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300화 (300/303)

300화 #54 – 내게 주어진 건 연기뿐 (4)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

나는 서둘러 차에 몸을 실었다.

“희성아, 고생했어.”

차 안에서는 김 실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형도 고생했어.”

“나야 뭐. 얼른 집으로 가자.”

차는 그렇게 빠르게 현장에서 멀어져 갔다.

“이틀만 쉬고 바로 지방 촬영이지?”

내 물음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이번에 지방 촬영가면, 계속 거기서만 촬영할 거야.”

“집 가서 짐부터 챙겨야겠다.”

그는 룸 미러를 통해 나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지방 촬영하면서 가끔 쉴 때, 서울 한 번씩 올라오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올라올 일이 많지는 않을 것 같더라. 짐 잘 챙겨둬.”

“알겠어.”

“지방 촬영하러 가기 전에 병원도 한 번 들르자.”

김 실장은 짧은 이틀 동안 서울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번 촬영 때, 와이어 타다가 다칠 뻔했잖아. 그때 와이어 스친 부분도 병원에서 다시 체크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고.

그런 김 실장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머리에 담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알겠어. 다 형이 하자는 대로 할게. 하하.”

내가 웃음을 보이자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왜 웃어?”

“형이 매니저가 아니라 부모님 같아서.”

내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맞다. 그리고 이번 지방 촬영 때, 숙소 골라야 해.”

“숙소를 내가 골라?”

항상 숙소는 정해져 있었고.

그중 주연인 내가 가장 좋은 방을 배정받고는 했었다.

“응, 이번에는 호텔이랑 펜션 중에 편한 곳으로 고르면 돼.”

“모든 배우가 고르는 거야?”

“아니, 다들 펜션에서 머물 거야. 펜션 전체를 빌려서, 호실별로 나눠 쓸 거라고 하더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호텔은 뭐야?”

“감독님이나 몇 명은 호텔에서 머물고 싶다고 하면, 잡아주시나 봐. 희성이 너 편한 곳으로 골라도 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평소라면 묻지도 않고 펜션을 택했을 것이다.

펜션이 호텔보다 편하거나, 호텔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모든 배우가 머무는 펜션.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기에,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펜션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요즘은 두통을 달고 살았고.

그럴 때마다 주변에 사람이 북적거리면, 더 불편할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이내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나 그냥 호텔로 잡아달라고 해줘.”

“그럴게. 요즘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

김 실장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뭐, 좋아. 스태프들이나 배우들도 다 좋고.”

“다행이네. 이번에 연기할 때, 계속 못 붙어 있어서 미안했거든.”

그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휘이 저었다.

김 실장이 홀로 매니저 역할에, 엔터 대표 역할에.

모든 역할을 혼자 하다 보니, 나에게만 온 신경을 쓸 수가 없었지.

그렇게 모든 일을 하면서도 내게 미안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형, 근데 대표 일로도 바쁜 거 아는데, 내 스케줄 전부 안 따라와도 괜찮아.”

그러고는 그와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지방 촬영이라 계속 거기에 있을 거고. 혼자 해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부터는 새 매니저랑 진행하는 건 어떤가 싶은데.”

“응, 나는 상관없어.”

“안 그래도 오늘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귀신이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오늘?”

“어, 원래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려고 했거든.”

“좋지. 어차피 저녁 형이랑 먹을 건데.”

내 말에 김 실장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저녁 먹을 때, 소개해줄게.”

* * *

진희성의 팬 미팅을 다녀온 후.

박순희는 더욱 진희성에 대한 애정이 배가되었다.

그녀에 방 벽지에 붙은 진희성의 포스터.

이번 팬 미팅에서 진희성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박순희는 방 안에서 진희성의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희성 오빠. 팬 미팅 또 했으면 좋겠다.”

그러더니 문득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지. 또 그런 또라이가 오면 어떻게 해. 차라리 다음 팬 미팅부터는 ‘진희성수기’ 팬 카페 회원 인증하고 받으라고 해야겠어.”

그녀는 책상에 앉아 팬 카페에 접속했고.

간간이 보이는 진희성의 몸 상태.

그리고 그에게 흉기를 휘두른 자에 대한 조사 내용들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 송유나 때문에 감히 우리 오빠를 찔러?”

박순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내가 팬 미팅 현장에서부터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경호원한테라도 말할걸 그랬지.”

그녀는 범죄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송유나를 좋아하면 하는 거지.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또라이야, 진짜.”

박순희는 진희성과 송유나의 열애설에 송유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송유나에 대한 연민이 조금은 생긴 것 같았다.

“여배우로 사는 것도 참… 쉽지 않겠다.”

더불어 열애설로 인해 진희성을 향한 애정이 시들해진 것도 사실이었지.

그러나 팬 미팅을 통해 박순희의 마음에는 다시 불이 지펴지고 말았다.

“우리 오빠 팬 미팅에서 진짜… 멋있었는데. 연기는 미쳤지, 노래도 잘해, 춤도 잘 춰. 못하는 게 대체 뭐야.”

진희성의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갔던 팬 미팅.

그곳에서 진희성의 열정에 흠뻑 빠져 있는 듯했다.

“이렇게 다 잘하는데, 또 열심히까지 해. 진짜 완벽하다, 완벽해….”

박순희는 진희성의 사진을 팬 카페에 업로드하기 시작했고.

“다른 연예인들처럼 막 럽스타그램이나 괜히 커플 아이템 몰래 자랑하지도 않고. 아예 연기에만 몰두해 있는 것 좀 봐.”

그녀는 진희성의 엔터에서 올린 현장 사진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아… 이번 영화 액션 장난 아닌데?”

박순희는 미간에 힘을 주고 진희성의 사진을 넘겼다.

현장에서 와이어에 매달린 사진.

연기를 하는 스틸 컷들이 올라오는 것을 빠짐없이 확인했고.

그녀는 자신이 진희성에게 처음 마음이 갔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예전에 내가 희성 오빠 사진 보고 설렜었는데… 지금이 더 좋아.”

박순희는 몇 시간 내내 입꼬리를 올린 채, 진희성의 사진을 보며 팬 카페 활동을 했고.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눈을 반짝였다.

“아, 이러지 말고 오빠 촬영장에 그거나 보낼까?”

박순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팬 카페에 공지 글을 게시했다.

[영화 ‘언더커버’ 촬영장에 커피 차 보낼, 파티원 모집합니다!]

* * *

김 실장과 함께 들어선 고깃집.

미리 예약된 식당 룸의 문을 열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안녕하십니까.”

훤칠한 키에 듬직한 체격.

부드러운 미소와 온화한 얼굴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김 실장은 그의 인사에 손을 흔들었다.

“어, 태현아. 일찍 와 있었네?”

“네, 대표님.”

“하하, 네가 나한테 선배가 아니라, 대표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김 실장이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아까 내가 말한 후배, 박태현.”

나는 그의 소개에 곧장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박태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희성 님.”

“자자, 얼른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 나눕시다.”

우리는 김 실장의 주도하에 자리에 앉았고.

그는 분위기를 이끌며 대화를 시작했다.

“여기 태현이는 WG 엔터에서 일할 때부터 친하던 후배야. 건실하고 착한 놈.”

“아이고, 선배님. 아니, 대표님. 과찬이십니다. 하하.”

“너한테 대표 소리 들으니까, 적응이 안 된다.”

김 실장은 웃으며 나를 소개했다.

“우리 희성이는 모를 리가 없을 거고.”

“당연하죠. 희성 배우님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WG 엔터를 떠나, 워낙 유명하신 분인데요.”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김 실장은 맥주잔을 자신의 앞에 놓고, 소맥 3잔을 타서 우리에게 하나씩 건넸다.

“우리 거국적으로 한잔할까?”

“좋죠.”

챙-

우리의 세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그렇게 알코올과 함께 첫 만남의 경계가 점점 풀어지고 있었다.

고기와 술을 곁들여 한참을 먹던 중.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박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 실장에게 보고하듯 일어섰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나도 이제 형한테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너까지 왜 그래. 나 대표 소리 들으니까, 괜히 간지럽다.”

김 실장, 아니 김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나도 대표님이라고 해야지. 안 그래요, 대표님?”

“아이, 진짜. 그냥 형이라고 해.”

“알겠어. 나도 형한테 대표님이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하하.”

챙-

김 대표와 나는 술잔을 부딪쳤고.

잠시 자리를 비운 박태현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형, 저분은 WG 엔터에서 언제 퇴사하신 거래?”

“얼마 안 됐어. 며칠 전에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그래?”

“응.”

김 대표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지 않는 박태현을 감시하듯 확인했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

“WG 엔터에서 윗선이랑 싸웠다더라고. 원래는 쟤가 윗선이랑 사이가 괜찮았거든. 워낙 싹싹하고 일도 잘하는 친구라….”

“그런데 갑자기 싸웠다고?”

“어, 왜 싸웠는지까지는 말을 안 하더라고. 근데 아무튼, 사이가 틀어져서 퇴사했나 봐.”

김 대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풀리지 않는 궁금증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음… 갑자기 그런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네.”

“알게 되면 말해줄게. 나랑 WG 엔터에 있을 때, 친하기도 했고. 퇴사하고 일하려고 연락한 것 같아.”

“하긴. 이 업계에서 오래됐으니까,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으셨겠네.”

“어, 태현이 일 잘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바로 오케이 했지.”

그때.

박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고.

우리의 대화는 그대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 * *

김 대표와 박태현.

그러니까 이제는 박 실장으로 불리게 된 매니저와 함께 도착한 지방 촬영 현장.

현장에 차가 멈춰 서자마자 박 실장은 입을 떡 벌렸다.

“이야… 세트장 진짜 크네요.”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게요. 세트장이 엄청 큰데?”

우리는 차에서 내려 아직 아무도 없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김 대표에게 물었다.

“형,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건가?”

내 말에 그는 시계를 바라보며 답했다.

“일찍 오기는 했는데, 다들 숙소로 바로 간 것 같아. 우리도 잠깐만 둘러보고 숙소로 가자.”

“그래.”

나는 김 대표와 박 실장을 뒤로하고 건물 가까이에 다가갔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폐업한 병원.

오래 방치된 이곳을 빌려, 안을 세트장으로 만들어둔 것 같았다.

나는 유리문 틈 사이에 눈을 붙이고 안을 살폈다.

환한 낮이었지만, 건물 안에는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듯 보였고.

그 광경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형… 여기 세트장 좀 무섭다.”

“그래?”

“어, 진짜 폐병원이라 그런지… 너무 리얼해.”

김 대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 답했다.

“그럼 딱이네. 세트장이 리얼해야 영상도 잘 나오잖아.”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으로는 계속해서 건물을 살폈다.

그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뭔가 스산한 느낌.

주변에 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을 둘러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기…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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