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설득의 과정 (2)
늦어도 내일 안에는 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빨랐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답장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지금의 나는 자존심이 한창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던 NO엔터 최우수 연습생이었다. 이적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전화 수십 통을 받을 수 있는.
[안녕하세요, 작가님. 편하신 때 통화 가능합니다.]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 안녕하세요. 서인수 연습생 본인 맞으실까요?
조심스러운 본인 확인으로 시작된 전화는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진짜 NO 연습생 서인수가 맞는지, 어쩌다 소속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 연습생으로 신청하게 된 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내일 회의실에서 만나서 자세히 논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정도면 출연은 걱정 없다고 봐도 될 것 같고.’
애초에 거절당하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첫 단추를 무리 없이 끼운 셈이었다.
그쪽에서 개인 미팅 때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지금 나는 데뷔 전부터 기본적인 팬덤층을 깔고 있는 인기 연습생이었다.
겟데뷔에 참가하는 연습생 99명 중에 제일 데뷔 확률이 높은 연습생에 베팅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내 베팅금이 제일 높을 터였다.
‘일단 데뷔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 같긴 한데.’
문제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조항준을 떨어트리는 건 물론이요, 누구를 멤버로 데리고 갈 것인지도 관건이었다.
‘데뷔 멤버가… 누구누구였더라….’
망해도 보통 망한 그룹이 아니라서 흐릿하게 인상 정도만 남아 있었다. 히트를 쳤으면 모를까 정말 데뷔만 하고 반짝 사라진 그룹 전원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그게 팬이지 일반인이겠냐.
우선 라임피치 ENT에서 두 명, 스쿼드에서 두 명 XK엔터에서 한 명, 엠플러스에서 한 명, 그리고 조항준이랑…. 나머지 하나는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전부 중소 기획사 출신들이었다. 저 중에 그나마 중형이라고 쳐줄 수 있는 건 라임피치 정도일까.
조항준이 1위를 해 버린 초유의 사태 이후 추이를 지켜보던 중대형 엔터사들이 모조리 발을 빼 버린 결과였다.
‘확고한 대형은 애초에 참가조차 안 했고.’
당연했다. 대형에서 제안이 돌 만한 녀석들 모두 굳이 서바이벌을 거치느니 내부 통과를 거쳐 안전하게 소속사를 등에 업고 데뷔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도 데뷔했을 때 무대랑 프로필 정도는 봤던 기억이 흐릿하게 있으니 얼굴을 보면 얘다, 알아볼 것 같긴 한데….
7년 뒤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지금은 쓸 만한 인맥을 총동원할 차례였다.
나는 핸드폰의 주소록과 메신저를 뒤져 내 지인들의 연락처를 싹 훑기 시작했다.
회귀 전 마지막 연락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그 후 지금 의미가 있을 만한 인맥을 추리고 전화를 돌렸다.
“네, 안녕하세요, 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제일 먼저 공략한 건 중형 이하의 회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프리랜서로 강사 일을 하는 보컬 트레이너였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이번에 KMB에서 하는 서바이벌 있잖아요. 네네, 지금 신청받고 있는 거요.”
- 어유, 알지. 내 제자들 중에서도 이번에 많이 나가는데.
됐다. 나는 최대한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쌤, 혹시 쌤이 담당하시는 회사에서 누구누구 나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처음이 좀 어렵지, 한번 성공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훨씬 쉬웠다.
대수롭지 않게 술술 말해 주는 사람부터 그걸 왜 알고 싶어 하냐 수상쩍어하는 사람에 네가 거길 왜 나가냐 놀라서 말리는 사람까지.
반응은 다양했지만 몇 번 전화를 돌리고 나니 금세 리스트가 쌓였다.
‘이제 기억났다. 이준성, 고다음, 시의환, 이규민, 백송원, 임연중, 리첸싱, 조항준, 이렇게 여덟 명이었지.’
조항준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 모두 그렇게 인지도가 높거나 인상 깊은 타입들이 아니라 이름을 듣고도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유일한 외국인 멤버인 리첸싱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조국으로 돌아가 버려서 해체 콘서트에도 불참한 것만 유명했다.
‘그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조항준이 더 불을 질러서 난리가 났었지.’
그냥 존재 자체로 다른 팬들에겐 악역일 조항준이 자기한테 새로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었나.
다른 멤버들은 한시 빨리 이딴 활동 때려치우고 다른 데로 나를 생각뿐인 와중에 혼자 팬서비스는 열심이어서 팬들을 더 열받게 했다던 일화만 널리 퍼졌었다.
조별 과제의 신개념 빌런, 수요 없는 공급, 뭐 그런 제목으로.
‘데뷔 리스트는 일단 참고만 해야겠다.’
실제로 이 친구들이 실력이 좋아서 데뷔했기보다는 진짜 실력이 좋은 친구들은 미리 발을 빼고 하차하거나 고의로 탈락을 노렸을 테니까.
그 외에 주의 깊게 볼 만한 인원은 열 명 남짓이었다. 내가 수소문을 못 한 연습생들도 있으니 괜찮은 옥석이 열 명쯤 더 있다고 하면….
‘스무 명 남짓에서 일곱 명을 추려 보면 되는 건가.’
아직 2주도 더 남아 있을 오디션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내 이제 가수 연습생으로서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나 하던 나였다.
지금의 나는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서바이벌 프로그램 붐은 지나간 지 오래에, 대형 엔터사에는 찍히고 소형에서는 말아먹은 서인수가 아니었다.
‘지금은 기회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프로그램을 성공시켜야 했다. 프로그램 개요상 방송에 송출되는 무대는 총 다섯 번.
첫 번째는 등급 평가, 두 번째는 99인 단체 무대, 세 번째는 포지션 대결, 네 번째는 컨셉 대결, 마지막이 데뷔조 선발이었다.
데뷔조 선발에는 최종적으로 두 팀이 올라가 데뷔를 두고 겨루는 식이었다.
대형 소속사의 단독 서바이벌도 아니고, 보통 등수로 자르는 다른 서바이벌과는 차이점을 둔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냥 이긴 팀이 데뷔조로 확정, 이런 거였으면 차라리 심플했을 텐데.’
이긴 팀의 상위 4명은 데뷔 확정, 나머지 4명은 패배한 팀과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여기에 최종 무대 후 각 팀별 투표로 베스트 멤버와 워스트 멤버를 선정하는 베네핏 시스템까지 복잡도를 더했다.
요약하자면 팀 내 하위권 멤버들은 팀은 이겼어도 데뷔를 장담할 수 없는 구조였다.
‘다들 설마 조항준이 정말 데뷔를 하겠어, 했겠지만….’
그 설마가 일어나고 말았다. 조항준이 패배한 팀의 하위권으로 1차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안도의 한숨을 쉬던 연습생들이 사색이 된 건 그 직후였다.
하위 연습생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멤버들의 베스트 멤버로 뽑혀 베네핏을 받는 것뿐. 베네핏 점수를 깐 순간 일어나서는 안 될 이변이 벌어졌다.
패배를 직감한 세 명과 조항준 본인이 조항준을 베스트 멤버로 선발함으로써 조항준이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기주의의 현장이었지.’
‘내가 못 먹을 감은 망해 버려라.’
‘어차피 내 꿈이 걸린 일도 아닌데 개그맨이 1위 하면 웃기겠다.’
다수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모든 참가자가 반년 이상 매달린 프로젝트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절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아야 해.’
처음부터 조항준이 기를 펼 수 없도록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저 이상한 시스템부터 심플하게 뜯어고치자고 해야 할 텐데….
‘제작진을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후,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간단히 정리해 둔 될성부른 싹 리스트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조항준을 애초에 참가조차 못 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포기했다.
조항준의 오디션 참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대외비일 텐데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그것대로 곤란해졌다.
‘일단 가서 부딪혀 봐야지.’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을 어플로 찾아보며 털썩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본가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좁디좁은 방 안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의 기척뿐이었다.
‘잠이 안 와.’
풀썩 드러누워 눈을 감았으나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결국 나는 드러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켜 문을 나섰다.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무대를 하려면 몸은 만들어야 한다. 이럴 땐 몸을 과로시켜서 땀을 쭉 빼고 일찍 자는 게 제일이었다.
집 근처에서 이어지는 야트막한 산속 산책로까지 내달리자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약간 오래된 느낌의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가게가 이때는 남아 있었구나.’
7년 후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하면서도 바뀐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한다.’
결연한 의지는 산을 내려오자마자 침대 위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죽겠다…. 아이고….’
촬영 시작 전에 몸 좀 만들어 둔다고 무리해서 턱걸이를 했더니 온몸이 다 욱신거렸다. 덕분에 잠은 잘 왔다.
다음 날 아침. 부랴부랴 간단한 세수와 머리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서 미팅 시간에 딱 5분 앞서서 방송국에 도착했다.
‘당당하게 나가도 되니까 쫄지 말자.’
지금의 나는 제발 출연 한 번만 시켜 달라고 빌어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깨 펴고! 뭐라고 말하는지 차분하게 듣고 오자.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회의실에 가서 내가 맞닥뜨린 것은….
“저, 죄송한데 이게 무슨 내용인지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그냥 어렵지 않게 생각하시면 돼요. 아무래도 인수 군이 출연진들 중에 제일 주목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니까. 저희 입장에서도 인수 군이 확정적으로 단체 무대 센터를 맡아 주시면 홍보 효과가 있을 거고. 인수 군도 미리 센터 확정받고 시작하면 안정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생각도 못 한 내용이 적힌 계약서였다.
표면상으로는 출연 계약서였으나 별첨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이 문제였다.
[갑은 을에게 99인 단체 무대의 중앙 1열 배치를 보장한다.]
[별첨 사항에 따라 을의 몫의 정산 비율 중 2%가 에이전시 몫으로 추가 배분된다.]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센터 보장받고 비율 낮추라고 꼬시는 거지? 메인 작가와 그 옆에 뻔뻔하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메인 PD를 보며 나는 환히 웃어 보였다.
“안 합니다.”
더 계산할 것도 없이 이렇게 치졸한 방식으로 보장받을 거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진짜 내 실력으로 데뷔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웃으며 거절하기 무섭게 회의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이 분위기를 내 쪽에 유리하도록 수습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