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잃을 건 없을 텐데 (1)
늦은 저녁 식사를 앞두고 숙소에 들어와 옷장 안의 배급품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영인의 물음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어?”
“아니이, 아무리 봐도 개싸운 것 같은데 친하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영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질반질 빛나는 것이, 얼핏 약간의 광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몰라. 그걸 왜 물어봐.”
“궁금해서?”
“음…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은데?”
여기 뭐 촬영 장치나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못 말해 줄 것도 없다만.
아직 이놈이 완전히 내 편이라는 확신도 없는데 굳이 약점 잡힐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확실히 대답하지 않자 영인이 계속 속을 긁었다.
“싸웠구나?”
“아니거든.”
나는 좀 조용히 하라는 듯 영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거칠게 옷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인 것은….
“…….”
나는 다시 얌전히 옷장을 닫았다.
“?”
영인이 무슨 일이냐는 듯 똑같이 자기 옷장을 열어 보았다가 짧게 감탄했다.
“오….”
옷장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엄청나게 선명한 파란색의 트레이닝복이었다. 색만 다르지 디자인만 보면 모 생존 게임 시리즈의 단체복을 연상시키는.
‘이 시기에는 그거 유행하기도 전일 텐데 어디서 이런 X같은 디자인을?’
나는 현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비주얼에 잠시 옷장을 손으로 눌러 닫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옷장을 열었다.
“…….”
당연하게도 트레이닝복은 어디 가지 않고 그 선정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오라는데요.”
나보다 문 쪽에 서 있었던 영인이 밖에서 스태프가 외치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삐죽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 입어야지.
대체 어떤 놈 아이디어인지 이를 아득바득 갈며 트레이닝복을 꺼내자 그 뒤에 다른 각종 지급 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하루 한 포 아이 키 쑥쑥]
이게 뭐야….
한창 성장할 나이대인 애들도 많긴 한데… 이거… PPL이지?
스틱을 손에 쥐자 앙증맞은 핑크색 디자인이 더욱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 딸기 맛이래요. 맛있겠다.”
나는 날름 한 포를 뜯어서 쭙 빨아 먹는 영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거기서 더 크게?”
지금도 180 후반이면 거기서 더 커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영인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 빨아 먹은 스틱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주는 걸 안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인생을 이놈처럼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태평하게 웃음을 짓는 영인을 뒤로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옆방에서도 부스럭거리며 지급 물품들을 정리하고 의상에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등급 심사 때 뭘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존재감이 희미해서….’
서로 피해를 입히진 않을 테니 그걸로 충분했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입장한 식당은 등급별로 줄을 따로 서야 하는 구조였다.
S 등급과 A 등급이 제일 왼쪽 줄, B 등급과 C 등급이 가운데 줄, D 등급과 F 등급이 제일 오른쪽 줄이었다.
‘뭘 하려고 줄을 이렇게….’
생각한 그때, 각 배식 줄에서 각자 들고나오는 모양이 다른 것을 보고 나는 직감했다.
‘이 자식들 식사로도 치사하게 구네.’
배식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니 각각 뷔페식, 일반 도시락, 90년대 도시락이었다.
같은 S 등급으로 묶인 영인과 꽤나 호화스러운 반찬들을 먹고 싶은 만큼 담아 테이블에 앉자 그보다는 좀 더 단출해 보이는 도시락을 든 지원이 내 옆자리에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옆에, 앉아도 돼요?”
초반부터 이 이상 지독하게 얽혀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지원 씨는 소속사 친구들이랑 앉지 그래요? 하려던 나는 그 친구들이 지원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한 놈은 D, 한 놈은 F인가. 지원의 네임 태그에 붙어 있는 B 등급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설명해 주었다.
‘확실히 얘를 안고 갈 거면 지금처럼 나한테 의지하는 쪽이 낫긴 한데….’
그 순간 자연스럽게 지원의 도시락에서 소시지볶음을 가져가고 있는 영인이 눈에 띄었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영인의 만행을 저지했다.
“야, 너는 B 등급 도시락에서 반찬을 뺏어 가고 싶어?”
그러자 영인이 억울하다는 듯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뺏은 거 아니거든요. 준다고 해서 받은 건데.”
“네가 달라고 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불고기를 덜어 지원의 도시락 위에 얹어 주었다.
“앗, 나도!”
영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졸랐지만 어림없었다.
“양심이라는 걸 좀 챙겨 봐라.”
“제가 외국인이다 보니 한국말이 좀 어려울 때가 있어서….”
“이럴 때만 외국인이지.”
나는 영인의 변명을 가뿐히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100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다 보니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건….
“배고파서 데뷔하기도 전에 위장이 요절나서 뒤질 것 같아.”
아마 같은 소속사 출신인 듯한 또래들과 대여섯 명씩 모여 앉아서 너스레를 피우는 갈색 머리였다.
탈색이나 염색은 아니고 자연인가. 생김새를 보니 영인처럼 혼혈은 아니고 그냥 토종 한국인이었다.
“이거 완전 아동 학대 아니냐? 밥을 미친, 누가 이 시간에 먹어. 이건 야식이지.”
“형은 아동이 아니잖아요.”
“너넨 미자잖아. 나도 마음만은 동심이라고 해.”
한없이 가벼운 말투에 건들거리는 표정. 어디서 봤나 했더니만….
‘데뷔조였네.’
이름이 이규민이었나. 나는 규민의 가슴 아래에 붙어 있는 네임 태그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B 등급]
[이규민(21)]
[써머데이 크리에이티브]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아이돌이 두 그룹 정도 소속되어 있는, 대형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중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속사에서 나온 연습생이었다.
저기 출신 연습생만 네 명인 데다가 연합 회사가 몇 군데 있어서 저렇게 인원이 바글거리는 거겠지.
전 데뷔조 멤버라면 교류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싫어.’
무명이나 중소 소속사 출신들이 대부분인 연습생들 사이에서 좀 괜찮은 곳 출신이라고 자기가 대단한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놈들은 딱 질색이었다.
실력이 압도적으로 탄탄하다든가 하면 또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그것도 딱히 아니었다.
‘무시하자.’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는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워낙에 늦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한 통에 추가 촬영은 없었다. 대신 소등까지 잠깐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기상 시간은 오전 7시로 8시 30분부터 단체 무대를 위한 레슨이 시작되오니 늦지 않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방으로 돌아오자 영인이 먼저 씻고 오겠다며 공용 샤워실로 향했다.
겨우 혼자가 된 순간, 내내 잠잠했던 시스템창이 팟 하고 튀어나왔다.
[미션 클리어!]
[서브 미션 ▷ 등급 심사]
[어그로 지수가 (높음)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사이다 지수가 (높음)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개연성 지수가 (보통) 상태로 한 단계 하락했습니다.]
다른 수치는 올라간 데 반해 개연성은 보통 수준으로 하락한 거 보면 마냥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곧이어 무료로 뽑기를 돌릴 수 있는 재화인 스타 또한 정산되었다.
[다음과 같은 활동으로 +40 스타가 정산되었습니다.]
[- 첫 촬영 개시]
[- 등급 심사 참여]
[- 순위 유지 (1위)]
[- 가장 주목받는 연습생 상태 유지]
이거 150까지 모아야 한 번 돌릴 수 있는 거였나? 첫날이 이래서야 일주일에 한 번은 돌리려나?
자린고비가 따로 없었다.
툴툴거리는 와중 스타 정산이 끝나고 오늘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듯한 상태창이 떴다.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는 요약된 줄거리를 패스한 채 코멘트부터 확인했다.
[주인공이 지금보다 주도적으로 눈에 띄는 쪽이 더 재밌을지도.]
‘여기서 어떻게 더…?’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입이 튀어나온 순간 달칵, 방문이 열리며 영인이 들이닥쳤다.
“10분 세척 완료!”
해맑은 표정으로 헛소리를 외치는 영인을 본 순간 모든 고민이 허무해졌다.
뭐가 됐든 인생을 이렇게 활기차게 살 수 있다면 본인은 참 행복하겠군.
고개를 내저은 순간 영인이 내가 손에 쥐고 있었던 수첩을 발견하고는 휙 낚아채 가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A 등급 박성환, B 등급 성영온?”
악. 다름 아닌 쓸 만한 연습생이 있는지 수기로 정리해 두려고 꺼내 둔 수첩이었다. 영인에게서 수첩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은 그때.
영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뜻밖의 발을 꺼냈다.
“성영온은 빼요. 형이랑 안 맞을걸요.”
지금껏 내내 어린애 같은 1차원적인 헛소리나 하던 영인의 입에서 나온 꽤나 냉정한 평가에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영인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성영온은 메보 자리 절대 안 놓으려고 할 텐데 당연히 형이랑 부딪히죠. 리드나 서브로 만족 못 할걸요?”
영인의 지적에 나는 잠시 꽤 괜찮게 봤던 영온의 무대를 떠올렸다. 남자 노래 실력 검증 곡 3대장이라 불리는 락 발라드를 나쁘지 않게 소화했던 영온은 중형 소속사 출신의 보컬이었다.
“흠….”
실력의 우위만을 따진다면 당연히 나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걔는 아이돌 ‘연습생’ 중에 잘하는 거고, 나는 데뷔해서 상업에서 활동 중인 가수들을 포함하더라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고.
그러니 영온을 내 팀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면 내가 메인을 맡고 영온이 서브나 리드를 맡는 게 자연스러운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온이 메인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다면?
‘그러면 나랑 경쟁해서 가져가야지.’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게 싫으면 필연적으로 포지션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 있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영인이 다른 참가자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영인을 떠보듯 슬쩍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럼 네 생각에 나랑 괜찮을 것 같은 연습생은 누구인데?”
어쩌면 영인이 지금까지 보여 준 태평하고 한심한 모습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