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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99화 (299/303)

299화 #54 – 내게 주어진 건 연기뿐 (3)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박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오셨습니까?”

박 감독의 인사에 투자사 IBH의 장한민이 밝은 얼굴로 답했다.

“네, 박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감독님도 잘 지내셨죠?”

장한민은 박 감독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에 가득 차려진 음식.

박 감독이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장하실 텐데, 음식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네.”

장한민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즘 촬영하느라 바쁘시죠?”

그의 물음에 박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빠야 좋은 거죠. 이제 작품은 거의 중반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일 바쁘실 때네요.”

챙-

그들은 곧장 술잔을 부딪쳤고.

박 감독은 술잔을 털어 부은 후, 그에게 보고하듯 입을 열었다.

“다음 주면 이제 지방 촬영 시작합니다.”

“아이고, 고생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하신 거죠?”

“네, 지방에 촬영가면 내내 있을 것 같아서요.”

박 감독은 미리 준비해온 것을 장한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뒤에 두었던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고 보여 드리려고….”

그는 가방 속에서 커다란 태블릿 PC를 꺼냈고.

그 모습에 장한민은 의자를 당겨 박 감독에게 다가갔다.

“벌써 영상이 나온 겁니까?”

이런 일에 익숙한 장한민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예, 지방 가기 전에, 초반 영상을 짧게라도 보여 드리려고 편집해 왔습니다.”

박 감독은 재생하기 전의 영상 몇 개를 넘겨가며 보여주었다.

영화에 투자한 투자자에게 보여주는 중간 영상.

사실상 숙제 검사를 하듯 보여주는 중간보고 느낌이랄까.

“이야… 여러 개 가지고 오셨네요. 어디 한 번 볼까요?”

“네.”

박 감독은 영상에 자신 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가장 앞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영상.

2분의 짧은 영상에 장한민은 눈썹을 들썩이며 집중했고.

영상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음… 다음 영상도 있죠?”

예상보다 차가운 그의 반응에 박 감독은 마른침을 삼켰다.

“예, 몇 개 더 있습니다.”

그리고 곧장 재생된 다음 영상.

이 영상부터는 전체적인 흐름이 아닌, 배우들의 연기 신이었다.

박 감독은 입술이 바짝 말랐는지 물을 들이켜며 장한민의 눈치를 살폈고.

그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음…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나쁘지 않네요. 연기도 괜찮고, 영상미도 좋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박 감독은 감사 표시를 전했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는지, 한숨을 삼키며 다음 영상을 클릭했다.

“이건 초반에 시작되는 진희성 배우 연기인데, 주연 배우라… 따로 편집해 봤습니다.”

장한민은 대본 리딩 이후, 진희성에 대한 관심도가 한껏 올라간 상태였고.

진희성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 보죠.”

영상이 재생되자마자 진희성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진희성은 대사 없이 눈빛으로 연기를 이어갔고.

그럼에도 장한민은 심각한 얼굴로 진희성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희성이 대사를 내뱉으며 감정이 격해지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한민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어느새 그의 자세는 태블릿 PC에 빨려 들어갈 듯 가까워져 있었고.

장한민의 모습을 본 박 감독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영상이 끝난 후.

“와아….”

장한민은 그저 감탄사로 답할 뿐이었다.

박 감독은 입술을 깨물며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겨우 내렸다.

“어떠십니까?”

그의 물음에 장한민은 고개를 들고 박 감독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 이 정도였어요?”

“예?”

“진희성 말입니다. 대본 리딩 때 보고 놀라기는 했는데, 이게 현장에서 연기하니까… 차원이 다르네요.”

장한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희성의 연기를 극찬했고.

박 감독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첫 신 찍고 놀랐습니다. 연습을 얼마나 더 한 건지….”

그러고는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보여드린 영상 외에, 다른 촬영분에서 연기가 더 일품인 것도 있습니다. 이번 작품… 잘될 겁니다. 아니,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 감독의 말에도 장한민은 태블릿 PC에 담겨 있는 진희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있다는 얼굴로 장한민을 향해 말했다.

“충분히 기대하셔도 충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장한민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눈썹을 들썩였다.

“이거… 진짜 판을 좀 키워도 되겠는데?”

그의 읊조림에 박 감독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아닙니다. 개봉 이후는 저희 IBH에서 준비할 테니, 감독님은 작품에만 지금처럼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장한민은 영화의 진행이 흡족했는지, 연신 입꼬리를 움찔거렸고.

박 감독의 빈 술잔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후반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 감독님.”

그의 말에 박 감독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네, 작품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컷, 오케이!”

감독의 사인과 함께 송유나는 연기에 몰입했던 감정을 털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후 곧 현장을 빠져나왔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 최 실장에게 다가갔다.

“유나야, 고생했어.”

“응.”

“여기 물.”

그는 송유나에게 뚜껑을 연 생수를 건넸고.

송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안 마실래.”

그러고는 한껏 풀린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오빠, 다음 촬영 언제야?”

“음… 아마 3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럼 나 차에서 좀 자야겠다. 진짜 너무 졸려.”

눈도 붙이지 못하고 이어진 촬영에, 송유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최 실장은 그녀를 보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좀 자자. 차로 가자.”

“응.”

송유나는 거의 감길 듯한 눈으로 최 실장에게 몸을 맡긴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송유나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고.

잠을 청하려던 그녀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몸을 일으켜 최 실장에게 물었다.

“맞다, 오빠!”

“응?”

“아까 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하려던 말, 그거 뭐야?”

“아… 그게….”

최 실장은 당황한 듯 말을 망설였고.

송유나는 그런 최 실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뭔데, 얼른 이야기해줘. 나 듣고 잘래.”

“그… 우리 출연하기로 한 영화에 서규리도 들어오기로 했대.”

그의 말에 송유나는 잠이 달아나기라도 한 듯 눈에 불을 켜며 물었다.

“뭐? 서규리?”

“응.”

송유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WG 엔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후배 연예인들을 끼워 판 적이 한 번도 아니었고.

평소 이런 일로 따지고 들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기려 했다.

“오빠, 나 이런 거로 회사에 항의한 적 없는 거 알지?”

“그럼, 유나 네가 이해해 줬었지.”

“회사에서 이러는 거 나도 참고 넘어갔고, 이번에도 넘어가기는 하는데 말이야.”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경청했다.

“근데… 나 건드리면, 그때는 바로 서규리고, WG고 나발이고. 다 엎어버릴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오빠?”

송유나의 말이 단순히 홧김에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최 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응, 내가 회사에 잘 체크할게.”

“어, 오빠가 WG에서 뭔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신경 좀 써줘.”

그러고는 곧장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 * *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회복이 빠른 편이었지만, 그래도 액션 신을 소화하기에 몸이 아직 온전치 않았으니까.

스트레칭을 하며 현장을 둘러보던 중.

“희성 씨, 컨디션 괜찮아?”

박 감독이 내게 다가와 상태를 물었다.

그 역시 와이어에서 하는 액션 신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걱정하지 않게, 배를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네, 오늘 상태 좋습니다. 스턴트 배우님 안 써도 될 것 같아요.”

내 말에도 박 감독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주면 훨씬 결과물이 좋게 나오기는 하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않아도 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해보고, 도저히 안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우선 연습 좀 해보고 들어갈까?”

“네, 촬영 전까지 연습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어. 필요한 거 있으면, 조감독한테 이야기하고.”

박 감독은 저 멀리 있는 조감독을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넵.”

와이어나 소품을 이용하는 격한 액션 신이 있는 경우.

액션 신을 담당하는 감독님이 오고는 한다.

박 감독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지, 액션에 대해서 도움을 주는데 무리가 있으니까.

거기에 스턴트 배우들까지 모두 함께였지.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보냈고.

“네, 안녕하세요. 오늘 희성 씨, 와이어 타시는 거죠?”

그의 물음에 나는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맞습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연습 좀 하려고요.”

“예, 그러셔야죠. 그럼 이쪽으로….”

그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고.

그때.

“선배님!”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

장준우였다.

첫 촬영 날 내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해주었던 배우.

“아, 준우 씨. 왔어요?”

“네, 선배님 다음 촬영, 액션 신이라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 구경…해도 될까요?”

“그럼요. 근데 준우 씨도 같이 촬영 아닌가요?”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맞습니다. 저는 와이어가 아니라, 바닥에 서 있지만요. 하하.”

그와 대화를 나누고, 몇 분 뒤.

계속해서 와이어 연습에 매진했다.

내가 와이어를 타고 허공에서 액션을 취하는 동안.

장준우는 지상에서 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연습하는 것을 볼 필요도.

나를 도울 필요도 없었지만.

그는 내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듯 연습하는 내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연습을 이어간 후.

드디어 액션 신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현장에는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내가 착지할 곳에 매트를 깔아두었고.

내 상태에 따라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스턴트 배우도 대기 중이었다.

박 감독은 촬영 시작 전, 디렉팅을 위해 나와 장준우에게 다가왔다.

“준우가 여기서 희성 씨 착지하는 걸 기다리면서….”

그는 장준우에게 대사와 함께 행동을 묘사하며 열정적으로 디렉팅을 해주었고.

내게는 짧은 한마디를 보냈다.

“희성 씨는 하던 대로만 해줘요.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다치지 말고, 힘들면 언제든 말하고.”

“예, 감독님.”

내 답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와이어를 통해 허공으로.

장준우는 내가 착지할 곳으로.

그리고 박 감독은 메가폰을 쥔 채 카메라 밖으로 말이다.

이내 들려오는 박 감독의 목소리.

“레디, 액션!”

그의 사인과 함께 움직이는 와이어.

나는 수차례 연습한 만큼 허공에 발을 휘저으며 움직였다.

“흐읍… 흡….”

세트장에 지어진 가벽.

그 벽을 발로 디뎌가며 이동했고.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표정은 풀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몸.

거기에 대사와 표정까지.

이 모든 것을 찍기 위해 스턴트 배우, 대역을 쓰지 않는 것이니까.

탁-

허공에 부웅 몸을 띄웠고.

다시 가벽으로 다가가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몇 대의 카메라는 동시에 그런 내 모습을 빠르게 담아냈고.

마지막으로 착지 전, 이어지는 액션 동작.

타악-

다시 건물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을 굴렸고.

몸은 허공으로 붕 떠서 와이어 줄에 의지했다.

그리고 미리 체크해 둔 곳.

매트가 깔린 바닥으로 향하던 그때.

갑자기.

“으윽….”

배에 난 상처에 와이어 줄이 스쳤고.

그 탓에 배에 통증이 찌릿 올라왔다.

힘을 풀고 와이어에 매달려 있던 나는 순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매트로 떨어져야 할 착지 지점이 아닌.

그 옆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와이어는 빠르게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고.

이미 틀어진 각도는 다시 몸을 움직여도 옮겨지지 않았다.

“안 돼…!”

매트가 깔리지 않은 지점, 그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퍽-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파란 매트였다.

뭐지?

분명 바닥이었는데….

그리고 내 옆에 넘어져 있는 사람, 바로 장준우였다.

그는 내가 눈을 뜨자,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살폈다.

“선배님이 착지할 곳이….”

다들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과 허공의 나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장준우는 착지한 나와의 연기를 위해, 매트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에 장준우는 내가 떨어질 지점이 매트가 아닌 것을 확인했고.

곧장 몸을 던져 매트를 내가 떨어질 곳으로 밀어낸 것.

그는 내게 상황을 짧게 설명했고.

나는 그에게 손을 뻗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고마워요. 준우 씨 덕분에 안 다쳤어요.”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선배님, 지금 몸 안 좋으시잖아요. 항상 조심하세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그럼에도 나는 몸을 툭툭 털고, 다시 처음 지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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