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그건 아니지만 (3)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아도 나도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이규민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최대한 시비 거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무대 올리기까지 2주 남았으니까 하루 정도는 컨셉 짜는 데 활용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부터 너랑 나랑 각자 컨셉 짜고 기획안 만들어서 내일 오전에 누구 기획이 더 괜찮은지 다수결로 결정하는 거야. 어때?”
나는 일부러 카메라에 더 잘 잡히는 각도로 방향을 틀고 이규민을 바라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만약 거절한다고 해도 내가 설득할 명분은 충분했다.
무엇 때문에 제작진이 무대 준비하는 데에 기간을 2주씩이나 줬겠어.
‘조금이라도 쓸 만한 그림을 만들어 내라는 거지.’
아직 서로에 대한 정보도 없는, 사실상 처음 만난 놈들끼리 만든 무대가 수준이 얼마나 될지를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멀쩡한 무대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만큼… 긴 준비 기간 내내 촬영해 봤자 방송에 나가는 건 쥐꼬리만큼 나간다는 거고.’
준비 기간이 긴 만큼 과정이 민숭민숭해서야 그대로 통편집에 무대 영상만 덜렁 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준비 기간에 제대로 서사를 쌓을 필요성 역시 충분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당히 경쟁 구도 잡으면서, 선의의 라이벌 컨셉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악의적 편집에 휘말리면 오히려 독이겠지만.
내가 노골적인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이상 가능성은 낮고, 사실 그마저도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예를 들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예스맨처럼 굴고 조언만 한다고 치자.
제작진이 거기서 조언하는 부분 다 빼 버리고 조용히 고개 끄덕이는 부분만 방영한다면….
꿔다놓은 프리라이더가 되어 욕먹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겨우 이걸로 악편 당할까 봐 걱정할 거라면 애당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나는 적당히 호의적인 표정을 유지하며 이규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규민이 일순 표정을 멈칫하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네. 그럼 너랑 나는 빼고 나머지 멤버들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는 거지?”
나는 그제야 슥, 우리 조에 포함되어 있는 멤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
가볍게 훑어본 것만으로도 이규민과 같은 그룹사 소속이 둘.
저쪽이 무조건 이규민 편을 든다고 치면 내 쪽이 너무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 순간 내 안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이규민의 어조를 흉내 내며 속삭였다.
‘쫄?’
나는 곧장 속으로 발끈하며 대답했다.
‘누가 서열질부터 하는 놈이랑 실력으로 겨뤄서 밀릴 줄 알아? 쫄았겠냐!?’
그동안 내가 데뷔해서 기회만 오면 해 보고 싶었던 무대가 한둘이 아닌데 벌써부터 패배를 걱정할 리 만무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반반일 때는….”
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규민이 한술 더 떴다.
“그때는 멘토 선생님 불러서 봐 달라고 하면 되지.”
중간 평가 전까지는 예약만 한다면 멘토 가이드를 무제한으로 받을 수 있었다. 나로서도 불리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알았어.”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규민이 곧장 제작진을 호출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요. 저희 회의실이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
느닷없이 내선 연결용 인터폰으로 제작진을 불러내기에 뭘 하려나 했더니.
“서로 아이디어 섞이면 안 되니까 내일 오전 연습까지 넷씩 나눠서 팀 대항 PT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문제없지?”
‘괜찮지’도 아니고 ‘문제없지’? 나는 이마 위로 샘솟는 핏대를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진짜 말 한번 짜증 나게 하네.
나는 더더욱 철저하게 이겨 주마.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럼 지금 바로 넷씩 나누자. 내가 다른 회의실로 갈게. 팀은 어떻게 나눌 거야?”
“각자 합류하고 싶은 멤버랑 같이 가면 될 것 같은데?”
이규민이 턱짓으로 멤버들을 가리키자 자연스럽게 편이 나뉘었다.
이규민 쪽으로 바로 붙은 멤버가 둘, 내 쪽으로 붙은 멤버가 넷.
맨 마지막까지 갈팡질팡하던 조원이 이규민 쪽으로 이동하는 걸로 해서 각 넷씩 팀이 결정되었다.
“그럼 내일 오전 11시에 다시 보자.”
“그래.”
나는 마지막까지 짜증을 숨기며 제현호와 나머지 조원들을 데리고 옆 회의실로 향했다.
조금 전 있었던 회의실보다 묘하게 크기가 작은 듯한 인상에 잠깐 심사가 뒤틀렸으나 지금은 거기에 꽁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같이 합류해 줘서 고맙고. 내일 결과 보고 저쪽이 더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굳이 의리로 채택해 줄 필요 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중요한 건 미션 결과지 자존심 싸움이 아니니 당연한 말이었다.
“네!”
“넵!”
나와 같은 조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눈을 빛내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묘하게 책임감이 더해졌다.
“일단 브레인스토밍부터 해 볼까?”
어차피 기획부터 자료 조사에 발표까지 다 내가 하게 되겠지만.
독선적으로 비쳐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나는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현호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
“오, 되게 늦게 끝났네?”
거의 소등 시간 직전.
영인이 먼저 도착해 있던 기숙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동안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얼른 씻고 올게.”
나는 영인에게 더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며 샤워실로 향했다.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뜨거운 물로 후다닥 씻고 나오자 맥이 쭉 빠졌다.
“뭐, 회의하다가 꼬인 거 있어?”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축 늘어진 내게 영인이 기웃거리며 물었으나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몰라. 피곤해.”
커버곡이 갈려서 경쟁 상대는 아니었으나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가라. 지금은 너까지 감당할 기분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녹초가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충 예상은 했다만….’
제현호는 뭘 얘기해도 쓸데없이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양반인 반응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나머지 둘이었다.
‘여기서 동선을 이렇게 딱딱딱딱, 뒤돌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와이어 같은 거로 부우웅, 하고 등장할 수 있으면 진짜 괜찮겠다.’
‘와, 와이어 대박!’
‘어때? 괜찮지. 좋지!?’
와이어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되겠냐?
자본이 흘러넘치는 소속사에서 세트 비용을 전폭 지원하는 상황도 아니고 그게 되겠냐고.
어디서 콘서트 영상 보고 온 건 있어서는 자꾸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내뱉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음…. 와이어는 아무래도 우리 예산이나 안전 문제를 고려해서 어려울 것 같은데.’
자꾸 헛소리를 끼얹는 햇병아리들을 말리되 너무 나 혼자만 독불장군처럼 보이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하느라 진땀이 흘렀다.
‘하…. 그냥 다 싹 다 내보내고 혼자 하고 싶다.’
차라리 나 혼자 하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그게 되겠냐!?’ 싶은 것들을 최대한 다듬어서 ‘너네 의견도 반영했어~’ 조율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제현호는 의견을 아예 안 내서 이놈도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너는 제발 뭐라도 말을 좀 해라!’
내내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제현호가 끝내 나름의 발전을 보인 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가 끝날 때쯤이었다.
‘그럼 동선 이렇게 하고 마무리 한다?’
나는 쫑알쫑알 이제 막 고등학교 입학한 녀석들에게 시달리느라 진심으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놈들 의견에서도 어떻게든 착즙을 해서 반영도 하랴, 자료 정리해서 PT로 요약하랴.
머리가 두 개였으면 두 개가 다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을 것이다.
‘이제 진짜 끝이다!’
어차피 초안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스스로 타협하려던 순간 제현호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또 뭐? 나는 순간 아까 기회 줄 때 계속 입 다물고 있더니 왜 하필 지금? 발끈하려는 것을 가라앉힌 채 물었다.
‘왜? 보기에 뭔가 아쉬운 부분 있어?’
그러자 제현호가 잠시 말주변을 정리하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다시 말을 이었다.
‘중간에 댄브에서 다시 후렴으로 돌아와서 반복하는 구간이요. 장면만 보면 나쁘지 않은데 전체적인 밸런스로 봤을 때 후반에 너무 복잡도가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오….’
‘앗,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과연. 나는 4명이서 간단하게 동선 구도를 정리하기 위해 찍어 본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장면 하나로서는 괜찮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었다.
내가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제현호가 이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저나 형은 괜찮을 것 같은데…. 동선이 너무 복잡해서 다른 조원들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음? 나는 생각도 못 한 지적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
그러자 제현호가 다시금 똑똑히 내뱉었다.
‘이거 2주 만에 못 따라가요.’
이걸…? 나는 진짜냐는 듯 나머지 두 명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어? 일단 해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괜찮지 않을까요?’
묘하게 말에 확신이 없었다.
나는 잠시 동작이 격하긴 해도 안무가 결코 어렵지 않았던 단체곡 미션 때의 아수라장이 떠올랐다.
‘거기서도 디테일은커녕 외우는 것도 안 돼서 참사가 난 연습생들이 꽤 있었지.’
이번엔 기간이 넉넉하니 외우는 것까지는 모두 어렵지 않게 해낼 것이다.
‘하지만 동선 맞추는 건….’
혼자서 동작을 외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잘하면 멋있지만, 아차 하는 순간 완전 오합지졸이 되어 버리는 게 동선 맞추기인 건 맞는데….
‘겨우 이 정도도 걱정을 해야 할 수준이라고?’
S등급 내지 A등급 정도만 봤던 내 위치와 달리 D, F까지 보였던 제현호 입장에선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 어디까지나 그냥 제 생각이니까 괜찮을 것 같으시면 그냥 이대로도 저는 상관없어요.’
내 표정이 잠깐 굳은 것을 보고 슬쩍 눈치를 보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말하는데 눈에 보이는 단점을 그냥 넘길 수 있겠냐.’
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거기서 크로스하면서 빠지는 인원을 줄이자. 대신 허전하지 않으려면 뭔가 바꾸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거기서 사이드로 빠지던 두 명을 앞으로 끌고 와서 앉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제현호가 말한 대로 수정하고 나니 복잡도는 훨씬 낮아지되 멤버 각각의 주목도는 늘어났다.
‘괜찮네.’
이건 제현호의 판단이 옳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앞부분도 바뀐 밸런스에 맞춰 조금씩 손보느라 거의 쫓겨날 때까지 연습실에 있었지.’
결국 최종 기획안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다들 처음과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저희 진짜 열심히 했는데 꼭 저희가 채택됐으면 좋겠네요.’
나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었다. 저쪽이 뭘 준비해 왔든 질 수 없었다.
‘특히 저놈한테는…!’
절대 마음 맞을 일 없는 놈. 속으로 꿍얼거리는 사이 날이 밝았다.
결전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