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잃을 건 없을 텐데 (3)
소동의 중심에는….
‘그놈인가.’
뚱한 표정의 현호가 있었다. 또 무슨 일이지. 아까 나한테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예상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한창 스트레스받을 시기의 애들을 우르르 모아 놓으니 싸움 나는 거야 흔한 일이긴 한데….’
이제 겨우 촬영을 시작한 지 이틀째인데 벌써부터 터지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주위에서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자극적인 편집 거리를 찾은 카메라가 소란스러운 방향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조금 전 본인을 멘토로 소개한 메이즈가 다가와 묻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뭔지 얘기를 해야 내가 해결해 주지. 아무도 말 안 할 거야?”
하필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이 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이래서야 진짜 무슨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다들 교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오직 카메라만이 부지런히 바쁘게 돌아갔다.
“형빈이가 한번 얘기해 봐. 무슨 일이야?”
결국 멘토가 제일 나이가 많은 연습생 하나를 콕 집어 묻자 24살이었나? 개중에 제일 연장자인 연습생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배치 순서 때문에 잠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현호가 끼어들었다.
“오해요?”
현호의 지적에 다들 얼굴에 그려진 글씨가 훤했다.
‘저 새끼 입 좀 어떻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오해? 뭔데? 자세히 설명을 해야지.”
메이즈가 팔짱을 낀 채 더 설명해 보라는 듯 유도하자 형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현호가 입을 열었다.
“오해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연습생들끼리 짜고 사람 바보 만들려던 거겠죠.”
이리저리 앵글을 옮기던 카메라 중 한 대가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지!’라고 말하듯 본격적으로 현호를 집중 마크하기 시작했다.
‘바보 만들려던 거겠죠.’
정말 어디다 갖다 붙여도 어그로 끌기 좋은 최적의 문장이다. 감탄하기도 잠시, 형빈이 변명했다.
“아뇨, 진짜 그런 게 아니라요. 시문이가 키가 좀 작은 편이잖아요.”
“그런데?”
메이즈가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문제의 두 번째 주인공인 시문이 나와 손을 들었다.
“저희 순위대로 자리 배치를 하면 제가 정면에서 봤을 때 가려지는 상황이라….”
“그래서.”
그리고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왜 말 못 하는지 알겠군.’
센터와 서브 센터처럼 연출 팀에서 특정인을 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같은 구획 안에서는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분위기이긴 했다.
보통 같은 소속사 출신이거나 아니면 같은 회사 출신 산하 레이블 출신이거나 해서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더 밀어줄 연습생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블레인온이… 어디 소속된 레이블이었나?’
그런 건 따로 없었던 것 같은데.
배치는 기본적으로 순위대로다. 앞 순위일수록 정면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배치되는 게 당연했다.
“왜 말을 못 해? 너희들끼리 이렇게 분위기가 나빠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렇게 지체할 시간 없어요. 너희 놀러 온 거 아니잖아?”
메이즈가 한 번 더 심각한 분위기로 채근하자 시문이 자백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제현호 연습생한테 저랑 자리를 좀 바꿔 줄 수 있을지 부탁을….”
시문이 머뭇거린 순간 현호가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죠. 뒷자리로 가라고.”
현호의 정정에 메이즈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시문은 같은 소속사 출신 연습생이 걱정한 대로 키가 작았다.
‘170은 되나…? 거의 머리 하나 차이네.’
현호가 지나치게 큰 탓도 있었다.
이대로 무대에 올리면 현호에 가려져서 각도를 옆으로 돌리지 않는 한 안 보일 것 같긴 했다.
‘그럼 지들끼리 바꿔 주든가.’
그건 또 싫었겠지. 어떻게 해도 장신인 현호 뒤에 가려질 것 같으니까.
현호를 뒤로 보내려고 자기들끼리 배치를 바꾸고 원래 모두가 더 잘 보일 수 있는 쪽으로 배치 조정이 가능한 것처럼 통보한 모양이었다.
‘바보도 아니고 그걸 알았다고 동의하겠냐.’
현호가 즉각 항의하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자리를 바꾸려면 먼저 동의를 구해야지. 너희들끼리 합의도 안 된 채로 통보를 하면 어떡해.”
메이즈의 한숨에 시문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분위기 어떡하냐.
플로어 리허설은 일시 중단. 모든 연습생들의 시선이 쏠린 와중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높은 순위 연습생들은 대체로 ‘가려지는 게 걱정됐으면 더 잘해서 높은 순위 받았어야지.’
그리고 반대로 구석진 자리나 앵글에 한 번이나 들까 싶은 자리를 배정받은 연습생들은 그 반대였다.
‘어차피 같은 단인데 뒤로 가도 잘 보이면서 좀 배려해 주면 안 되냐.’
배려를 강요한 쪽도 강요받은 쪽도 모두 이기적인 놈 소리를 들을, 누구도 얻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 제작진은 얻을 게 있긴 하겠다.’
가뜩이나 다들 짧은 시간 안에 안무를 외우고 배치에 익숙해져야 해 날이 선 와중, 이렇게 불쑥 연습 시간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불만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무튼, 제현호 연습생은 자리 바꿔 줄 생각이 없다는 거죠?”
메이즈가 교통정리차 묻자 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휴. 그러면 3구역은 배치 변경 없이 순위 그대로 확정하는 걸로 합시다. 됐죠?”
졸지에 모두에게 이기적인 인상만 남기고 키 작은 이미지로 굳어진 시문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제현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뚱한 얼굴 그대로였다.
‘대담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면 짜증이 나긴 하겠지만.
키가 저렇게까지 차이가 나면 가려질 걱정도 없을 텐데.
‘보통이면 이렇게 일 안 키우고 그냥 넘어가겠지.’
억울하더라도 최대한 카메라에 ‘내가 배려해 줘서 시문이가 잘 나오게 됐어요.’ 어필해서 천사표 이미지라도 얻는 게 최선이다.
요령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반드시 앞자리에 나와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화면에 더 크게 잡히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간절하겠지만 편집본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방영되는 것보단 낫잖아.
이렇게 소란을 키워서 자리를 지킨 건 명백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곧 리허설이 재개됐고 다른 구역인 제현호에게는 신경 쓸 틈도 없이 일정이 휘몰아쳤다.
“자자, 집중력 흐트러진 친구들 가서 물 마시고 오세요!”
하루 온종일 춤만 추는 트레이너와 달리 연습생들은 할 게 많았다.
아이돌이 춤만 추냐고. 보컬 트레이닝도 받고, 대형 같은 경우에는 해외 진출에 대비해서 언어 교육도 받는다.
아무리 어린 게 장땡이라지만 댄서의 체력을 따라가긴 솔직히 힘들었다.
‘몇몇만 빼면….’
흘끔 주위를 돌아보니 기진맥진 상태에 빠지지 않은 건 열 손가락도 채 되지 않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어도 나름 대형에서 구른 아진도 저렇게 헥헥거리는데….
우리 구획에서 멀쩡한 사람은 나… 하고 영인 정도인가. 영인은 오히려 너무 펄펄 날아다녀서 문제였다.
“그러취! 거기서 그렇게 박자 살려서 디테일 넣으면, 이야. 감이 좋네!”
남들 다 바닥에 널브러져서 쉬고 있을 때 보조 트레이너를 붙잡고 디테일 점검받는 걸 보니 정말 괴물 같았다.
A 등급 라인 쪽에서는… 예상대로 하연이 튼튼한 두 다리로 연습실 바닥을 우뚝 딛고 서 있었다.
‘조금 지친 것 같긴 한데.’
다른 녀석들은 바닥에 붙어 강당 바닥과 일체가 되고 있었으므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은찬은 뭐…. 바닥에 주저앉아서 하연이 내민 생수병을 받아 들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프로듀싱 담당이라더니 춤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가 보네.’
등급 심사 때는 크게 티 나지 않았지만 이런 데서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본래 재능이 있는지, 아니면 노력으로 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끌어올린 건지.
‘전자든 후자든 아무튼 무대 위에서 잘하기만 하면 상관없다만.’
겨우 이거 하고 이렇게 지치면 쓰나. 쯧 짧게 혀를 차는 와중 A 등급과 B 등급이 섞여 있는 구역에서 두 명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제현호….’
제현호는 여전히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마치 혼자 다른 연습생들을 따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야 아까 분위기가 그 모양이었으니….’
저거 괜찮으려나. 어차피 화면에만 멋있고 예쁘게 잡히면 된다. 설마 무대 위에서까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진 않겠지.
그보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따로 있었다.
“형, 뭐 해요. 일어나세요.”
B 등급 연습생 중 하나가 드러누워 있는 누군가의 발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자연인처럼 바닥에 누운 규민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발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몰라, 나 죽었어. 멘토 쌤한테 제사상에는 샤인머스캣 꼭 올려 달라고 전해 줘.”
“형 제사상에 멘토 쌤이 왜 과일을 올려요.”
“애플망고도.”
다들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혀 하는 와중 소란의 주인공이 꾸역꾸역 덧붙였다.
“망고는 꼭 항공 직송이어야 해.”
“형을 항공 직송으로 버리러 가기 전에 일어나세요.”
규민이 비주얼이 망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바닥에서 버둥거리자 카메라가 규민의 추태를 고스란히 담았다.
“유언으로 남겨 달라니까? 애플망고가 먹고 싶소….”
“형이 무슨 20세기 문인이냐고요.”
지켜보고 있던 PD가 가까이로 가더니 슬쩍 규민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자 규민이 재빨리 레이어드한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피디님.”
규민의 앙탈에 PD가 웃으며 물었다.
“이규민 연습생, 지금 뭐가 제일 생각나요?”
규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XX로 XX에 계신 저희 할아버님이 생각납니다.”
“규민 형 친가가 한우집이래요.”
“와씨, 다 붙어. 헤쳐 모여, 헤쳐 모여.”
“대관령대한소가든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
다른 연습생이 보기엔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대로 개그 이미지로 갈 생각인가?’
상호명을 말한 부분은 편집되겠지만 다른 연습생과 만담을 펼친 부분은 짧게라도 여기저기 끼워 넣기 좋아 보였다.
‘일부러 저런 캐릭터를 의도한 거라면….’
나름대로 전략이라 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밑바닥을 보여 주는 걸 수도 있고.’
나는 영인이 여전히 규민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점검하고 세트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자리 서 주세요!”
이윽고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쭉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