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95화 (295/303)

295화 #53 –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4)

길고 짙은 어둠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거를 헤매던 기억들로 정신없던 머릿속은 점점 차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뚜렷해질 때쯤.

팟-

흐릿하게 뜬 눈으로 들어오는 선명한 빛줄기.

깜빡… 깜빡….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움직이며 천장을 바라보았고.

새하얀 천장.

그 가운데에 밝게 빛나고 있는 조명 하나.

“으윽….”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음성과 동시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성아!”

아직 정확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김 실장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했다.

“희성아, 나 보여? 내 목소리 들려?”

그는 내게로 다가와 얼굴을 눈앞에 들이밀었고.

“형이야, 희성아. 정신이 좀 들어?”

김 실장은 다급한 얼굴과 목소리로 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여기 환자 깨어났어요. 의사 선생님… 빨리요!”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

의사가 간호사들과 함께 들어와 내 상태를 체크했다.

이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눈을 뜨자, 김 실장이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안도의 숨 같았다.

“희성아, 정신이 좀 들어?”

그의 말에 나는 뻐근하던 몸을 일으켰고.

“으응….”

“나 누군지 알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형을 어떻게 몰라.”

내 말에 그는 내게로 달려와 내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형,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나 괜찮대?”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팬 미팅에서… 기억나?”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응, 그 관객석에서 올라온 남성이 다가와 덮친 거. 그리고 뭐에 찔려서 배가 뜨겁고, 정신이 혼미했던… 거기까지.”

내 말에 김 실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또라이 새끼….”

그는 주먹을 쥔 채로 부들거렸지만, 앞에 있는 나를 보며 겨우 할 말을 삼켜내는 듯 보였다.

“걔는 경찰로 넘어갔고. 그리고 우선 희성이 네 상태는 정말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배를 살펴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배는 좀 어때. 다른데 아픈 곳은 없고?”

“배는 괜찮은데, 나 머리가 좀 아파.”

“머리?”

“응, 깨질 것 같아.”

나는 양손으로 배가 아닌 머리를 감싸 잡았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잃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깊은 어둠 속에서 전생의 기억들을 유랑했던 것 같다.

1만 년이라는 긴 시간이 빠르게 새겨졌고.

그 덕에 한동안 잠잠했던 기억들이 몰려들어 오면서 두통에 시달리는 것이지.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 한 번 봐달라고 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말했다.

“맞다, 그리고 병실 앞에 유나 씨 와 있어. 들어오라고 할까?”

송유나….

늘 그랬었다.

내가 1만 년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시절.

그 누구도, 그 어떤 일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은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었다.

송유나를 보고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힘이 되었었지.

단순히 고통이 사라지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마음이 생긴 건 아니지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있었기에, 1만 년의 시간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 그녀였기에.

그래서 송유나와 함께하면 괴로움을 잊는다고 생각했었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유나 씨 들어오라고 할게. 나는 의사 선생님 만나서 희성이 너 상태 좀 전달하고 올게.”

김 실장은 곧장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극심한 두통에 괴로움을 동반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으윽….”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리며, 송유나가 나타났다.

“오빠!”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

송유나는 내게로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았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여기에 누워 있냐고….”

두 뺨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렸고.

송유나는 오열하듯 눈물을 쏟아내며 내게 말했다.

“칼 찌른 사람… 내 팬이라고 했다며. 미안해, 나 때문이야.”

그녀는 이 일이 벌어진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눈물을 쏟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송유나의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아니야. 그게 왜 네 탓이야.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 절대 네 탓이라고 말하지 마.”

“그래도… 나 때문에…. 미안해, 정말.”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왜 유나 네 탓이야. 그런 범죄자한테 정당한 이유는 없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유에… 너는 더더욱 없는 거고.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그런 마음을 조금도 갖지 마.”

내 말에 송유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는 이 일로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

“…알겠어.”

그리고 또다시 지끈거리는 머리.

“으… 으윽.”

나는 곧장 그녀를 잡고 있던 손으로 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지?

분명 송유나와 함께할 때면.

그녀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이 사라졌었다.

송유나와 몸이 닿는 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상에 근심, 고민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괴로움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그녀를 만난다면 두통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왜 안 되는 거지?

…이거 왜 이러지?

“오빠, 괜찮아?”

송유나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고.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손을 잡아도 고통은 아주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 * *

송유나는 내 곁에 한참 동안 머물지 못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내 옆에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곁을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눈빛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그저 괴로움에 몸부림칠 뿐.

결국, 송유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스케줄 때문에 병원을 떠났다.

그녀가 있을 때도, 병원을 나갔을 때도.

내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물론 배에 찔린 고통과 상처는 호전되고 있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그렇게 병실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

김 실장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였고.

나는 노크에 한껏 긴장한 상태로 소리쳤다.

“누구… 세요?”

경계 태세를 보이는 내 말투에 상대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저 서규리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서규리는 조심스레 문을 열며 내게 얼굴을 비췄다.

“저 서규리인데, 인사드리러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자신의 얼굴을 보면 알 거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자신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기에,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아… 그런데 누구신지….”

“저 걸 그룹 핑퐁이요. 핑퐁… 모르세요?”

그녀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 핑퐁…. 미안해요, 제가 요즘 걸 그룹은 잘 몰라서.”

서규리는 자연스레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내게 말했다.

“와아… 너무하신다. 저희 나름 유명해요. 1위도 했던 그룹이고, 게다가 같은 WG 엔터 소속이었는데!”

“그래요? 제가 가수 쪽은 잘 몰라서요.”

그녀는 양손 가득 들고 온 짐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서규리.’

작은 문구가 적힌 꽃바구니.

그리고 과일이 한 아름 담긴 과일 바구니까지.

나는 알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서규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답했다.

“WG 엔터 식구였잖아요. 기사 보고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요.”

“제가 WG 엔터 나온 지 꽤 됐는데.”

그녀는 병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그래도 나름 1위도 했던 그룹이라. 많은 분들이 아시는 공인이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말씀드리고 들어온 거예요. 몰래 들어온 거 아니고.”

서규리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 실장 외에 들어올 수 없는 병실.

그가 계속 문 앞을 지켰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어온 듯했다.

팬들이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병원에서 제지하겠지만.

얼굴이 알려져 있기에 병원에서도 내 지인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비록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를 걱정해준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움일 뿐, 그녀를 반길 상태가 아니었다.

“마음은 감사하긴 한데요. 근데 제가 좀 쉬고 싶어서요.”

내 말에 서규리는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고.

“저… 가라고요?”

“미안해요. 보시다시피, 제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요.”

서규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네, 그럼 쾌차하세요.”

그대로 서규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병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그런 서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쟤는 뭐지?

* * *

[진희성 – 송유나 사이의 빨간 불. 그의 병실을 찾아온 건…!]

[‘진희성’의 병실을 찾은 걸 그룹 ‘핑퐁’의 서규리. 찾아온 이유는?]

[핑퐁 ‘서규리’, 꽃바구니와 과일 바구니 가득 안고, “희성 선배 병문안 왔어요.”]

[진희성의 병문안을 온 유일한 걸 그룹, ‘핑퐁 – 서규리’. 둘의 관계는?]

[진희성의 병실에 찾아온 ‘서규리’, 진희성-송유나 사이 애정 전선에 이상?]

서규리가 병원을 다녀간 후.

1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기사가 쏟아졌다.

기사의 내용은 전부 나와 송유나의 관계에 대한 의문.

그리고 서규리와의 관계였다.

한동안 바빴던 탓에, 송유나와 만나지 못했었고.

그러니 당연히 파파라치들에게 송유나와 함께 찍힌 사진이 뜸했었다.

기자들은 송유나와 나 사이가 멀어졌음을 직감하는 듯 기사화했고.

와중에 병원에 꽃과 과일을 들고 찾아온 서규리를 나와 엮었다.

결국, 서규리와 스캔들이 난 것이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도 기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서규리가 누군지도 몰라. 핑퐁 그룹 이름도 처음 들어봤는데.”

내 말에 김 실장은 서규리가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휘이 저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온 거야?”

“나도 몰라. 그냥 WG 엔터 식구였지 않냐, 걱정이 돼서 왔다, 이러던데.”

“이상하네.”

“응.”

김 실장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병원 입구.

그 앞에 늘어선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렇게 기자가 쫙 깔린 앞에서 사진이 찍히니, 당연히 스캔들이 날 수밖에 없지.”

“하아… 서규리, 대체 뭐야.”

김 실장은 내게 기사를 하나 보여주었다.

“이거 봐. 괜히 기사마다 유나 씨 이야기 꺼내고 난리도 아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데, 이런 거까지 해명해야 한다니까. 좀 그렇네….”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김 기자 통해서 해명 기사 낼까?”

“응, 그렇게 해줘. 서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유나랑은 좋은 관계고, 문제없다고 말이야.”

* * *

한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송유나에게도 기사가 전달되었다.

“미친, 이게 뭐야?”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기사를 살펴보았다.

“핑퐁에 서규리? 얘 뭔데, 거기를 찾아가?”

송유나는 기사를 넘기며 모든 내용을 읽어 내려갔고.

“나 말고 아무 연예인도 병원 안 갔다더니. 서규리가 대놓고 찾아갔다고? 둘이 무슨 사이야, 대체?”

기사만으로 내용을 접한 송유나는 오해할 소지가 다분했다.

아프다며 송유나와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진희성.

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 버젓이 서규리가 찾아갔고.

그녀와 병실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더불어 그 기사들은 서규리와 진희성 사이의 핑크빛을 조성하고 있었고.

자신과 진희성의 사이 애정 전선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고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던 찰나.

진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송유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이거 뭐야?”

다짜고짜 따져 묻는 송유나의 목소리에, 진희성은 두통을 참아내며 답했다.

-어, 유나야. 기사 봤어?

“응, 설명해. 둘이 무슨 사이야, 대체?”

-그게….

“오빠 아픈데, 내가 이런 거로 진짜 화내기는 싫은데. 똑바로 설명 좀 해볼래?”

-아무 사이도 아니야.

“뭐?”

-나는 핑퐁이 뭔지, 서규리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갑자기 찾아왔어.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나도 황당해서 돌려보냈어.

“그게 다라고?”

송유나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진희성의 말.

-어, 정말 그게 다야. 나 아파서 너랑 있을 때, 이야기도 못 나눴잖아. 근데 모르는 사람이랑 내가 무슨 대화를 했겠어.

진희성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봤기에,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규리, 뭐야. 진짜 이상하고, 짜증 나.”

-그러게. 나도 이거 가지고 기사 났다고 하니까, 황당하더라. 그래서 바로 반박 기사 냈어. 신경 쓰지 말라고.

“근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송유나와 진희성은 서규리에 대한 대화로 날을 세웠고.

오해가 쌓인 송유나는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고통과 싸우고 있는 진희성 또한, 평소와는 달리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응, 아닌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열은 받네. 서규리, 걔도 WG 엔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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