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네가 왜 여기서 나와 (1)
‘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등줄기가 영인의 등장으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괜한 소리 하지 마. 촬영 중이잖아.”
내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쉿,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대자 영인이 곧장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촬영 2시 30분부터 아니에요?”
그건 본촬영이고. 곳곳에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훤히 보이는데, 참 순진한 발상이었다.
“다 찍고 있어. 짧게라도 편집돼서 방영될 수 있으니까 얌전히 좀 있어.”
내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곧 카메라를 살핀 영인이 알았다는 듯 내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앗, 그렇구나! 네! 얌전히 있을게요!”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최소 50위권대 자리까지는 영인의 목소리를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단박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쟤 뭐야?”
“NO 출신인가?”
“비공개 연생일 수도….”
“근데 네임 태그 보면 개인인데?”
내가 공공연한 NO뉴페이스 출신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얼굴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영인도 NO 쪽 출신이 아닌가 이리저리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하….’
실력도 비주얼도 나쁘지 않으니 추후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서로 힘을 합쳐도 나쁘지 않겠다… 정도로만 생각한 거지.
이렇게 대뜸 쟤네 친한가 봐, 하고 소문의 중심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골이 아파 오는 기분에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기도 잠시, 한참 아랫줄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야, 어디 가게?”
“왜 이래, 얘?”
“잠깐만, 지나, 갈게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찬가지로 낯익은 얼굴이 성큼성큼 내 쪽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
“?”
2등 자리에 당당히 엉덩이를 붙인 영인과 어색하게 시선을 나누던 지원이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여, 옆자리 사람 있어요?”
있겠냐. 있으면 진작 앉아 있겠지. 지원이 자기가 물어보고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자 영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그제서야 지원이 허둥거리며 3위 의자에 앉더니 내 쪽을 빼꼼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치겠네.
아랫줄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이제는 따가운 시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서 괜히 방송에 꼬투리 잡힐 그림을 만들어 주면 안 된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며 지원의 인사에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속마음과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어 주자 지원이 안심이라도 했는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동안 잘 지내셨, 어요?”
지원의 목소리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미소를 한껏 친근하게 끌어올리며 지원에게 살짝 고개를 가져갔다.
“…?!”
내가 다가가자 지원의 당황하는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죄송한데, 지금 카메라 돌아가고 있으니까 정면 보고 최대한 차분하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작게 속삭이자 지원이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세로 고쳐 앉고는 또렷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아니… 그건 또 그것대로 어색한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말마따나 카메라 앞이었고 애를 상대로 군기라도 잡는 것 같은 꼴로 비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단 넘어가자.’
나도 태연히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때, 홀로 남은 지원에게 또 다른 악의 마수가 뻗쳐 오기 시작했다.
“몇 살이에요?”
“어… 저, 열여덟이요…!”
표영인의 오지랖 가득한 스몰토크가 유지원을 덮쳤다.
“한국 나이로?”
“아, 네네.”
이 자식이 여기 무슨 여름 물놀이 캠프라도 온 줄 아나. 내 의사와는 관련 없이 점점 뚜렷해져 가는 친목회 비주얼에 여기저기서 한층 더 강력해진 경계의 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저놈들은 뭔데 저기서 저렇게 희희낙락하게 최상위권에 앉아서 지들끼리 떠들고 있냐.
라고 쓰여 있는 듯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 ‘저놈들’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와, 그러면 호주에서 혼자 오신 거예요?”
“응, 온 지 한 달 좀 됐나?”
쓸데없이 말이 많은 영인의 주도하에 지원도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일단 하고 보다 보니 대화가 끊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쓸데없는 호구 조사를 주고받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주위의 경계심은 더더욱 두터워져만 갔다.
‘너희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어쩌려고 그러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녀석의 어깨에 손을 하나씩 올리고 낮게 속삭였다.
“주위에서 보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요.”
그제야 주변의 시선을 알아차린 지원의 얼굴에 다시금 빨간불이 켜졌다.
“죄,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아닌데.”
“맞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걸 네가 말할 건 아니지.”
너는 좀 죄송해야 하고. 나는 다시금 긴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다시 스몰토크의 시동을 걸려 하는 영인의 어깨를 손으로 눌러 저지시키기를 세 번째.
1위부터 98위까지의 모든 의자가 가득 찼다.
시간은 2시 25분. 잠시 후면 입장 최종 마감 및 등급 심사 촬영이 시작될 텐데… 아직도 입장하지 않은 한 명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왕 늦은 김에 스포트라이트라도 받게 29분에 들어오기라도 할 생각인가?’
예의 논란의 중심인 조항준도 45위쯤에 앉았는데… 99위는 대체 누가 차지하려고 이렇게 늦장을 부리는지 얼굴이 궁금할 정도였다.
‘아무리 어그로 끌기 좋아도, 이렇게까지 늦으면 제작진들도 마냥 곱게 보진 않을 것 같은데….’
촬영장 한가운데에 비치된 디지털시계의 초침이 0을 가리켰다.
‘남은 시간 1분.’
이 정도 배짱은 나도 못 부리는데.대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길래…. 시간은 쉴새 없이 흘러갔다.
‘30초.’
이쯤 되면 그냥 하차한 거 아냐? 아랫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가능성이 없진 않은데….
‘15초.’
그리고 그 순간, 복도와 촬영장을 잇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왔나?’
남은 시간은 정확히 10초. 얼굴이나 확인해 볼 심산으로 고개를 내민 나는 세트장으로 들어선 인물을 확인하고 눈을 의심했다.
“…?”
저 새끼가 여기 왜 있어? 예상 밖인 정도가 아니라 당황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오다가 사고가 나서 조금 늦었습니다!”
사고 났다는 놈 얼굴색이 참 훤하기도 하다. 그걸 변명이라고….
거짓말일 것이 뻔한 인사와 함께 당당하게 마지막 99위의 자리에 태연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건.
‘진짜 미친 거 아냐?’
내 빈자리를 차지하고 지금쯤 역대급 굴러 들어온 행운을 만끽하고 있었어야 할.
[아진]
[NO 엔터테인먼트]
아진이었다.
놈의 네임 태그에는 한 달 전이었으면 내가 달고 있었을, NO 엔터의 타이틀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대체 왜?’
가만있었으면 내가 나간 자리에 쏙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데뷔하고 자리 잡았을텐데 대체 왜?
벼락이라도 맞았나?
무슨 심산인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일순 표정이 흔들릴 뻔했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그때.
아진이 99위의 자리에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
마치 내게 똑똑히 두고 보라는 것 같은 앙칼진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설마 나 때문에 나온 건가?’
내 자의식 과잉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가정이었다. 대체 왜? 내가 저놈한테 불리할 만한 말을 잔뜩 하고 나가긴 했는데.
그러면 NO에서 버텨서, 봐라, 니가 버리고 간 자리가 얼마나 잘나가나 후회되지? 해야지, 왜 날 따라서 가시밭길로 뛰어드냐고.
‘미친놈인가.’
혹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서바이벌? 내가 나가서 1등 먹고 팬덤 쌓아야지!’ 같은 마음으로 나온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차라리 나 하나 저격하려고 여기까지 나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당혹스러운 심경을 숨기기도 잠시, 곧바로 등급 심사의 시작을 알리는 BGM이 울려 퍼졌다.
“모든 스탠바이 끝났고요. 비안 씨 자리에서 바로 준비해 주세요.”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는 내내 리허설을 온종일 보고 있었던 탓일까.
1세대 걸 그룹 밀키즈의 막내이자 현재는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은 비안이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인데도 그 누구도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다.
‘뭐… 지금 10대들한테는 먼 선조님 정도의 이미지라서일 수도 있고.’
2세대면 모를까, 1세대는….
아무리 30대 후반이라 해도 팬심보다는 거리감을 느낄 까마득한 대선배님이었다.
‘이놈만 빼고.’
나는 마치 역사 속 존경하는 인물을 현실에서 마주한 것 같은 표정의 영인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표정 관리 좀 해.”
“아.”
아까 리허설 때도 봤으면서 뭐가 그렇게 감격스러운지.
영인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이따 멘트랑 슛 들어가면 호응 부탁드립니다.”
앞에서 부지런히 호응을 유도하는 스태프가 요청을 할 때에서야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실감이 났다.
‘일단 저놈한테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내가 오늘 뭘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자.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위로 눈을 돌렸다.
그때 팟- 천장에서부터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간접 등을 제외한 모든 조명이 소등되며 정적이 흘렀다.
[글로벌 뮤직 트렌드를 대표하는 케이팝의 차세대 주인공을 찾아라! 꿈을 찾아 이 자리에 모인 99명의 소년들 중, 반짝이는 별로 다시 태어날 8명은 과연 누가 될까요?]
가운데에 선 단 한 명의 MC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연습생들이 앉아 있는 객석 위를 어지럽게 옮겨 다녔다.
그리고는 다시금 팟, 무대 위의 조명이 환히 밝혀지며 스크린에 ‘국민 매니저 대표 비안’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국민 매니저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선 비안입니다.]
[당신의 아이돌에게 기회를 안겨 줄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객석으로 번지는 긴장감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카메라를 향해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남긴 MC가 곧바로 돌아서서 객석을 향해 다시금 마이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