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27화 (27/224)

#027. 그건 아니지만 (2)

보컬 그룹의 경연곡은 다른 그룹과 마찬가지로 두 종류였다.

[너란 아픔]과 [Trilling love].

너란 아픔은 호소력 짙은 보컬 비중이 큰 R&B곡으로 음정에 맞게 박자를 살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편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락 발라드로 소화를 해도 괜찮을 거고, 원곡 그대로 가지고 가도 잘 다룰 수만 있으면 나쁘지 않았다.

반면 Trilling love는 완전히 보컬 경연곡이라기엔 좀 애매한 면이 있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짝사랑하는 상대와 공포 영화에 갇힌 상황을 노래한 곡으로 랩 파트가 꽤 길기도 하고 퍼포먼스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둘 중의 어느 쪽이 유지원이랑 잘 어울릴 것 같냐면… 당연히 후자 쪽이지.’

단체 미션 때 보여 준 상큼한 소년미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가면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터였다.

장점인 음색도 보여 줄 수 있을 거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네.’

문제는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은 게 유지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앞선 [Trilling love] A조 경쟁에 몰린 인원은 14명. 그중 나를 포함한 8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 모두 B조 경쟁에 재차 뛰어들었다.

그리고….

‘하… 아니….’

딱히 행동이 재빠를 거라고 기대를 한 건 아니다만.

그래도 16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데 그 경쟁에서 밀릴 줄은 몰랐지.

뒤이어 [너란 아픔]에라도 들어가려고 시도는 하긴 했는데….

‘아….’

유지원은 거기서도 무슨 종잇장처럼 경기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면서….’

체격이 밀리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변명이라도 하지, 다들 악착같이 의자를 향해 달려드는 통에 기가 약한 지원은 눈이 마주친 상대에게 거의 다 앉은 자리를 움찔 내어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겨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코믹하게 개그 씬으로 넣을 수 있을 만한 기회를 카메라가 놓칠 리가 없었다.

‘방영분에 99% 나가긴 하겠네.’

내가 보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제법 귀여운 모습이기도 했다.

‘자기 몫을 챙기기만 했다면.’

문제는 지원이 그렇게 어영부영 남 좋은 일만 시키다가 결국 보컬 그룹에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어디 가게?’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지원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 좋은 틈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가 나를 비췄다.

‘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칼같이 외면할 수도 없고.

내가 Trilling love를 택한 이유는 심플했다.

전략적으로 그게 옳았으니까.

등급 심사에서 호소력 짙은 보컬을 들려줬으니 이제는 좀 청량하고 상큼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전략대로 가려면 ‘화이팅!’하고 응원하는 게 맞겠지만.

“…저, 어, 어떡해요?”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며 울먹이는 지원을 보니 이걸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거 퍼포먼스나 랩으로 가면 예상되는 반응이 뻔했다.

[- 인생은 유지원처럼^^ 프리라이딩 염염굿~]

[- 자꾸 비주얼로 영업하는데 얼굴로 입덕하기도 전에 전방위 민폐 뿌리는 거 보고 비호감으로 굳어짐]

[- 음색이고 나발이고 지금 지 파트 절어 놓고 표정 관리 안 되는 거ㅋㅋㅋㅋㅋ 아직 데뷔할 준비가 안 된 거 아냐?]

[- 다른 조원들이 너무 잘하는 거라고 실드를 좀 쳐 주고 싶은데 정도를 넘어서 뭐라 말이 안 나온다……. 아…… 얘한테 표 준 얼빠들아, 제발 반성 좀 해라. 그러니까 애가 발전이 없지.]

이마저도 조원으로 큰 불화 없이 둥글게 둥글게 끌고 가는 걸 목표로 하는 연습생들이 걸렸을 때의 희망 편이지.

조 내에서 왕따라도 당하면 무슨 참사가 벌어질지 벌써부터 아찔했다.

“……음.”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MC 비안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저 혹시 제 포지션을 다른 연습생에게 양보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MC 옆으로 심판석 같은 별도 공간에 앉아 있던 보컬 멘토, 마선경의 표정이 움찔 흔들렸다.

“오, 서인수 연습생. 누구에게 양보하실 건가요?”

비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심판석에서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유지원 연습생에게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면 서인수 연습생은 미니 게임에서 조 편성을 새롭게 다시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걸 모르고 양보한다고 한 건 아니니까요. 나는 침착하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이에 나를 강력한 아군 또는 적장의 명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연습생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같은 A조 소속 연습생들은 나라라도 잃은 표정이었고, B조는 반대로 표정이 활짝 폈다.

“감사, 합, 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지원이 내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단 지원을 달랬다.

“괜찮아요. 다른 포지션도 도전해 보고 싶었으니까.”

아… 이러면 지금 이 장면이 꼭 방송에 나가야 하는데. 안 나갈 경우 메보 포지션에 대한 내 의지가 단순한 변덕에 흔들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

여러모로 내게는 득보다 실이 큰 결정이었다.

‘그래도 저걸 뭐….’

니가 알아서 해라, 냉정한 서바이벌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지는 걸 직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내가 소속된 조는….

“잘 부탁드립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박, 저희 조 진짜 느낌이 좋네여.”

퍼포먼스 그룹의 [Hater later] B조.

섹시 댄스 중심의 일렉트로닉 팝이었다. 최악까지는 아닌가. 그래, 그게 그나마 위안일 수 있는 심란한 꼴이었다.

“잘… 부탁합니다.”

나는 애써 내키지 않는 표정을 숨기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왜 하필 이놈이.’

그도 그럴 것이 조 멤버에 제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놈이 끼어 있었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정도는 같은 조가 걸릴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

바로 이규민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규민이 지금까지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다.

다만 사람이 살다 보면 직감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이 자식이랑은 절대 마음 맞을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게 나에게는 이규민이었다.

나의 애매한 감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조원들의 중심에서 조금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조원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는 제현호가 꾸벅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현호가 A, 이규민이 B고, 내가 S니까….’

나머지는 B등급 1명, C등급 2명, D등급과 F등급이 각각 1명으로 정말 골고루 분산되어 있었다.

이…. 과하게 완벽한 밸런스를 어떻게 커버해야 하지?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던 찰나 스태프가 다가와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작은 회의실에 책상과 8명분의 의자, 화이트보드만 덜렁 놓여 있었다.

관찰용 카메라가 사각지대 없이 회의실을 조명하고 있었다.

녹화되는 화면을 확인한 스태프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규민이 입을 열었다.

“저희 우선 교통정리부터 할까요? 서로 그냥 말 트고 형, 동생 하는 게 편할 거 같은데.”

같은 소속사 출신들이랑 무슨 동네 연습실인 것처럼 드러누울 때부터 알아봤다.

모이자마자 나이 서열질부터 하려 드는 태도에 나는 이규민에 대한 비호감이 한층 더 짙게 자리 잡았다.

“아, 그렇게 할까요? 저는 20살이에요.”

이규민의 의견에 동조하는 D등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를 말했다.

“저는 19이요.”

“저도 열아홉.”

“저는 스무 살이에요.”

“열아홉이요.”

대체로 18살에서 20살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멤버들 사이, 나이를 말하지 않은 건 이규민과 나뿐이었다.

“아, 그러면 내가 제일 형이네?”

니가 몇 살인데. 나는 처음부터 단단히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 객관적이지 못한 태도로 이규민을 바라보았다.

“규민 씨는 몇 살인데요?”

최대한 시비 거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가볍게 미소를 띠며 묻자 이규민이 태평하게도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21살. 1월생이라 생일 제일 빠를걸.”

내 생일이 언제인 줄 알고…. 내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아주 일순간 숨기지 못하자 이규민이 덧붙였다.

“생일 7월 19일 아니야?”

“…?”

정답이었다.

“네?”

내가 순간 뭘 잘못 들었나 되묻자 이규민이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는 무슨 네야. 그냥 반말해. 너 정도로 유명하면 프로필 정도는 누구라도 한 번 정도는 보지.”

아니, 프로필을 찾아보는 거랑 생일까지 외우는 건 다르니까? 놀란 내가 잠시 벙찐 것과는 별개로 이규민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시켜 갔다.

“그럼 조장은 나 아니면 인수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뒤로 자연스럽게 조장은 귀찮은 일 많으니까 내가 할게, 같은 말이 나오기 전에 대답했다.

“내가 할게.”

각자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획의 주도권을 남의 손에 쥐여 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규민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음~ 뭐, 네가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뭘 같긴 한데야. 그럼 뒤를 말하지 마. 나는 침착하게 본심을 숨기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 포지션이 보컬 쪽이어서 불안한 거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메인 댄서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 볼게.”

물론 진짜 메인 댄서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내가 하는 게 제일 나을 때는 피할 수 없겠지만… 나는 올 라운더 이미지보다는 메인 보컬 이미지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그러자 규민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웃었다.

“아니,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럼?”

“나도 조장 하고 싶어서.”

“…….”

규민이 눈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간 고양이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미친놈인가….’

그리고 일순 회의실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결국 비장의 카드, 쓸데없이 길었던 연습생 기간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경험이 많으니까, 서로 조율하면서 맞춰 가려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규민이 먼저 말꼬리를 가로챘다.

“나도 8년인데.”

“뭐?”

“나도 중1 때 캐스팅됐다고.”

입은 분명 활짝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

여기서 너는 중소고 나는 대형이잖아, 같은 급을 나누는 말을 내 입으로 꺼냈다간 나는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입꼬리가 절로 씰룩여진 그때 C등급 연습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형들 다 잘하실 것 같은데. 그냥 두 분이서 같이 공동 리더 하면 안 돼요?”

그리고 그 순간 잠잠했던 시스템 알림이 팟 하고 눈앞에 나타났다.

[<경고> 사이다 지수가 [낮음]으로 하락했습니다.]

[[낮음]상태가 24시간 이상 지속될 경우 돌발 에피소드가 발생합니다.]

처음으로 겪는 지수 하향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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