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잃을 건 없을 텐데 (2)
영인이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형이 뭘 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렸죠. 당장 단체 곡 녹화 끝나고 나서 있을 컨셉 평가용 멤버를 찾는지, 아니면….”
“아니면 뭐?”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바로 말하지 않고 질질 끄는 태도가 제법 능숙했다.
냅다 물고 도망 다니는 거밖에 못 할 줄만 알았는데 밀당도 해?
“데뷔조 경쟁전 때 데리고 갈 멤버를 벌써부터 찾는 건지?”
마치 나의 ‘내가 데뷔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누구를 데리고 가 줄지 평가 중이다.’라는 태도를 뻔히 간파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뭐?”
내가 곧장 다그치듯 묻자 영인이 곧장 안색을 싹 바꾸더니 해맑게 웃었다.
“아직 까마득한 얘기니까 그럴 리는 없겠죠! 그냥 한번 말해 봤어요.”
이놈 봐라. 그러고서는 아까 밥 먹으러 가기 전에 먹었던 아이 키 쑥쑥을 한 포 더 잘라서 쭙 빨아 먹더니 양치질이나 한다며 세면대로 도망쳤다.
이대로 내빼려고? 어림도 없었다.
“아니, 그래서 나랑 누가 잘 맞을 것 같은데.”
내가 곧바로 따라붙어서 되물었으나 영인은 계속 동문서답만 해 댔다.
“저도 괜찮지 않아요? 지원이도 리드 보컬로 괜찮고. 걔는 음색이 워낙 좋아서 멤버가 되면 뭔가 좀, 색을 더해 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어쨌거나 지원과 영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서 하는 말인 게 분명했다.
“너랑 유지원 말고는?”
“흠냐… 피곤해서 저 얼른 자고 싶은데….”
“왜 말을 하다 말아?”
내가 계속 붙들고 늘어진 끝에야 영인이 무슨 우량주를 몰래 알려 주는 내부인인 것처럼 속닥거렸다.
“이규민 형, 정도려나요.”
“이규민?”
나는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인상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소속사 출신 어린애들한테 둘러싸여서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던 녀석이 무슨….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동의 못 할 것 같은데.”
“한번 겪어 봐요. 보지만 말고.”
뭐냐, 이건. 졸지에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녀석에게 인생 충고를 들은 기분이 되어 버린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글쎄. 겪어 봐도 달라질 건 없을걸?”
그리고 그건 최소한 촬영 이틀 차를 기준으로 사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저녁에 먹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식사를 마친 우리는 대기실로 향했다.
“오. 또 새 옷이네.”
영인이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내내 저 못생긴 트레이닝복을 입고 촬영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새로운 유니폼이 준비되어 있었다.
‘훨씬 낫네.’
화이트와 스카이블루 베이스의 유니폼은 기장과 디자인, 그리고 조합을 직접 골라 코디하는 구성이었다.
보타이부터, 넥타이, 카디건과 조끼, 심지어 카라 컬러까지.
사이즈에 맞추어 무난하게 매치하여 착용을 마치자 고민하는 표정의 영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 입겠다고?
‘진심이냐?’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영인이 가까이에 있던 지원에게 물었다.
‘그렇게 이상해?’
지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그… 형은, 키가 크니까….’
‘그냥 이상하다고 해. 너 다리 긴 거 반바지 안 입어도 다 아니까.’
나와 지원의 만류를 들은 영인이 결국 허벅지가 절반은 드러나는 반바지를 내려놓고 평범한 긴 바지를 선택했다.
‘사이즈를 허리에 맞추니 저렇게 된 건가….’
평범한 바지가 다리가 길어 7부처럼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것을 보는 건 또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후 짧은 개인 어필 영상 촬영이 이어지길 잠시,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한 참가자들에게 스태프가 큰 목소리로 안내를 했다.
‘지금 입으신 의상 그대로 오후에 단체 무대 촬영 들어갈 거니까 캐비닛에 잘 보관해 주세요!’
스태프의 안내에 ‘아, 조금만 더 화려하게 입을걸.’ 여기저기서 후회가 터져 나오는 와중.
나는 계속 영인의 말이 신경 쓰였다.
‘한번 겪어 봐요. 보지만 말고.’
멀찍이 떨어져서 본 규민의 인상은 어제와 달라질 게 없었다.
한없이 가볍고 아무 말이나 일단 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저 녀석이 대체 무슨 재주가 있길래 영인이 높게 사는 거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등급별 자리 배치를 위해 모여 달라는 안내에 스태프를 향해 이동했다.
“자, 반갑습니다. 등급 심사 때 우리 만났었죠? 플레이메이트 크루 소속 메이즈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댄스 트레이닝을 담당할 거고, 아주 눈물 콧물 쏙 나올 때까지 굴릴 악당이니까 각오해 두도록 하세요.”
쾌활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한 멘토는 곧이어 각 등급별로 안무를 가르칠 자기 크루 소속의 강사들을 소개했다.
뭐 저렇게 우르르 왔나 했더니.
곧 거대한 강당에 등급별로 자리를 잡고 배치된 강사들의 주도로 연습이 시작되었다.
가장 손이 적게 가는 소수 정예의 S 등급과 A 등급은 강사 1명, B 등급과 C 등급은 2명, D와 F는 4명이 붙는 식으로 각자 그룹을 모아 안무를 땄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 각 등급별로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슥, 상위 등급 연습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우선 1위.’
당연히 나였다.
3위인 아진과 같은 곡으로 붙어서 거의 압살 수준으로 이겼으니 모두가 예상한 결과였다.
그다음은 2위이자 S 등급인 공민형. 나는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객석 반응이 너무 좋아서 뭐 하다 온 녀석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1군까지는 아니어도 2군 정도는 되는 유명 걸 그룹 멤버의 오빠였다.
‘본인은 그냥저냥 중형 소속사 출신이긴 한데 화제가 되니까 밀어줄 생각인 거겠지.’
그리고 그다음이 아진이었다.
얘도 S급이라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대형에서 1년이나마 구르고 왔으니 상위권인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4위부터 5위까지가 중형들 중에서는 그나마 대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보이 그룹 명문 ‘히피보이즈’ 출신의 연습생 두 명이었고, 5위까지가 전부 S 등급, 6위부터는 A 등급이 섞여 있었다.
‘흠….’
내 마음에 차는 연습생들은 여섯 정도인가. 나는 등급 심사 당시 눈독 들여 두었던 하연과 현호를 흘끔 바라보았다.
하연은 은찬과 등급이 갈렸음에도 예상대로 언제든 서로 이야기할 수 있게 가까운 자리에 붙어 있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인사를 건넨 하연과 달리 현호의 반응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
아주 한 대 치겠다. 안무 따느라 거울 보다가 잠시 시선이 그쪽으로 스친 정도로 변명할 수 있는 수준인데도 뭘 보냐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인상이 저런 건가?’
아니면 겨우 등급 심사만 봤을 뿐인데도 내가 그렇게 못마땅한 건가. 의아함에 조금 더 시선을 주자 현호가 본격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뭘 보세요?”
“…?”
나는 순간 나한테 하는 말인가 이해가 안 돼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 말고 그쪽이요.”
‘나?’
내가 손끝으로 나를 가리키자 더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현호가 고개를 돌렸다.
뭐냐, 이 상황.
황당하기 그지없는 와중에 이름도 가물가물한 A 등급 연습생 하나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내게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쟤 어제저녁 때부터 계속 저랬어요.”
이름이… 홍수민이었나.
뭐, 말마따나 나도 이 이상 저쪽에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수상하게 보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고, 아직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대에게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등급별로 모여 연습을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다들 바보가 아닌 이상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데뷔조에 드는 건 개인전일지 몰라도,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팀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구멍 없이 조별 미션을 꾸미기 위해 벌써부터 파벌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일단 뻔히 보이는 건….’
아진과 민형을 중심으로 뭉친 그룹.
배식받을 때부터 좀 몰려 있는 것 같더라니…. 그새 마음이 맞는 놈이 늘었는지 대여섯으로 무리가 생긴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아진의 NO엔터 소속이라는 배경과 민형의 빽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추종자 집단처럼 보였다.
그다음이 히피보이즈 출신 연습생들을 중심으로 넷 정도 모인 그룹.
그리고 나머지가 삼삼오오 소규모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졸지에 영인이랑 둘이 묶이긴 했는데….’
둘 다 개인 연습생이면서 무대에서 워낙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주었던 탓일까.
다들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우리 사이에 끼려 하는 용감한 연습생은 없었다.
그렇게 다들 눈치만 보던 그때, 내가 현호에게 느닷없이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본 수민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수민에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러자 더 수민이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별로 좋은 얘기 아니니까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따 점심 같이 드실래요?”
그냥은 말 안 해 주겠다 이건가? 나는 흠, 잠시 고개를 돌려 영인을 바라보았다.
영인이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니, 언제는 사람 보는 눈 꽤 자신 있는 것처럼 굴더만.’
결국 판단은 내가 해야 했다.
‘밥 한 끼 먹는 거로 큰 문제는 안 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연습이 재개되었다.
“우선 대형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눌 거예요. 메인 센터가 제일 가운데에 서고, 서브 센터가 둘인데 우선 안무 익히는 거 보고 오후에 리허설하면서 배치 안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건 1위가 메인 센터여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억울했지만 찍는 사람 마음인 것을 내가 좌우할 수는 없었다.
‘치사하긴….’
다들 어차피 센터는 나, 민형, 아진 셋 중 하나가 가져가리라 예상하는 와중, 서브 센터라도 가져가겠다고 다들 필사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절박한 거겠지.’
하지만 간절함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았다. 제작진 측에서 건넨 제안을 거절했으니 센터는 날아갔더라도 서브 정도는 나도 챙겨야 했다.
‘자만하지 말고 집중하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전 연습을 끝내자 곧바로 리허설 연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 리허설 연습이 시작되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문제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