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뭐가 또 자꾸 (3)
“…….”
안 그래도 놀라고 있던 통에 제현호까지 갑자기 나타나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 하시냐고요.”
내가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움찔거리자 제현호가 다시금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 발에….”
이놈을 찾아다니고 있긴 했는데. 이런 한심한 꼴로 갑자기 맞닥뜨리게 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설득이고 나발이고. 내 발에 걸린 게 뭔지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 내 발에 혹시 뭐 걸린 건지 보여요?”
나는 어둠 속에서 눈조차 똑바로 뜨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며 내 발밑을 가리켰다.
‘X발… 뭐야, 이거…. 왜 움직이냐고…!’
내 발을 휘어 감고 있는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것)이 조금 전부터 줄곧 슬금슬금 내 발목을 훑고 있었다.
이거 절대 그냥 머리카락 아니야. 혹시 벌레? 벌레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
내 모습을 바라보던 제현호가 선명하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를 향해 다가와 발목을 덥석 잡았다.
“!!!!! 뭐,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자 제현호가 한심하다는 듯 내 발목에서 떼어 낸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가발이네요.”
한심하다는 뉘앙스가 잔뜩 묻어나는 제현호의 얼굴 옆으로, 위잉-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흩날리고 있는 낡은 가발이 보였다.
“…아.”
“소품으로 쓰다 버린 것 같은데요.”
그게 왜 여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자 분장용 의상이나 소품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쑤셔박혀 있는 박스가 보였다.
잠깐의 정적 이후, 순식간에 이성이 다시 돌아왔다.
쪽팔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어, 감사, 합니다….”
나는 간신히 감사를 표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제현호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대답이나 하세요. 여기서 뭐 하세요?”
“어….”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머리가 차게 식었다.
내 목표는 이놈이 이탈하지 않도록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제현호는 이미 내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괜히 착한 척 감정에 호소해서 ‘니가? 웃기시네.’ 같은 반응을 이끌어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차라리 정면 돌파가 낫지.’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쪽이 이쪽으로 가는 걸 봐서요.”
“네?”
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제현호가 역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
“다른 연습생들 다 밥 먹으러 가는 데 혼자 안 좋은 표정으로 이쪽으로 빠지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그러자 제현호가 곧장 예상한 대로의 반응을 돌려주었다.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있지. 물론 10분 전만 해도 그렇게 상관있진 않았지만.
케이 피디가 서브 에피소드의 보상으로 코인과 지수 보정 효과 등이 발생할 수 있음을 언급한 그때부터 매우 상관있어졌다.
“필요해서?”
“뭐가요.”
이렇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고 남들이 우습고 연예계 판 돌아가는 것까지 내려다보이는 것처럼 구는 애들 내가 하루 이틀 봤나.
태도를 보니 뻔했다.
내가 연습생 무리에서 맏형으로 지낸 시간만 몇 년인데. 이런 식으로 자아도취에 빠져 오만하게 구는 녀석은 차고 넘쳤었다.
그 방자하기 짝이 없던 아진마저 연습실로 돌려보냈던 나다. 이런 일에는 도가 텄지.
“그쪽이요.”
나는 어둠 속에서 산뜻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현호가 이해가 잘 안된다는 듯 인상을 썼다.
“다른 애들 하는 거 봤죠. 어땠어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 말 그대로예요. 나 돌려서 말 안 하니까 꼬아서 듣지 말고.”
그러자 제현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틈을 벌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되게 못한다. 시간을 그렇게 줬는데 저것밖에 못 하나? 저래서 진짜 데뷔할 생각이 있는 건가?”
나의 노골적인 발언에 정곡을 찔린 제현호가 흠칫 한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정답이죠?”
“…어떻게?”
경계심이 잔뜩 묻어나는 태도에 나는 속으로 실소가 잔뜩 나왔다.
어떻게는 무슨.
그럼 그걸 얼굴에 다 티를 내 놓고 모를 줄 알았냐? 다른 사람들이 바보야?
어리다, 어려. 나는 쯧 가볍게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알긴. 태도로 보이지. 그리고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하거든요.”
“…….”
“순위는 개인전이라도 데뷔는 개인전이 아닌데, 아무나 같은 팀으로 걸리면 나까지 발목 잡힐 수 있겠다… 하는 생각?”
이런 타입은 본인의 능력에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니 일단은 칭찬으로 회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 실력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고 우위를 점하는 것이 깔끔했다.
내 판단을 따르는 것이 본인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협상 결렬이겠지만….
‘그게 안 되면 애초에 데리고 갈 가치도 없고.’
내가 잘하는 건 이미 증명했으니 알 테고. 나랑 같이 갈래? 슬쩍 미끼를 던진 나는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제현호의 얼굴을 살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하도 어두침침해서 안 뵈는 것도 있긴 한데… 내게는 썩 좋지 못하게도 표정이 여전히 밝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마침내 제현호가 미끼를 문 순간 나는 한 번 더 그물을 던졌다.
“나랑 협력할래요? 파이널 미션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줄게요.”
어둠 속에서 비상등 불빛을 받은 눈이 반짝 빛났다.
***
‘하…….’
그리고 30분 후.
빠르게 제현호를 낚아채서 복귀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당에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
‘여기서 이게 뭐 하는 거지.’
나는 여전히 제현호와 어두컴컴한 폐건물 안에 갇힌 채였다.
그것도 협상이 완전히 결렬된 채로.
‘아니, 저 새끼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겠냐고.’
제현호는 내 제안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그 이유가 아주 가관이었다.
‘싫은데요. 저 지금부터 하차할 거라고 말할 생각이라서요.’
‘네?’
기껏해야 기분이 울적해서 니들이랑 섞여 있을 기분이 아니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시위하는 사춘기 청소년의 변덕 정도를 생각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하차한다고요?’
‘네.’
‘왜요?’
‘그걸 제가 왜 그쪽한테 말해야 해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게 아니긴 하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왔던 길을 침묵 속에 이동한 우리는 뜻밖의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철컥철컥철컥-
문이 하도 낡아빠진 탓인지 아니면 밖에서 잠근 건지, 문고리를 한참을 돌린 끝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문… 밖에서 밖에 안 열리는데?’
제현호도 그걸 깨달았는지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한참을 말없이 폐건물의 이곳저곳을 뒤져 댄 끝에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이거… 밖에서 구조해 주지 않으면 못 나간다.’
나는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우리 이쪽으로 가는 거 CCTV에 잡혔을 테니까 아마 식사 끝나고 소등 시간까지 안 보이면 찾으러 올 거예요.’
최악의 최악이라고 해도 무단 이탈로 경고 정도지…. 백골 상태로 20년 후에 발견!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안심시켜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별로 효과는 없는지 제현호의 낯색이 눈에 띄게 창백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핸드폰도 연락할 방법도 없고 문을 향해 아무리 외쳐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는 어둠 속에 갇혀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다.
‘하…. 빨리 나가고 싶다.’
어색한 침묵에 나는 자꾸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꼰대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괘씸한 한편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애를 상대로 뭐 짜증 내 봐야 소용없었다.
‘어차피 하차한다는 놈을 뭘….’
끌고 가는 것도 의지가 있어야 데리고 가는 거다.
재능과 얼굴이 아깝긴 하지만 본인 인생이고 본인 판단인데 내가 뭘 어떡….
‘어?’
대체 또 뭐가 불만이냐고 속으로 꿍얼거릴 생각이었는데, 제현호의 이마가 어쩐지 부분부분 번들거렸다.
꼭 땀이라도 뻘뻘 흘리는 것처럼.
에어컨이 안 돌아가긴 하지만 지하공간이라서 덥진 않은데 왜 저러지? 나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해요?”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을 무시할 만큼 인정머리가 없진 않았다.
‘그랬으면 그냥 무시하고 6년 전에 남의 공 가로채서 데뷔했겠지.’
내가 다가가 묻자 제현호가 흠칫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냅다 어깨를 잡고 카디건 소매를 늘려 이마를 쓸자 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열은 안 나는데. 더워요?”
내가 한 번 더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여간 붙임성 하고는…. 나는 쯧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하지만 곧, 제현호가 일부러 내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현호 씨?”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제현호는 눈을 감은 채 의식이 멀어진 듯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요! 야!”
내가 결국 반말까지 찍찍 내뱉는 지경이 되었으나 제현호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뭐지? 평소에 뭔가 지병이라도 앓고 있었나?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
나는 답답한 마음을 우선 뒤로한 채 다급하게 문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안에 사람 있어요! 구해 주세요!!!”
내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외쳐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대로 우리의 실종을 눈치챈 제작진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돌아 버리겠네….”
설상가상으로 내가 곁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제현호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뭐라는 거야. 어디서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지수 틀렸다고, 인마.
나는 제현호가 아무 말이나 하는 사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어깨를 흔들었다.
“아저씨, 여기서 헛소리하고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그만하고 정신 좀 차리자?”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큰 손으로 훌쩍거리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누나,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니만 여기 두고 가겠냐.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대꾸했다.
“안 두고 가! 안 간다고!”
나는 제현호의 손을 떼어 낸 다음 카디건을 벗어 덮어 주며 쓸데없이 넓은 등짝을 신생아 달래듯 토닥였다.
“버리고 어디 안 가니까 진정해.”
그러자 겨우 진정한 듯 숨소리가 한결 가라앉았다.
‘이제 이걸 뭐 어떡해야 하냐.’
그냥 좀 말로 설득해서 복귀시킬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일이 커진 상황에 나는 눈앞이 컴컴해져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금속성의 무언가가 빛을 반짝 반사시켰다.
‘어…?’
경첩? 아니면 잠금 장치?
나는 단번에 제현호의 손을 뿌리치고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