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302화 (302/303)

302화 #55 – 진정한 친구 (2)

똑똑.

월요일 아침부터 들려오는 노크 소리.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네,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

그 소리에 문밖에서 곧바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성 씨, 저 박 실장입니다.”

그 말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네, 실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 역시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쓱쓱 누르며 말했다.

“오늘 새벽 촬영하기로 한 거요.”

박 실장의 말에 나는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어? 아직 촬영 시간 안 된 거… 혹시 저 늦었나요?”

그가 늦은 나를 깨우러 온 줄 알았던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촬영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새벽 촬영 미뤄져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소품 차가 오다가 사고가 났나 봐요. 그래서 오늘 오전 촬영은 다 오후로 밀렸대요.”

그의 말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답했다.

“사고가 크게 난 거래요?”

“아니요. 차에 이상이 있어서 멈췄나 봐요. 크게 난 건 아니라…. 아무튼, 그래서 오늘 오전에 푹 쉬시다가 천천히 준비하셔도 된다고 전해드리러 왔어요.”

“아이고, 그냥 편하게 전화주시지….”

소식을 전하러 온 박 실장에게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일어나자마자 소식 듣고, 혹시나 희성 씨가 촬영 준비하고 계실까 봐 급하게 들렀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박 실장님도 오전에 푹 쉬세요. 이따가 시간 맞춰서 봬요.”

“예, 알겠습니다.”

박 실장이 내 방에서 멀어진 후.

띠리리-

그제야 울리는 알람.

미리 맞춰둔 알람을 끄고 난 뒤,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이미 달아나 버린 잠.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조금 젖혔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들었다.

밤새 자는 사이, 송유나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나 이제 촬영 끝나서, 씻고 자려고. 펜션에서는 지낼 만해? 몇 주 지내보니까, 아무래도 호텔이 더 편하지?

새벽에 와 있는 송유나의 문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잠이 들어 있을 그녀에게 전화는 걸지 못하고, 나 역시 문자를 하나 보냈다.

-아직은 괜찮아. 새벽까지 촬영하느라 힘들었겠다. 나는 오전 촬영이 딜레이돼서 시간이 널널해졌어. 푹 자고 일어나서 연락해.

송유나와 그날 이후, 살짝 서먹서먹한 느낌이 남아 있기는 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금방 오해가 풀릴 텐데, 서로 바쁜 스케줄에 만나지도, 연락을 자주 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래도 서로에 대한 마음은 여전했기에, 우리 사이가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어색함이 조금 흐를 뿐.

“그래, 일단 유나랑은 만나서 풀고… 일단 촬영에 집중하자. 눈앞의 일부터….”

그때.

내 눈을 사로잡는 당장의 일.

“와아… 빨래가 이렇게 쌓였다고?”

가득 쌓인 빨래 더미에 바구니가 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세탁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호텔에 있을 때는 세탁 서비스를 맡기면 편했는데. 펜션은 직접 빨래하러 가야 하는구나?”

펜션으로 와 몇 주 내내 갈아입은 옷과 속옷을 바구니 안에 꾹꾹 눌러 담아 공용 세탁실로 향했다.

몇 시간 뒤.

여유로운 오전을 보내고, 촬영장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겉옷을 입고 방을 나서려던 그때.

“맞다, 빨래!”

문 앞에 덩그러니 있는 빈 바구니를 보자마자 건조기에 넣어둔 빨래가 떠올랐다.

“계속 넣어두면 민폐인데, 빨리 빼고 촬영장 가야겠다.”

나는 급히 빈 바구니를 든 채 공용 세탁실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건조기는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어휴, 그래도 옆에 건조기는 비어 있네.”

다행히 민폐는 아니라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다가오는 촬영 시간에 서둘러 건조기를 열어 빨래를 바구니에 밀어 넣었다.

“희성 선배님!”

빨래를 넣던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준우 씨.”

장준우가 몇 시간 전 나처럼 빨래를 가득 안고 내게로 다가왔다.

“빨래하셨어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우 씨는 이제 오셨구나?”

“예, 저 이것 좀 넣어두고 촬영장 가려고요. 선배님도 오후 촬영이시죠?”

“맞아요.”

“저 이따가 선배님이랑 같이 찍는 신 있어요.”

장준우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네요. 이따가 촬영장에서 봐요. 제가 오후 첫 신이라, 이거 얼른 방에 넣어두고 먼저 촬영장 갈게요.”

“넵, 이따 봬요, 선배님.”

나는 장준우를 뒤로한 채 서둘러 빨래 더미를 안고 공용 세탁실을 빠져나왔다.

* * *

“컷, 오케이!”

박 감독이 입꼬리를 올린 채 외쳤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곤 내 인사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부딪쳤다.

“이야… 희성이 연기 좋았어. 연기가 어떻게 점점 더 좋아지지?”

“감사합니다, 감독님.”

“내가 고맙지. 다음 신은 희성 씨 옷 갈아입고 조금 쉬었다가 들어가자고.”

그의 말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카메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다음 신에 맞는 옷으로 환복하기 위해 걸어가던 그때.

한쪽에 모인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헐, 진짜요?”

“하아… 네, 확실해요. 완전 소름 돋아요.”

“오늘 아침에 그런 거니까, 바로 잡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그들의 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 들어왔고.

그 이야기를 언뜻 들으며 걸어가던 순간, 내 발을 붙잡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오늘 공용 세탁실 쓴 사람이 범인이겠네!”

“맞아, 근데 범인이 자기가 갔다고 안 할 테니까.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가는 대로 전 스태프와 배우들까지 가방 뒤져보죠.”

“확실히 해야 해요. 변태 새끼…. 굳이 이런 공간에서 남의 속옷을 훔쳐 가는 이유가 뭐래. 더러워.”

“방마다 쓰레기통도 꼭 체크하고, 빨래통부터 확인하자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조금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여성 스태프의 속옷이 없어졌다는 것.

그것을 공용 세탁실에서 누군가가 훔쳐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늘 오전에 공용 세탁실을 쓴 사람 중 있다는 것….

남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박 실장에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

‘설마….’

오전에 공용 세탁실로 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내가 확실히 아는 이유는 두 대의 세탁기와 건조기.

하지만 내가 아침에 세탁실에 갈 때, 분명 나 외에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다 된 빨래를 뺄 때까지도 옆 세탁기와 건조기는 작동되고 있지 않았지.

다시 말하자면… 오늘 속옷을 잃어버린 스태프 외에 공용 세탁실에 들어간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

* * *

촬영이 시작되면서 잡생각은 사라졌지만,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공용 세탁실 범인.

그러니까 여자 스태프의 속옷을 훔친 ‘속옷 범인’에 대한 생각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설마… 아까 보지도 않고 건조기에 있는 빨래를 담을 때, 속옷이 딸려 들어온 건 아니겠지?”

내가 직접 속옷을 훔친 건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내 빨래에 함께 딸려 들어갔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에, 초조함을 담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거 어떻게 해결하지… 혹시 내 빨래에 있다면,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다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잘못하면 진짜 큰일 나는데….”

촬영이 끝난 뒤 박 실장이 있는 차로 향하기 전, 나는 속옷을 잃어버린 그 스태프.

그녀가 다른 스태프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홀린 듯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여기 오셨네!”

그녀를 본 스태프가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빨리 오세요. 그거 들으셨어요?”

“예?”

“아까 말씀하신 거, 속옷 범인 찾았어요.”

“헐… 어떻게요, 누구래요?”

그녀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귀를 쫑긋 세웠다.

설마… 내 빨래에 섞인 걸 알아낸 건가?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에 그들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거… 장준우 배우래요.”

“…네?”

스태프의 말에 속옷을 잃어버린 그녀도, 나 역시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우 씨가 아침에 빨래하러….”

범인이 장준우였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당황하던 그때.

갑자기 나타난 장준우가 내게로 다가와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희성 선배님, 이거.”

그러고는 곧장 대화를 나누는 스태프들에게로 다가가는 장준우.

나는 바로 그가 준 종이를 꺼내 펼쳤다.

그 종이 안에 적힌 글자는 내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다.

-선배님, 숙소 가자마자 그거 저한테 넘겨요.

* *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장준우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지.

역시나.

장준우는 주변을 살피며 열린 문으로 곧장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참았던 질문을 쏟아냈다.

“준우 씨, 대체 뭐예요?”

“아, 선배님. 그게….”

“그거 준우 씨가 한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도 속옷을 훔치려고 한 게 아니라….”

방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세탁물 더미.

불길한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고, 내 바구니 안에 여성 속옷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장준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내게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태프분께는 사과하고, 잘 넘어갔어요. 제가 건조기에서 확인도 안 하고 급하게 꺼내다가 실수로 가지고 갔다고요. 그분도 속옷 도둑은 오해라고, 넘어가 주셨고요.”

장준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실수를 준우 씨가 한 게 아니고, 제가 한 거잖아요.”

“저는 어차피 원래 덜렁댄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조연이라 크게 이미지 망가지고 그런 건 없는데. 선배님은 대배우잖아요. 괜히 이상한 소문에 엮이면 위험하시고요.”

그는 나를 배려해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아니, 실수인 건 맞는데. 제가 그 속옷을 가져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세탁실에서 마주쳤을 때, 바구니에 여자 속옷이 보였어요.”

“그럼 그때 이야기해 주지, 왜 말 안 해줬어요?”

황당한 듯 묻는 내게 장준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 그게… 혹시 선배님께서 숨기고 싶은 취향일까 봐 모른 척했죠.”

장준우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제가 왜… 아니에요. 그런 취향!”

“스태프분들이 속옷 도둑 이야기하시는 것 듣고 상황을 보니까, 선배님 취향이 아니라, 실수로 가져간 거구나 싶어서. 제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장준우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왜요?”

그러자 장준우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친구…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회식 때.”

“…….”

그의 말에 순간 어떠한 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내게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또 내게 잘 보여 배역의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장준우에게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가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 배우였기에 혹시나 속옷 도둑, 변태로 몰렸다면?

장준우도 업계에서 매장당하는 건 순식간이었겠지.

진심으로 나를 위해 이렇게 했다는 말에,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나를 이용하고 싶어 친구를 하자고 했다 생각했으니까.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하지 마요.”

“…네? 제가 실수라도….”

“아니, 우리 친구잖아. 이제 말 놔, 준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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