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각자의 사연 (3)
승재가 모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역대급 불효와 어디서도 말할 수 없는 닉네임의 유래만을 남기고 케이팝의 역사 뒤로 사라진 지도 반년.
그 사이 승죽의 덕친들은 타 그룹, 2D, 히어로 영화, 드라마 등 새로운 본진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채였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상처를 망각하기 시작한 그들은 다시 슬금슬금 모여들어 너 나 할 것 없이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 요즘 팔 만한 신인 없?]
그러면 누군가 한 명쯤은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의 새로운 스윗 하트를 영업하기 시작했지만 서로 끊임없이 ‘얘는 어때요’ 권하기만 할 뿐.
절대로 영업당하지 않는 방패와 누구도 영업하지 못하는 창의 대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이 타임라인이 아이돌로 만난 사이라는 것을 슬슬 잊어버릴 즈음 누군가 타임라인에 짱돌을 던졌다.
[XOXO] 오전 1:49
[XOXO] 이거 보심? KMB에서 서바이벌 한대요 오전 1:50
‘KMB라면….’
Korean Music Broadcasting. 케이블이긴 하지만 케이팝이나 뮤지션 서바이벌 관련해서는 선두자로 손꼽히는 채널이었다.
‘작년에 서바이벌 화제성 망해서 한동안 오디션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작년 말 KMB에서 1억 원의 상금을 걸고 야심 차게 준비했던 서바이벌은 보컬 최강자를 겨루는 프로그램이었다.
1화부터 편향 편집 논란으로 대대적인 보이콧이 있었고, 샤프심보다도 못한 시청률로 누가 우승했는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보통 한두 명 정도는 음원 강자로 유명해지는데도….’
실력은 나름 탄탄한 사람들이 상위권에 랭크되었음에도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나 말아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서바이벌을 한다고?’
가수 오디션 망했다고 이번엔 아이돌 오디션을 들고 왔냐.
승죽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변을 보냈다.
[나] 저 서바이벌은 원래 관심 없어요 오전 1:52
[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아니면 심장이 뛰질 않음ㅜ 오전 1:53
그렇다고 너무 짬이 차면 그것대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완전 쌩신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노련미가 느껴질 정도는 아닌.
2년 차에서 3년 차 정도의 커리어를 쌓아 가는 풋풋한 그룹이 승죽의 이상향이었다.
‘신인은 너무 뭣도 모르는 애들을 내가 제로부터 지켜봐야 하잖아.’
그들에게는 데뷔가 처음일지 몰라도 케이팝에 고일 대로 고인 승죽은 신인들의 미숙한 모습이 귀엽기는커녕, 답답하게만 보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팬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돌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차근차근 지켜보고 싶은 사람] 그리고 [개소리 말고 돈 받고 일하면 단디 해라 프로다운 자세를 요구하는 사람].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했고 승죽은 후자에 가까웠다.
승재의 인성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흐린 눈으로 넘긴 이유도 뻔했다.
‘그 새끼가 실력 하나만큼은 백 년 묵은 어그로의 할아버지가 와도 깔 수가 없었으니까.’
신인도 아니고 데뷔도 못 한 연습생들이 나와 펼치는 학예회?
너네 케이팝이 우스워?
승죽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프로그램이었다.
승죽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대화명 XOXO, N년 차 덕질 메이트였던 지인이 냅다 시장통 상인마냥 호통을 쳤다.
[XOXO] 님이 그러니까 아직까지 정착을 못 한 것임 오전 1:53
[XOXO] 한 세 명만 골라 봐요 빨리 오전 1:53
아니, 나 신인은 관심 없다니까? 더구나 서바이벌? 일단 데뷔부터 하고 짬이 차면 나중에 다시 보자. 풋풋한 연습생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하게 냅두라고.
승죽은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등 떠밀려 어필 영상이 공개된 페이지에 접속했다.
고만고만한 연습생들 사이, 아직 카메라 마사지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 텐데 눈에 띄는 비주얼들이 제법 있었다.
‘웬일이야…. NO 소속도 나오고 비주얼도 꽤 괜찮은 연생이 좀 있네….’
그래 봤자 연습생은 연습생. 영상을 재생하는 순간 시작되는 공감성 수치에 승죽의 안면이 뜨거워졌다.
[우으응~ 재쭈니는 매니저님 사랑만 머꼬 살 꼬얌~]
‘아악! 선량한 연습생들한테 이런 거 좀 그만 시키라고~!’
그들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닐 터다.
주목받아야 하니까. 간절하니까.
그 마음을 이렇게 이용하는 게 싫어서 내가 신인이나 연습생들은 마음이 안 움직인다고 하는 건데!
승죽은 비명을 지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심장이 아주 경미하게 떨리긴 했지만 수치심이 샘솟는 멘트에 타격감 없이 다음, 또 다음을 누르던 찰나.
신인 같지 않은 바이브가 느껴지는 연습생이 승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개인 연습생 서인수입니다. 국민 매니저님들께 좋은 무대 보여 드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필사적으로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끌어다 붙인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 한없이 침착한 인사였다.
그러나 조금도 빼는 기색이나 부끄러운 내색 없이 여유가 넘치는 태도에 호기심이 동했다.
‘이 새끼는… 뭔데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지.’
물론 얼굴이 여유가 넘칠 만하긴 해. 이 비주얼로 어떻게 개인 연습생이지?
이건 100% 대형 출신이었다가 나온 게 틀림없었다.
다음을 클릭하지 못하고 영상을 홀린 듯 보고 있으니 곧바로 화면 속 연습생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귀가 번쩍 뜨였다.
‘이게 무반주라고?’
냅다 반응이 좋을 만한 클라이막스 파트부터 흔들림 없이 부르는 것이 보통의 안정감이 아니었다.
연습생이 다짜고짜 보컬 레전드 그룹의 히트곡을 고른 것만 해도 배짱이 좋은 것 이상인데.
‘무반주로 예열 없이 시키면 원곡 그룹도 이렇게 못 해.’
이거 뭐지? 진짜 신인? 중고 신인도 아니고 그냥 신인이라고?
승죽이 홀린 듯 서인수 세 글자를 SNS에 검색한 순간 귀신같이 메시지가 도착했다.
[XOXO] 얘 좀 승죽 님 픽 같은데 오전 1:59
[XOXO] ‘지금 바로 재생해 보세요 - 서인수 개인 어필 60초’ 오전 1:59
[XOXO] (사진) 오전 2:00
[XOXO] ^^ 오전 2:00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홀린 듯 반복 재생을 걸어놓고 메시지를 확인하자 생각도 못 한 이미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XOXO]
[1차 미션 방청권 당첨자 안내]
201X년 X월 XX일 오후 2시 - 여의도 KMB홀 ‘겟 데뷔 위드 미’ 1차 미션 방청권(2인)에 당첨되셨습니다. 당첨자 외 1인 동반 입장이 가능하니 지정된 시간에 맞춰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2:01
[XOXO] 빨리 언니라고 부르세요 오전 2:01
SNS에 뜬 검색 결과를 보자마자 승죽은 왜 이 연습생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 서인수 NO 나가더니 바로 서바로 나옴??]
[- 와 NO 안목도 드럽게 없다 서인수 8년 동안 지하에 박아 두고 방출이라니]
[- 몇 주 전엔가 NO 종목 토론방 난리 났다더니 서인수 나간 거 때문이었구나ㄷㄷ]
[ - 서인수 공개 연습생 활동 몰아 보기 (링크)]
홀린 듯 서인수가 그동안 밟아 온 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던 승죽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결심했다.
‘확인만 하러 가는 거야, 확인만.’
방청은 무료고 팔지 말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이 짧은 영상에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렵지 않을 터다. 물론 다른 연습생들은 그것도 못 해서 망신살이라고 알티를 타고 있지만.
얼굴에만 심장이 뛰는 얼굴 픽, 실력에만 심장이 뛰는 실력 픽, 그리고 다 필요 없고 덕심만 자극되면 다인 덕심 픽.
셋 다 충족되지 않으면 미동도 없는 승죽의 얼어붙었던 심장이 소생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결심이 선 승죽의 손이 슬그머니 자판으로 향했다.
[나] 언니. 오전 2:04
내가 N년 차 지인의 동생이 된 거지 아직 개가 되진 않았다.
아직.
승죽은 여전히 반복 재생 중인 화면 속에서 미소짓는 인수를 홀린 듯 바라보며 애써 부정했다.
***
‘…….’
한편 야심한 시각.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한다면 잠들었어야 하지만… 이 건물 내에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어 있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형 언제 잘 거예요?”
나는 옆 침대에서 핸드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영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 자면.”
내 빠른 대답에 영인이 곧장 답했다.
“밤새우시려고요?”
“안 자게?”
내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움찔거리자 영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신기해서요. 이제 진짜 연습생이구나 싶어서….”
“지금까지는 아니었어?”
내가 피식 웃자 영인이 씩씩하게도 말했다.
“실감이 안 났어요. 공연은 버스킹으로도 많이 해 봤고, 솔직히 신청했을 때만 해도 진짜 될 줄은 몰랐거든요.”
몰래 이어폰을 끼고 영인의 60초 어필 영상을 본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합격 안 시키면 말이 안 되는 거지. 본인이 붙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고?
겸손이 지나치다 못해 기만이었다.
“네가 떨어지면 누가 붙겠냐.”
비행기를 태우는 것도 아니고 정말 팩트만을 간결하게 말하자 영인이 으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형 같은 사람이요?”
얘가 왜 이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띄워 줘도 나올 거 없다.”
“아뇨, 뭐 나올 거 노리고 하는 말이 아니라요.”
“그럼 뭔데.”
나는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영인을 빤히 마주 보았다. 슬쩍 드러난 영인의 핸드폰 화면에는 뜻밖에도 내 이름 석 자가 빛나고 있었다.
[검색 결과] 서인수
‘아아….’
이름과 얼굴을 아는 연습생들의 조사를 할 겸 내 이름을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나랑 다른 연습생들이랑 버즈량이 같을 수가 없지.’
나는 연습생 생활만 8년을 했으니까. 만으로는 7년이고, 그중 6년은 공개 연습생이었다.
각종 자잘한 소규모 모델 일이나 연말 공개 영상 같은 데 얼굴을 비추는 것은 물론, 유명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백업 댄서로 무대에 오른 적도 있었다.
‘내가 구른 짬이 몇 년인데.’
그동안 활동한 내역만 추려도 웬만한 무명 아이돌 못지않을 터다. 내 목소리로 나온 음반은 단 하나도 없지만.
그동안 대체 언제 데뷔하는 거냐고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던 팬들도 많은 만큼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즈량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아진도 NO 출신이다 보니 꽤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내 케이스를 보고 위축될 필요는 없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나는 짧게 한숨을 삼키며 주섬주섬 잘 준비를 했다.
“왜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정곡을 찔린 영인이 움찔거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 같아서요.”
그럼 당연하지. 공개된 연습생만 99명이다. 지금 이름 알려진 애들, 소속사가 유명한 애들 보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끄트머리에 박혀 있는 개인 연습생을 몇 명이나 클릭해 본다고.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조바심이 생겼어?”
영인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그럼 이제 그만둘 거야?”
“네?”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