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53 –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3)
몸무게가 최소 100kg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황한범의 몸.
그 육중한 몸으로 힘껏 진희성을 밀자, 미처 대비하고 있지 않던 진희성의 몸은 그대로 의자 밑으로 떨어졌고.
황한범은 넘어진 진희성의 몸 위로 올라탔다.
“죽어! 죽어버려!”
그는 칼로 진희성의 배를 찔렀다.
“꺄아!”
팬들은 무대 위에 펼쳐진 상황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팬 미팅.
경호원들은 김 실장의 수신호에 미리 진희성의 곁으로 다가가 있던 상태였고.
진희성이 넘어지는 순간, 경호원들은 재빨리 황한범에게로 다가가 그를 제압했다.
쾅-
“아악…. 이거 놔.”
진희성의 배에 꽂았던 칼.
그 칼을 빼며 재차 찌르려 했지만.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황한범은 칼을 든 채로 소리쳤다.
“죽여야 해, 진희성…. 이거 놔, 이 새끼들아!”
퍽-
퍼억-
경호원들은 그런 황한범을 제지하기 위해 있는 힘껏 그의 팔을 제지했다.
쾅-
결국 바닥에 눕혀진 황한범의 모습.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채로, 진희성을 바라보는 황한범.
순간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황한범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진희성은 그런 황한범과 눈을 맞춘 채로 이를 꽉 깨물었다.
“희성아!”
김 실장이 무대에 쓰러진 진희성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희성아, 희성아. 내 말 들려?”
그는 진희성의 몸을 확인했고.
진희성은 자신의 배를 부여잡은 채, 입을 움찔거렸다.
“형… 배….”
“배?”
그의 말에 시선을 진희성의 배로 움직이자.
진희성의 셔츠, 배 부분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희성아, 숨 쉴 수 있겠어?”
김 실장은 진희성이 의식을 잃지 않도록 말을 걸었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무대.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비규환이 된 관객석.
그곳을 통제하기 위해 박세현은 손을 떨며 스태프들과 움직였다.
“오빠.”
“안 돼… 오빠!”
“희성 오빠, 괜찮은 거 맞아요?”
팬들은 무대 위에 쓰러진 진희성을 보며 울부짖었고.
몇몇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켠 채로, 황한범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미친XX.”
“야, XX, XXX!”
황한범을 향해 온갖 욕설이 난무했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김 실장은 진희성을 끌어안은 채 그를 보호하기에 바빴다.
스태프들도 쓰러진 진희성이 노출되지 않도록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희성아, 형 목소리 들려?”
김 실장의 물음에 진희성은 동공이 풀려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고.
“으… 으응, 형… 나 배가 뜨거워….”
피로 젖은 셔츠.
진희성은 눈을 깜빡일수록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하아… 형….”
진희성의 정신은 갈수록 아득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희성아, 희성아!”
김 실장은 진희성을 품에 안은 채 소리쳤다.
“눈 떠, 희성아. 진희성!”
잠시 뒤.
무대에 도착한 경찰차와 구급차.
경찰은 경호원이 잡고 있는 황한범에게로 달려갔고.
구급대원들은 재빨리 진희성을 구급차에 실었다.
곧이어 구급차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고.
김 실장은 그런 진희성의 곁을 지키며, 눈물을 머금었다.
“희성아… 안 돼. 희성아….”
진희성은 힘이 쫙 풀린 채로 팔을 떨어트렸고, 그 팔을 보는 순간.
김 실장은 고였던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희성아… 희성아….”
“환자분, 정신이 드십니까?”
“진희성 님, 목소리 들리세요?”
칠흑같이 까만 어둠 속.
저 멀리, 아주 멀리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음성.
누구인지, 몇 명인지, 어디서 내게 말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희…성아….”
점점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짙은 어둠도 조금씩 흐릿해져만 갔다.
으윽….
젠장.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복부에 미친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 이러다가 죽는 건가?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건가….
타앗-
“안 돼… 죽으면 안 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안은 채, 울부짖고 또 소리쳤다.
“안 돼…!”
얄궂은 세상 탓인지.
지독한 신의 벌 때문인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내가 신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신은 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벌을 주고 싶길래.
이제는 무(無)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음….
남들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생.
그래서 더욱 간절한 인생.
하지만 나는 10년만 지나면, 다른 이의 생으로 또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생에서도 결국, 10년밖에 살지 못하겠지.
이런 삶이 무려 1천 번을 반복해야만 나는 이 거지 같은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1천 번의 탄생과 1천 번의 죽음.
그런 후에야 나는 비로소 탄생에서, 그리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1만 년이 끝난 후, 또다시 선택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
삶을 살지 않는 것을 택할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도.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을 힘겹게 살아나가야 할 이유도 없었지.
내겐 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타앗-
“연기를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해. 연습한 건 맞아?”
“네가 연기자야?”
“연기 그냥 때려치우는 게 낫겠다!”
나를 향한 거친 음성들.
그들의 말에 나는 점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내가 연기를 시작한 이유.
아니, 진희성이 연기를 시작한 건 왜일까.
어떤 이유든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진희성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내가 원하는 건.
간절히 하고 싶은 건, 연기였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었다.
타앗-
“으윽….”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신의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막대한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으니까.
“정말 윤회를 택할 것이냐.”
신은 내게 같은 질문을 재차 던졌다.
1만 년이라는 시간을 살았음에도.
그런 어마어마한 벌을 받았음에도, 무(無)가 아니라 윤회를 택한다는 건.
신에게도 놀라울 만한 선택인 모양이었다.
“1만 년이라는 지옥 같은 삶… 그럼에도 윤회를 택할 것이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 택한 그 선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어떻게 지옥에 살게 되는 건지 고스란히 겪어보아라.”
타앗-!
희미해진 정신.
뭐지… 꿈이라도 꾼 건가?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과거와 지옥.
1만 년 긴 시간의 기억들을 빠르게 반복했다.
악몽 같은 일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지나가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으윽….
고통스러움 속에 몸부림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만.
순간 뇌리를 스치는 기억.
‘윤회’.
1만 년의 삶.
그 긴 세월이 끝난 뒤, 나는 윤회를 택했다.
그러니까 다시 1만 년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지.
10년씩 반복되는 1만 년의 시간.
그동안 나는 무한 윤회를 하며, 1만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진희성의 몸에 있지만.
진희성의 몸에서 있는 이 시간은 1만 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몸에서 생을 다하는 순간.
지금 진희성이 죽는다면… 이대로 생을 마감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무한 윤회가 시작될 터.
내가 지옥 같은 1만 년의 루프를 끊지 못하고, 윤회를 택한 건.
사랑하는 사람, 송유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진희성의 몸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기로 하며, 선택한 삶인데….
이런 식으로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칼에 찔린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건가.
내가 왜….
* * *
[‘진희성’ 팬 미팅 중… 칼에 찔려 병원 이송….]
[팬 미팅 중 팬에 의해 칼에 찔린 ‘진희성’,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진희성’ 누굴 위한 팬 미팅인가? 피로 물든 팬 미팅.]
[진희성, 칼에 찔린 복부… 병원 이송…. 경찰 조사 착수.]
[눈물로 번진 ‘진희성’ 팬 미팅. 가해자는 팬으로 위장한 안티?]
인터넷은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세상을 들썩였다.
연예인에게 칼과 흉기로 위협한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팬 미팅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대중들의 관심이 더욱 폭발할 수밖에 없었지.
진희성이 급히 이송된 병원.
그 앞은 기자들과 진희성의 팬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병원 문이 열리고, 병원 관계자가 나올 때마다 기자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진희성 씨, 상태가 어떤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희성 씨는 깨어났습니까?”
“현재 환자 상태에 대해….”
그들의 질문에도 병원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으로 답을 내놓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
진희성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는 이유.
그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술조차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지.
병원도, 기자들도, 팬들도 모두 김 실장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수술실 앞.
김 실장은 양손을 모은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진희성이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중.
“김 실장님!”
송유나가 수술실 앞, 김 실장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왔다.
“유나 씨.”
그녀는 밖에서 대기 상태인 기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지.
모자는커녕, 얼굴을 하나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터.
송유나는 한바탕 눈물을 쏟았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김 실장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뭔데요… 왜….”
“연락한 대로, 팬 미팅장에서….”
김 실장은 희성의 여자 친구인 송유나에게 소식을 전했었고.
송유나는 촬영도 내팽개친 채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팬 미팅에서 어떻게 칼에 찔릴 수가 있는 건데요. 팬 미팅이라며… 그럼 희성이 팬들일 거 아니에요.”
그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김 실장에게 물었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해자가 송유나의 팬이라 그랬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알 리가 없는 송유나는 김 실장을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경찰 조사 내용 들었다면서요. 대체 왜 그랬대요. 무슨 일인데요, 대체!”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망설였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김 실장이 말하지 않아도, 기사가 터지면 누구든지 알게 될 이야기였으니까.
“그게….”
그가 입을 열자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에게 집중했다.
“그 새끼가… 유나 씨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냥 팬이 아니라, 광적인… 미친 사람이요. 유나 씨랑 희성이가 연애….”
김 실장은 경찰 조사에서 황한범이 했던 진술을 짧게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듣는 송유나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작 그거 때문에 사람을 찌른 거라고요?”
송유나는 말을 더듬으며 겨우 물었고.
김 실장은 고개를 떨군 채 답했다.
“네.”
“하아… 말도 안 돼.”
송유나는 이내 참던 눈물을 터트렸다.
몸을 파르르 떨며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
김 실장은 그저 휴지를 건네며 달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눈물을 쏟은 송유나는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댄 채, 읊조렸다.
“오빠가 저렇게 된 거… 나 때문인 거지?”