라왔다.

“으악, 저요!”

“헉, 저도요!”

“저저저저!”

그리고 말없이 손만 든 사람이 두 명.

하나는 제현호고 다른 하나는 이규민이었다.

“이렇게 다섯 명이야?”

손을 안 든 건 나와 D등급, F등급 한 명씩인가.

뒤에 두 명은 실력이 부족한 걸 알아서 손을 안 든 거 같고.

나머지는 할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마음이 급해서 우다다 튀어나온 듯했다.

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기에 나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섯 명 전원 센터로 하자.”

그러자 순식간에 항의가 몰아쳤다.

“네?”

“뭐?”

“…?”

네? 는 무슨.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보면 알겠지만 파트별로 난이도 높은 자리가 다 달라서 그거 한 사람이 소화 못 해.”

뭐… 무리해서 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뒤에 가서 힘이 빠져서 동작이 엉망이 될 확률이 높았다.

전문 댄서도 버거울 수준의 동작들이었다. 연습생 수준에서 한 무대에 몇 번씩이나 성공해 주길 기대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망상이었다.

“그러니까 각 파트별로 내가 센터다 생각하고 돌아가면서 메인이 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처음부터 이걸 생각하고 짠 구성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서인수와 아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자기가 그거 다 할 수 있다고 우기는 놈이 있으면 설득을 더 해 봐야겠지만.

다행히도 다들 이견이 없는지 반박의 말이 없었다.

“그럼 일단 1절, 후렴, 2절, 댄브, 후렴. 이렇게 다섯 파트로 크게 나누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파트 정하자. 겹치면 가위바위보로 하고.”

그렇게 해서 정해진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절 제현호, 첫 후렴 C등급 A, 2절 B등급, 댄브 이규민, 마지막 후렴 C등급 B.

‘흠….’

댄브를 이규민이 가져간 게 괜히 못마땅하긴 했으나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댄브 센터가 난이도가 제일 높아서 나, 제현호, 이규민 셋 정도가 아니면 소화할 수 있는 팀원이 없었다.

나는 센터는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자동으로 제외.

제현호 아니면 이규민인데 전략상 제현호는 비주얼이 좋으니 앞에 배치하는 것이 나았다.

‘그편이 시청자들 이목을 끄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잘생긴 얼굴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어그로는 중요하지, 암암.

냉정하게 말해서 이규민도… 딱히… 뭐, 못 봐줄 낯짝은 아니다만.

‘아무렴 비교가 되겠냐. 제현호 쟤는 저 말주변을 얼굴(과 실력)로 커버해서 올라온 놈인데.’

나는 흥,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포지션 배정을 끝냈다.

남은 건 이제 안무에 살을 마저 붙이고 댄스 멘토에게 검수를 받는 일이었다.

“정해졌으면 이제 원곡 들으면서 안무 짜 두자. 어차피 편곡 크게 안 들어가서 박자는 큰 차이 없으니까.”

팀 내에 프로듀싱 능력자가 있다면 편곡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나도 그렇고 이규민도 그렇고, 따로 작곡을 배운 건 아니라서 그 부분은 능력 밖이었다.

‘회귀한 김에 시간 내서 좀 배워 둘 걸 그랬나.’

잠깐 아쉬운 생각이 들었으나 쓸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데뷔부터 하고, 천천히 배우자.’

마침내 비어 있던 틈새를 모두 채워 댄스 멘토에게 간단히 검토를 끝낸 나는 기대 이상의 극찬에 사기가 잔뜩 끓어오른 채였다.

‘너~무 좋다.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아, 다 같이 한 거라고? 그래도 주도해서 담당한 팀원이 있을 거 아냐. 너네 리더가 누구야?’

예상대로 칭찬 일색.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무대 구성도 너무 잘했다며 칭찬을 한가득 들어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규민은 리더 자리에서 밀린 이후로 말이 확 줄어든 상태였지만, 멘토의 호평을 직접 들은 이후로는 전보다 더욱 잘 따라와 주었다.

MR도 나쁘지 않게 잘 편곡되어 나왔고.

녹음까지 순조롭게 마친 후의 1차 중간 평가 직전.

‘이대로 마무리만 잘하면 된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걱정했던 D, F등급 팀원들도 그런대로 잘 따라오고 있고, 제현호도 묵묵히 협조하고.

우리 팀 본무대는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 싶으면서, 되레 유지원이나 표영인은 어떤가 남의 조 걱정을 할 여유까지 생겼다.

그런데.

“서인수 연습생?”

“네.”

1차 중간 평가. 우리 무대를 본 다른 연습생들의 넋이 나가는 걸 보면서도, 심지어 이름이 불린 그 순간까지도 호평을 의심하지 않았다.

솔직히 다른 팀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 아닌가 싶은 자신감에 차 총평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 보여 준 게 이 팀의 전부예요?”

돌아온 것은 뜻밖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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